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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Interview

‘이해랑 연극상’ 수상한 중견 배우 정동환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입력 2009.05.22 16:25:00

제19회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를 결정하면서 심사위원회는 정동환에 대해 “드라마·영화에서 활약하면서도 꾸준히 연극무대에 오르며 혼신의 힘을 쏟아 열정적인 인물을 창조한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고 평했다. 환갑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호기심과 에너지, 모험을 피하지 않는 정동환의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삶, 사랑 그리고 무대 이야기.
‘이해랑 연극상’ 수상한 중견 배우 정동환



올해는 정동환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해다. 69년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데뷔 40주년, 게다가 그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경사가 추가됐다. 지난 4월, 제19회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 것이다.
마감을 코앞에 둔 4월18일 밤, 기자는 서울 광화문에서 그와 마주했다. 시상식을 마친 직후 딸에게 갔다온다며 중국으로 떠난 그는 17일이 돼서야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다시 상가(喪家) 두 곳을 방문해야 했고, 그가 간신히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18일 밤뿐이었다.
이런저런 일정 탓에 많이 지쳐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살짝 붉은 빛 마티에르를 띠며 노화를 드러낸 그의 피부는 묘한 광택을 내며 번들거렸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마주 볼 때 그것이 기쁨과 환희, 그리고 정열의 빛깔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환갑의 나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환갑이 되면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새삼 되돌아보고 반추한다고들 한다. 그런 때에 큰 상을 받고, 지나온 삶의 궤적이 커다란 열매로 영글어 이 세상에 어떤 의미로 남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인 듯 싶다. 행상을 하며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 이야기에서부터 연극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남편 탓에 고생했던 부인에 대한 미안함까지 한 번 터진 이야기의 봇물은 장강(長江)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엉뚱하게도 그는 자신의 삶을 최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삶에 빗대어 이야기했다.
“감히 나같은 속인이 추기경님을 빗대 내 삶을 이야기했다는 게 불손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요. 며칠 전에 정채봉씨가 쓴 ‘바보 별님’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걸 읽다 보니 정말 기가 막힌 거야. 이분의 삶도 나하고 다를 바 없었구나. 다른 것이 있었다면 추기경님은 고비 때마다 그 관문을 다 넘었고, 나는 내 인생의 고비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 그 실패가 쌓이고 쌓여서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의 나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이 오더라고요.”
행상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우는 가난한 어머니의 둘째 아들. 그는 자신의 삶을 ‘가난을 이고 태어나 가난이 두렵지 않았던 삶’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름대면 알 만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차남인 그까지 고교에 진학하겠다고 감히 말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고교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공부를 잘해 수재 소리를 듣던 형과는 달리 매사 그렇게 실패만 하던 별 볼일 없는 아들이었다고 그는 당시의 자신을 회상했다. 부친에 대해 묻자 그는 “아버지는 따로 사셨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고교 입시, 대학 입시 두 번 다 실패 겪어
변두리를 떠돌다 끝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과 형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불우한 환경에 대한 반항심까지 겹쳐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 시절, 그는 마법처럼 연극과 만났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잘해서 학비 안 내도 되는 신학대에 가길 바랐어요. 그런데 고교 입시까지 떨어지고 나니까 할 말이 없었죠. 당시에 공부할 곳이나 있나? 가방을 들고 하릴없이 시립도서관에 가던 길에 드라마센터 앞을 지나가다가 그냥 홀린 듯이 연극을 보러 들어간 거야. 당시 중동고등학교 연극부 학생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연극이란 세계를 처음 발견했어요. 그게 그만 내 인생을 결정해버린 거죠.”
그는 중동고에 지원하기로 결심했고, 고교에 진학하겠다는 아들을 어머니는 막지 않았다. 그는 결국 중동고로 진학, 곧 연극반에 들어갔다. 1학기 때는 먼 발치에서 가슴만 두근거리다 돌아섰고, 2학기 때에야 간신히 문을 열고 들어간 연극반에서 그는 1학년 시절에 벌써 큰 배역을 맡았다.
그가 고교 1학년 때이던 지난 65년,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 ‘일출’이란 연극으로 참가했을 때 그는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이 대회의 주관자가 우리나라 연극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유치진이었고, 그는 그 거물에게 연극계의 ‘재목감’으로 눈도장을 받았다.

