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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명문대 총장의 조언

‘따뜻한 리더십 갖춘 21세기 인재로 아이 키우기’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이 들려주는~

글·송화선 기자 / 사진·지호영‘프리랜서’,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6. 09. 21

숙명여대가 변하고 있다. 올해로 개교 1백주년을 맞은 이 대학의 캠퍼스 부지와 교원 수는 지난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었고, ‘현모양처의 산실’로 여겨지던 학교 이미지도 ‘여성 지도자를 키우는 대학’으로 180도 바뀌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서있는 이경숙 총장을 만났다.

‘따뜻한 리더십 갖춘 21세기 인재로 아이 키우기’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63)은 우리나라 제3호 여성 정치학 박사다. 일반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기도 어렵던 1960년대에 그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총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직선제 총장 4선 연임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94년 4년 임기 숙명여대 총장으로 취임한 뒤 세 번 더 거푸 당선돼 오는 2008년 정년을 맞을 때까지 총장직을 이어가게 됐다. 그가 총장으로 있는 동안 숙명여대는 캠퍼스 부지가 2배로 늘고, 건물 20동이 새로 지어졌으며, 학교 발전기금 모금액은 1천억원을 돌파하는 비약적 성장을 이뤘다. 이 총장이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리더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1세기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섬김의 리더십’
이 총장을 만나기 위해 숙명여대를 찾은 날은 마침 조간신문에 전국 대학 기부금 순위 기사가 실린 날이었다. 함께 나온 2004년 기부금 모금 현황표에 따르면 숙명여대는 한 해 동안 2백78억1백만원을 모금해 전국 대학 가운데 6위, 여자 대학 가운데서는 1위를 차지했다. 이 총장은 이 기사를 언급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제가 처음 총장에 취임했을 때만 해도 우리 학교의 기부금 최대 모금 실적은 2억원이었어요. 95년에 ‘제2 창학’을 선언하면서 개교 1백주년을 맞는 올해까지 기부금 1천억원을 걷겠다고 말하자 다들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죠. 그런데 보세요. 올해까지 11년 누적 기부금이 1천50억원을 넘어섰어요.”

‘따뜻한 리더십 갖춘 21세기 인재로 아이 키우기’

숙명여대 캠퍼스에서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경숙 총장.


이 총장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학 기부금 순위를 결정짓는 건 상당 부분 ‘동문들의 힘’. 졸업생이 남녀공학에 비해 적은데다 그들 대다수가 주부인 숙명여대는 큰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에 대해 이 총장은 “꿈과 희망으로 동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이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숙명여대의 전신인 ‘숙명여자전문학교’ 졸업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학교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며 “선배님들이 다니시던 시절의 숙명을 돌려드리겠다”고 약속했다고. 결혼 후 주부로 지내느라 주소조차 확인되지 않던 동문들을 찾아내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뒤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동문 주소록을 만들고 보니 95년 당시 누적 졸업생이 4만3천 명 정도 되더라고요. 그해 인문·사회 계열 등록금이 1백50만원이었고요. 졸업생 1명이 한 달에 5만원씩 30개월만 보내주면 적어도 6백억원은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졸업생의 80%가 주부거든요. 한꺼번에 큰돈을 내기는 어렵죠. 하지만 ‘등록금을 한 번 더 내는 걸로 학교 사랑을 표현해달라’고 호소하니 기꺼이 참여해줬어요.”
그의 노력 덕에 95년 열린 ‘제2 창학 선언식’에는 동문 2천6백 명이 참가했고, 행사 당일에만 62억원의 기부금이 약정됐다고 한다. 지난 11년 동안 ‘등록금 한 번 더 내기’에 참여한 동문은 1만 명이 넘는다고. 한 명 한 명이 낸 액수는 적었지만, 그 돈이 모이자 결과는 놀라웠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해 스스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리더십. 기부금 1천억원 모금과정에서 보여준 이러한 리더십을 그는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불렀다. 지도력을 뜻하는 ‘리더십(leadership)’과 섬기는 정신을 뜻하는 ‘서번트십(servantship)’을 결합한 말이다.
“과거에는 ‘리더십’을 상명하달의 수직적인 개념으로 여겼잖아요. 하지만 현대의 리더십은 달라요. 전 엄마가 자녀를 키우는 모습이 바로 ‘섬기는 리더십’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장서서 아이를 이끌기는 하지만, 그 바탕에는 자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깔려있죠. 그래서 아이는 엄마를 사랑하고, 스스로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게 돼요. 좋은 지도자는 엄마처럼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해주면서 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이죠.”
2004년 교육부로부터 ‘리더십 특성화 대학’으로 지정된 숙명여대의 슬로건은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이 총장이 추구하는 ‘섬기는 리더십’을 풀어서 설명한 말이다.

