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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프라이버시 인터뷰

중견배우 최일화의 파란만장 인생고백

드라마 ‘연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강 회장으로 인기,

글·이남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에델만 제공|| ■ 장소협찬·사다리아트센터 ■ 메이크업 협찬·박준뷰티랩

입력 2007.01.24 11:11:00

최근 드라마 ‘연인’에서 서늘한 눈빛연기를 펼쳐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우 최일화. 그의 연기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생계유지를 위해 20년 넘게 온갖 막일을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띠동갑 아내의 헌신적 내조를 받으며 마침내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그로부터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 역정에 대해 들었다.
중견배우 최일화의 파란만장 인생고백

서늘한 눈빛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는 듯 강렬하다. 묵직한 저음의 차가운 목소리는 심장을 뒤흔든다. 얼굴에 드리운 굵은 주름 하나하나에는 인생이 아로새겨져 있다. 최근 SBS 드라마 ‘연인’에서 선 굵은 연기를 펼치고 있는 중견배우 최일화(48)의 이야기다.
20년 넘게 연극무대에서 연기의 내공을 쌓아온 배우 최일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그는 영화 ‘한반도’와 ‘왕의 남자’, 드라마 ‘패션 70s’ ‘황금사과’ ‘늑대’ 등에 출연하며 스크린과 TV를 넘나들고 있다. 최근 드라마 ‘연인’에서 주인공인 하강재(이서진)와 강세연(정찬)의 갈등에 중요한 키를 쥔 강 회장으로 등장한 그는 멋진 중년의 외모를 보여주며 ‘미(美)중년’이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의 안정된 연기가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20여 년간 하나의 꿈을 향해 어둡고 힘겨운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84년 극단 마당세실에 입단하며 연극을 시작한 그는 89년부터 10년 가까이 극단 신시에서 동료들이 주연으로 커가는 동안 소품을 담당한 배우였다. “연극을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했다”는 그는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벽에 포스터를 붙였다. 중풍으로 누워있는 아버지와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던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백화점 영업, 찹쌀떡 장사, 아파트 경비까지 20가지가 넘는 일을 전전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는 ‘연기파 배우’라는 자랑스러운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2월 초 서울 혜화동 사다리아트센터에서 만난 최일화는 화면에 비쳐진 서늘한 첫인상과 달리 소탈한 모습이었다. ‘차가울 것 같다’는 선입견은 그의 환한 웃음에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제 겨우 TV에 나온 지 1년밖에 안 된 배우가 인터뷰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 같다”며 자신을 낮추던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허투루 답하는 법이 없었다.
최일화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방영된 SBS 드라마 ‘패션 70s’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 김홍석 역으로 등장하면서부터다. 주인공 김동영(주진모)의 모범이 되는 아버지로, 아들에게 애틋한 부정을 쏟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를 보고 ‘저 사람, 대체 어디서 나타났을까’ 하며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최일화는 “나를 믿고 캐스팅한 이재규 감독에게 감사한다”며 “‘패션 70s’는 내 인생의 봄날을 만들어준 드라마였다”고 말한다.
“20년 넘게 연극무대에 서다보니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당시 TV 드라마에 작은 단역이라도 맡아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 지인이 ‘패션 70s’의 대본을 제게 건넸습니다. 인기 드라마 ‘다모’를 만든 이재규 PD의 작품이라고 하면서요. 드라마의 첫 대본 리딩에 가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어요. ‘이 작품에 단 1회라도 출연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죠. 그러던 어느날 밤, 우연히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 작품 꼭 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꿈이 이뤄졌습니다. 이재규 감독은 제가 주연을 맡은 연극 ‘삼류배우’에 대한 기사들을 읽고, 주변 배우들에게 일일이 저에 대한 의견을 구했던 모양이에요. 이 감독이 절 포기하지 않고 데려와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처음 출연한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아 기뻤고요.”

“같은 대사를 1천 번씩 반복하며 연습,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연기에 매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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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에서 강 회장으로 열연하는 최일화.