‘이해랑 연극상’ 수상한 중견 배우 정동환

“연극도 열심히 했지만 대학 갈 욕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도 떨어진 거예요. 한 대학 철학과에 지원했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만 거지. 그래서 서울연극학교(서울예대의 전신)에 계신 유치진 선생님을 찾아간 거예요. 나 학비가 없는데 학교는 다니고 싶다. 집안 형편상 재수도 할 수 없고, 이름 있는 대학이 아닌 이상 학비를 대달라고 말할 명분도 없다, 그렇게 간절히 사정을 털어놓았더니 선생님이 전액장학금을 받게 해주셨어요.”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겪은 또 한 번의 시련, 그리고 그때 그를 구제해준 것도 다시 한 번 연극이었다. 유치진은 그에게 무대감독 일을 하는 조건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다. 그는 “나무토막 하나까지 내 손으로 다듬어 세우게 되면서 무대는 그렇게 나에게 성스러운 공간이 돼갔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곧 그는 군대에 갔다. 그가 군대에 간 사이 “한 학생이 전액 장학금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작게 나눠 가급적 많은 학생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며 전액 장학생 제도가 폐지됐다. 또 한 번 시련이 닥친 것이다.
“난 참 운이 좋았어요. 그때 월남 파병을 갈 수 있었거든요. 어차피 군대 마치고 돌아가봐야 학교로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돈이나 벌어오자, 싶어서 월남행을 자원한 거죠. 보통 월남은 12개월밖에 있을 수 없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가 패망 직전이어서 18개월이나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대를 넘겨서까지 있다가 73년에 돌아왔죠.”
월남에서 벌어온 돈이 조금 있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상 학교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극도 연극이고, 공부도 공부지만 일단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다. 월남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동아방송 성우 시험에 도전했고, 1000대 1의 경쟁을 뚫으며 합격의 영예를 얻었다. 잠시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금방이었다.
“한 1년 하고 몇 달 정도 더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회사 통틀어서 청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어. 내가 튀려고 그런 게 아니고 당시 나는 양복 한 벌 살 돈이 없었다고. 난 지금도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그런 걸로 눈치를 주더라고요. 게다가 내가 한 대학 연극부 연출을 도와줬는데 회사 다니면서 바깥 일 한다고 주의도 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둬버렸지.”
1년여 남짓, 짧은 직장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다시 연극무대와 생계를 오가야 했다. 그가 생계로 선택한 일은 엉뚱하게도 막노동이었다.