“어린 시절 제가 받았던 사랑과 기대가 오늘의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그럼 자녀를 ‘섬기는 리더십’을 갖춘 인재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총장은 자녀에게 사랑과 배려심을 키워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아이를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섬김의 리더십’ 모범 사례가 이 총장인 것처럼, 그가 받아온 교육도 ‘섬김의 리더십’을 길러주는 모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이 총장은 2남4녀 가운데 셋째 딸.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은 성신여대 이숙자 전 총장(58)이다. 이 전 총장 역시 언니처럼 정치학을 전공한 우리나라 제5호 여성 정치학 박사로, 한 집안에서 두 딸이 나란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 총장을 역임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이 총장은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무슨 일을 하든 우리를 믿어주셨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여자가 무슨 정치학이냐’고 하는 대신 ‘네가 하면 틀림없이 잘할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고 회고했다.
이 총장 자매는 둘 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 수석으로 입학해 총학생회장을 지낸 뒤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숙명여대에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이 총장이 숙명여대를 다니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

‘따뜻한 리더십 갖춘 21세기 인재로 아이 키우기’

이경숙 총장은 축제 때마다 난타 연주자, 댄스 가수, 뮤지컬 배우 등으로 변신해 공연을 펼치며 권위 의식을 깨는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한다.


“경기여고 졸업반 때 담임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남녀공학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교수가 되기 힘들다. 마침 숙명여대에서 전액 장학금에 용돈까지 주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교수 임용도 보장하는 특별장학생을 모집한다고 하는데 그쪽에 진학하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셨어요. 학교 추천을 받아 장학생 선발을 위한 숙명여대 학력경시를 치렀고 1등을 했죠.”
당시 이 총장의 담임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미국 유학파였다고 한다. 그는 이 총장에게 “숙명여대에서 총장감을 보내달라고 하더라. 열심히 해서 꼭 총장까지 돼라”고 격려했다. 이 총장은 “어린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는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분이 내게 교수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주고, 큰 꿈을 꾸라고 격려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고백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이 총장은 남다른 사랑과 배려를 받았 다. 스스로 “아무리 제자들에게 잘해준다 해도 내가 받은 사랑을 다 돌려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일례로 68년 이 총장이 숙명여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전 교직원이 학교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나와 그를 환송했다고 한다. 숙명여대 전·현직 총장도 공항까지 와서 그를 배웅했다. 단돈 1백 달러를 들고 가는 가난한 유학길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 한 달 동안 아이오와에 있는 한 미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우리말이 하고 싶어서 혼자 방 안에 앉아 동요를 부르곤 했죠. 그때만 해도 아이오와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거든요. 문화적 충격도 컸어요. 우리나라에는 수세식 화장실도 변변히 없을 때였는데 불쑥 외국에 나갔으니 모든 게 얼마나 낯설었겠어요. 말하는 것부터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까지 모든 게 다 힘들기만 했죠.”
특히 언어장벽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그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유학 후 첫 시험을 준비할 때는 도저히 답안지를 채울 자신이 없어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다 스트레스와 과로가 겹쳐 쓰러지는 바람에 아예 시험장에 가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아마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었다면 그때 돌아와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공항에 나와 저를 배웅해주시던 그 많은 분들의 믿음이 떠올랐죠. 주저앉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자라게 하는 건 ‘꾸중’이나 ‘지시’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이 총장은 마침내 75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숙명여대 교수가 됐다. 여교수가 극히 드물던 시절 그의 교수 임용은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여자 후배와 제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총장은 자신을 ‘역할 모델’로 삼는 많은 이들의 믿음 때문에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고. 그가 ‘믿음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는 이유다.



“아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도 ‘너는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세요”
“부모의 자녀에 대한 믿음도 절대적인 것이어야 해요. 아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도 믿고 격려하는 거죠. 대부분 부모들은 아이가 ‘나 이제부터 열심히 할 거야’라고 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걸 지금까지는 왜 못했어’라든지 ‘네가 뭘 열심히 해. 지금까지도 안 해놓고’라고 말하거든요. 그럼 아이는 기가 죽어요. ‘아, 나는 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무조건 ‘맞아. 넌 잘할 수 있어’라고 맞장구 쳐주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게 중요하죠.”