그의 무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실함이다. ‘연인’의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에서 가장 선배격인 최일화씨는 항상 30분 먼저 도착해 대본을 연습하는 등 촬영장에서 늘 모범을 보여준다”고 칭찬했다. “연기에 도가 트신 분이 왜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느냐”는 우문(愚問)에 그는 “배우는 다른 작품을 하며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80~90년대, 저는 대사가 한 마디밖에 없는 단역을 주로 맡았어요. 그땐 ‘왜 내게 비중이 없거나 80세가 넘는 노역만 들어올까’ 하고 고민했었죠. 생각해보니 문제는 제가 조그만 역할을 하면서 ‘내일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이 역할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역이다’ 생각하고 치열하게 연기해야 했는데…. 역할의 중요성을 떠나 저를 무대에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란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연기에 매달렸어요.”
최일화는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앤터니 홉킨스를 역할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과거 영국 왕립극단에서 활동한 홉킨스는 한 대사를 무려 1천 번씩 연습한 집념의 소유자라고.
“극단 신시를 이끈 고 김상열 선생님이 앤터니 홉킨스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어요. 저도 95년 결혼한 뒤 대사를 1천 번씩 반복하는 연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말이 1천 번이지 하루를 꼬박 해도 끝나지 않을 만큼, 힘든 작업이었어요. ‘오늘 비가 오는구나’ 같은 대사를 톤과 억양을 달리하며 계속 중얼거리는 거죠.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밥 먹고, 신문 보고, 걸어다니면서 저도 모르게 대사를 흥얼거리게 됐습니다. 직접 해보니까 홉킨스가 왜 그렇게 연습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최일화의 고향은 전북 고창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이모와 이웃집 누나를 따라 악극단 공연을 보러 다니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신발이 닳을까봐 맨발로 흙바닥을 누비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그에게 어렴풋이 남아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에 올라온 그는 4학년 때부터 동생들과 함께 ‘아이스께끼’를 팔러 다녔다. 아르바이트로 고물을 줍는 일도 했다. 공사판,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을 하던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당시엔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다 그랬기에 힘들단 생각을 안 했어요. 중학교 때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방황을 시작했죠. 집안 사정도 어려운데 공부만 할 수는 없겠다는 자각이 생겼으니까요. 고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천지역의 혼성 고교 서클을 이끌며 연극 대본을 쓰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나선 일이었습니다. 일찍부터 그렇게 나섰던 걸 보면 연극이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곧장 군대로 향했다. 빨리 군복무를 마친 후, 야간대학에 다니며 낮에는 일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대하기 보름 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지며, 그는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다. 2남 2녀 중 장남인 그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에게 모든 짐을 전가할 수는 없었다. 그는 20대 시절 인천에 있는 공장 중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특별한 기술도 없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신발공장에서 신발에 깔창 까는 것을 돕고, 프레스 옆에서 기능공을 보조하고, 악기 회사도 다니고…. 그렇게 쳇바퀴 도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돌파구를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연히 선배를 따라 84년 극단 마당세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마당세실에 입단한 그는 배우 김갑수, 이혜영 등과 함께 연극 ‘님의 침묵’에 출연했다. 대사 없이 무대를 뛰어다니거나 소품을 만들고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낮에는 연기를 배우고 밤에는 남대문 시장, 명동 일대의 쓰레기를 치우며 돈을 버느라, 그는 늘 잠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오전 7시에 출근하는 영업사원으로도 근무했는데, 잠을 떨치려고 하루에 커피를 30잔씩 마셨어요. 그때 속을 다 버린 탓에 지금은 커피를 한 모금도 못 마십니다.”
그는 89년 극단 신시에 입단하며, 연기 연습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활동하면서도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해, 그는 줄곧 조명, 소품, 음향 등 무대 뒷일을 주로 맡았다.