무대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막노동 등 하지 않은 일 없어
“일본에 가서 계절노동 같은 걸 했어요. 파인애플 따는 일도 하고, 공장 가서 잡부로 일하기도 하고. 밀항은 아니고 시험 보고 정식비자 받아 갔죠. 지금 동남아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와서 한 달 일하면 일년치 월급 벌어간다고 하지 않아요? 그것하고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가서 한철 일하고 돌아오면 수입이 괜찮았거든요.”
방송사 성우를 그만두고 선택하기엔 너무 ‘험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동아방송 그만두고 75년에 연극 ‘마의태자’ ‘출세기’ 등에 출연했어요. ‘마의태자’에서 내가 태자 역을 맡았는데 내 이름이 연극배우로서 알려지고 각인된 게 그 연극 덕분이었단 말이에요. 내가 안정된 직장을 버린 것에 비해서 내가 얻은 것 또한 결코 적지 않아요.”
가난을 평생 지고 살았기 때문에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무대에 짐이 되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막노동을 하건, 뭘 하건 몸 팔고 영혼을 파는 일만 아니라면 생활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라고 한다.
“드라마, 영화에도 출연하고 했기 때문에 연극 외길을 걸어온 사람들에 비하면 순수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죠. 생활인으로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내 생활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저것 다 한 거예요.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정이나 순수함을 버리지 않았어요.”
생활인으로서 나름대로 현실감각은 유지했다고 자부하는 그다. 그러나 못내 미안한 사람은 있다. 돈벌이에 그다지 도움 안 되는 연극무대에 끊임없이 오르는 남편 탓에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던, 꼭 생활고라고는 하지 못해도 남들 다하는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했던 부인 때문이다. 그는 지난 86년, 가수로 활동하던 정윤선과 결혼했는데 당시 주례를 섰던 인물이 공교롭게도 이번에 받은 ‘이해랑 연극상’의 그 이해랑이었다고 한다.
이후 TV와 영화, 연극을 오가며 하루도 쉴 틈 없이 살아왔다. 밤새워 방송 촬영을 마친 뒤 바로 연극무대에 뛰어올라가 거침없이 긴 대사를 토했고, 다시 아무 휴식 없이 지인들과 어울려 산을 오르기도 했다. 휴식이라곤 몰랐다. 잠시라도 쉬면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았는지,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재작년, 그는 공황장애를 겪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았어요. 심장이 가빠지고. 가만있으면 넘어질 것 같아서 의자에 앉을 때 발을 의자다리에 걸고 앉아 있었죠. 그래도 내 몸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누가 나한테 배역을 주려고 하겠어요. 내가 하고픈 작품이 막 무대에 올려지는 판인데, 그걸 하고픈데 그렇게 쓰러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숨기고 버텼지.”
비싼 보약이란 것도 먹어보고 이곳저곳 종합병원도 찾아봤지만 뾰족한 해법을 찾을 수 없었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던 터라 경기도 광주에 살던 그는 광화문 인근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동선이라도 줄여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그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작은 개인병원을 찾았는데 거기서 준 알약이 그를 구원해냈다.
“몇 십만원짜리 보약으로도 안 됐어요. 그런데 그 동네 병원에서 처방해준 백 몇십원 하는 알약을 먹으니까 이게 효과가 있어요. 살겠다, 싶더라고요.”
혹 생활에 대한 부담감,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심리적인 걱정이 공황장애를 유발한 것은 아니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너무 쉬지 않고 몰아쳐서 생긴 병, 무리해서 생긴 병일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못 견디는 스타일이라 너무 무리했을 뿐이라고. 문득 중국에 있다는 딸이 몇 살인지 묻자 그는 “중학교 2학년”이라고 답했다. 환갑의 나이에 중학생 딸, 아마도 지난 2년간 그의 심적 부담은 생각보다 컸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때문일까, 다시 연극상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그의 표정이 확 되살아난다.

돌아보면 내 속에 감춰진 섬광을 연극 통해 발견한 세월
“난 연극에서 길을 찾은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태어난 가정환경은 비슷했지만 살아온 내력을 보면 서로가 정 반대의 길을 걸었어. 그분은 끊임없는 성공을 거쳐 종교 속에서 길을 찾았고 나는 실패가 쌓이고 쌓여 이 길로 왔어. 연극무대를 볼 때마다 짝사랑하던 그녀를 볼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떨렸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두렵고 안타까울 뿐이었지.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번민했을 뿐이고, 무대를 떠나지 못했을 뿐이야. 돌아보면 단 한 번만 그 길이 어긋났어도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야.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날 이곳으로 흘러오게 한 거야. 그런데! 그런데 그 모든 우연과 운명적인 상황들이 맞물려 한 세상이 지났을 때, 그 끝에서 만난 세계는 김수환 추기경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운명이고 신념이고, 그게 바로 연극이지. 연극은 바로 종교야!”
그리고 그는 곧 그에게 이번 연극상을 안겨준 ‘고곤의 선물’의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신념? 당연히 연극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종교다. (중략) 당신들 속에 감춰진 섬광(閃光)을 연극을 통해 보게 될 거다!”
그는 왜 이 대사를 인용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오래도록 찾았지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극작가 피터 쉐퍼를 통해 드디어 내가 찾아낸 바로 그 말이다”라고.
여성동아 2009년 5월 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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