일단 자녀를 믿은 후 할 일은 목표를 세워주는 일이라고 한다. 이 총장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머뭇거리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없으면 절대 리더가 될 수 없다. 리더십을 기르려면 어릴 때부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깊게 생각하고, 큰 꿈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특히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총장은 어린 시절 자신이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여성은 교수가 되기 힘든 시대였음에도 주위 사람들이 그 꿈을 인정하고,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준 뒤, ‘총장이 돼라’는 더 큰 비전까지 제시해준 일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 총장의 목표는 이제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그런 부모, 스승이 되는 것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좋은 리더를 낳죠. 부모가 먼저 ‘섬기는 리더’가 되면 자녀는 자연스럽게 따뜻한 리더십으로 세상을 바꾸는, 21세기에 인정받는 인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경숙 총장이 직접 털어놓은 부부 사랑 & 가족 이야기
“남편 외조로 박사학위 포기할 뻔한 위기 넘겨,
   아이들 키울 때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함께 먹었어요”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의 남편은 고려대 부총장을 지낸 최영상 교수(67)다. 이 총장이 숙명여대를 수석 졸업하던 해 최 교수 역시 고려대를 수석 졸업해 이들 부부는 ‘수석 부부’로 불린다.
두 사람은 소문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 뿐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이 총장이 숙명여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반면 최 교수는 바로 미국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인연을 만들어준 이는 최 교수의 매형 고(故) 정요섭 교수. 당시 숙명여대 정법대 학장으로 이 총장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정 교수는 그가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자 “성실하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니 한번 만나보라”며 넌지시 최 교수에 대한 언질을 줬다고 한다. 이후 최 교수가 미국 아이오와에 있는 이 총장을 찾아오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이 총장은 최 교수의 첫인상에 대해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일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이어서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 교수는 71년 결혼한 뒤 이 총장이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박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이 총장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박사학위를 포기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고 한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졸업시험을 통과한 74년, 먼저 박사학위를 받은 최 교수가 플로리다 마이애미대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함께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이 총장의 지도교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있었지만, 이미 논문 주제에 대한 상의를 마치고 자료도 모두 수집해놓은 상태라 플로리다에서 논문만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이 총장은 그해에 큰딸 진이양(32)도 낳은 상황이었다. 이들 부부는 먼저 짐을 부친 뒤 며칠 뒤 마이애미대학의 교수 사택으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이삿짐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가재도구뿐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이 총장의 논문 자료들도 한꺼번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때는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잖아요. 지도교수는 한없이 먼 곳에 있고, 그동안 준비했던 모든 것은 잃어버렸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자포자기 심정이 돼버렸죠. 마침 큰딸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때라 아이 돌보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어요. 나도 모르게 ‘현실이 이런 걸 어떡해. 그냥 이렇게 살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공부에서 손을 뗀 채로 몇 달을 지냈죠.”
그런데 어느 날, 최 교수가 퇴근길에 산더미만한 상자를 들고 왔다고 한다.
“그걸 제 앞에 내려놓더니 ‘박사학위 안 따도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알고 보니 대학 도서관에서 ‘정치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을 모조리 빌려온 거였어요. 그동안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는데, 속으로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하데요.”
그날 밤 이 총장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장래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최 교수가 빌려다준 책 가운데 정작 논문을 쓰는 데 쓸모 있는 건 한 권도 없었지만, 그 배려만큼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총장은 초안부터 논문작업을 다시 시작했고, 최 교수는 묵묵히 그를 배려해주었다.
“남편이 오후 6시에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고 난 뒤 전 도서관에 갔어요. 그럼 혼자서 아이를 돌보다 자정 무렵 저를 데리러 왔죠. 아침에도 출근 전까지는 집안일을 해주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늘 한결같아요. 제가 총장이 된 뒤에는 학교 일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도록 늘 집을 아무 걱정 없이 돌봐주고 있죠. 남편이 없었다면 이렇게 일에 매달릴 수 없었을 거예요.”
이들 부부는 76년 함께 귀국한 뒤 77년 둘째 아들 진호씨(29)를 낳았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두 아이들은 다 공부에 뜻을 두고 있다고. 고등학교까지 우리나라에서 마친 뒤 미국 대학에 진학했는데, 엄마를 닮은 큰딸은 지금 국제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고,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아들은 귀국해 육사 교수 요원으로 군복무 중이라고 한다.
이 총장이 자녀들을 키울 때 가장 신경 쓴 건 아무리 바빠도 아침만은 함께 먹는 것. 두 부부만 남은 지금도 그는 늘 직접 아침상을 차린다.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쌓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가족 모두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인지 자식들이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도 이 총장의 가족은 자주 전화로 대화를 나누며 살가운 관계를 유지한다고.
“저는 제자들이 결혼문제로 고민하면 결혼하고 아이도 낳으라고 권해요. 대신 사회활동을 지원해줄 수 있는 남편감을 찾으라고 하죠.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따뜻함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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