처가 반대 무릅쓰고 결혼한 띠동갑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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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화는 극중 인물과 ‘쨍’하고 만날 때 만큼 강한 환희를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은 95년 결혼이다. 최일화와 띠동갑인 부인 전일주씨(36)는 시부모 수발과 생계유지를 도맡아 그가 연극에만 전념하도록 지원했다. 그는 “당신은 천천히 기회가 오는 사람이니까 조바심내지 말라”고 조언하는 부인 전씨를 일컬어 ‘정신적 지주’라고 표현했다.
“92년 극단 신시에 무대 소품으로 쓸 ‘곰 탈’을 빌려달라고 한 아가씨가 찾아왔어요. 당시 소품을 담당하던 제가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빌려주느냐’고 반문했더니, 이 맹랑한 아가씨가 ‘저만 믿고 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모습에 왠지 믿음이 가더라고요. 이후 그 아가씨가 공연을 할 때 제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갔죠. 그렇게 집사람과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3년을 손도 못 잡고 지냈어요. 대시, 그런 거 할 주제도 아니었고 용기도 없었으니까요. 혼자 그 사람을 막 좋아하다가도 ‘내가 미쳤지’ 하고 수차례 마음을 접으려 했죠. 하지만 집사람이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손 한 번 잡아보고 싶다’고 고백하면서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됐다. 당시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결혼하라”는 주변의 거센 압력을 받던 중이었다. 그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와 편찮으신 어머니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부인 전씨에게 “결혼해달라”고 프러포즈했다. 그 순간 전씨는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스르르 놓고 말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뭐 그렇지’ 하며 그가 체념할 즈음, 부인 전씨가 “결혼하겠다”고 몇 달 만에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처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처가를 처음 방문한 날, 그는 매섭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나잇살 먹었으면 곱게 살아야지” 하는 장모의 모진 말이 대문 너머로 들려왔다.
“집안 형편도 어려운 데다 열두 살이나 많은 제가 어린 딸을 데려간다니 장모께서 많이 속상하셨을 겁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자 아내는 제게 ‘아기를 먼저 낳자’고 제안하며 집을 나왔어요. 집사람이 임신 3개월이 돼서 처가를 찾아갔더니, 장모께서 결혼을 서두르셨어요. 하루는 장인·장모께서 상견례를 위해 저희 부모님이 사는 인천 집을 찾으셨는데, 아버지는 꼼짝없이 누워 계셨고 서울에서 파출부 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퀭한 얼굴로 두 분을 맞이하셨죠. 인천 집은 공동 화장실을 쓰는 낡은 단칸방이었고요. 이 모습을 보며 장인·장모는 눈물을 참느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죄인일 수밖에 없는 아내는 집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그는 선배 배우 박인환에게 15만원을 빌려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던 그는 언젠가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못 다녀온 신혼여행을 꼭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부인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기에 매달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뮤지컬 전문 극단으로 바뀐 신시에서 나온 뒤 그는 무려 16개 극단을 돌아다니며 “일을 달라”고 했지만, “감이 아니다” “나이가 많다” “배우로서의 개성이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때 그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이 바로 연출가 한태숙씨였다. 한씨가 98년 연극 ‘나, 김수임’에서 그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며, 그는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당시 저는 쌀이 없어서 서너 살 된 큰아들에게 보름 동안 라면만 먹인 못난 아버지였습니다. 나이는 먹고, 아이는 자라고, 빚은 늘어나 주변 사람들이 ‘연극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던 시점에서 한태숙 선생님이 제게 배역을 주신 거예요. 하루는 한 선생님이 제게 ‘일화야, 난 무대에서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내와 아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죽을 만큼 연습했어요. 꿈에서도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나타날 정도였죠. 그러자 어느 날은 박정자 선생님이 오셔서 제게 악수를 청하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배우가 있구나’ 하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연기는 점차 빛을 발했다. 2003년 출연한 연극 ‘추적’ ‘서안화차’로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그는 그해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했고, 2004년에는 연극 ‘삼류배우’에서 데뷔 20년 만에 첫 주연을 맡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그는 연기에 중독돼 있었다.
“그때는 정말 신이 났어요. 사람들이 이래서 죽어가면서도 연극을 하는구나 싶었죠. 연기가 하고 싶어 술 마시고 잠자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무대 인물과 ‘쨍’ 하고 만났을 때만큼 강한 환희를 느낀 적이 없어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결코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제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였어요.”

“단칸방에 살던 부모님을 화장실 딸린 집에 모시게 된 것이 가장 기뻐요”
연극무대에서 영화, TV까지 활동의 외연을 넓힌 그는 지금껏 자신을 위해 헌신한 아내와 식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결혼한 뒤 생계를 꾸리느라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한 그의 부인은 무리하게 일한 탓에 디스크 판정까지 받았다고. 연극하는 선후배들이 몇 십만원씩 보태줘 부인이 수술을 받긴 했지만, 아직 완치되지 않아 여전히 통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집사람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집사람은 저의 연기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줍니다. ‘패션 70s’가 끝난 후 연기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아내의 말에 공감하고 있어요. 장인·장모님은 생명의 은인과 마찬가지죠. 집안이 어려울 때 저 모르게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패션 70s’가 끝난 뒤 제가 빚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집사람이 가르쳐줘서 처음 알았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동서도 제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셨고요. 그분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연기하려고 합니다.”
최일화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는 존재는 바로 두 아들이다.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큰아들 한결(12)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생각이 깊다고. 2004년 태어난 늦둥이 아들 한길(3)은 요즘 한창 재롱을 떨어 그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한길이가 태어난 후 제가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어요. 어떤 이는 저와 아내, 큰아들 한결이가 모두 돼지띠여서 삼재가 한꺼번에 왔다 나갔는데, 원숭이띠인 둘째가 태어나면서 행운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요즘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서울의 단칸방을 전전하던 그가 얼마 전 40여 년 된 연립주택에 전세를 얻어 부모님을 모시며 살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인천의 단칸방에 살던 부모님을 화장실 딸린 집에 모시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최일화는 자신을 가리켜 “운이 좋은 배우”라고 말했다. 자신보다 더욱 뛰어난 수백 명의 연극배우들이 지금도 어려운 여건에서 연기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쏠리는 뜨거운 관심과 달콤한 유혹에도 그는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맡은 역할을 우직하게 해내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다.
“‘내 몸이 너무 빨리 가면, 내 영혼이 쫓아가지 못한다’는 티베트의 격언이 있습니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데 욕심내기 보다는 제게 주어진 역할을 혼신을 다해 해내고 싶어요.”
여성동아 2007년 1월 5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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