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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부부가 사는 법

친구처럼 애인처럼 날이 갈수록 사랑 깊어가는 양희은·조중문 부부

“18년 결혼생활하며 넘어야 할 고비 많았지만 시련과 고통 있었기에 사랑 더욱 커졌어요”

■ 글·장옥경 ■ 사진·조영철 기자

2004. 03. 04

매일 오전 9시,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통해 주부들과 소통하는 양희은. 인터뷰 안하기로 소문난 그가 남편 조중문씨와 함께 감춰두었던 지난 시간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다시 찾은 행복을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친구처럼 애인처럼 날이 갈수록 사랑 깊어가는 양희은·조중문 부부

주말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세수 안하고, 구멍 뚫린 내복만 입은 채 하루 종일 집안에서 뒹구는 일” 이라고 말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양희은(52). 지난 99년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 MC를 맡아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9시5분이면 생방송을 시작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SBS 휴먼스토리 ‘여자’의 내레이션을 녹음한다. 종종 ‘사랑의 리퀘스트’나 ‘열린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데 요즘은 4월에 있을 ‘양희은 33주년 기념 뮤지컬 콘서트’를 위해 노래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남들은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며 위기의식을 느끼는데 그는 여전히 청춘인 것 같다.
그 비결을 묻자 “고시생처럼 살았다”고 답한다. 방송에서 “양희은입니다” 하는 첫마디가 ‘쨍’하고 울려퍼지도록 하기 위해 어느 저녁 모임에 가든 일정한 시간이 되면 “나 간다!” 하고 주저없이 자리를 뜬다고. 남들이 뒤에서 뭐라 하건 상관없이 “내 길을 간다”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그의 오늘을 있게 했다.
사실 그의 삶은 여러 곳에서 어긋났었다.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고학을 하며 가장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고, ‘아침 이슬’ 같은 대표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30대 초반에는 암과 싸워야 했고, 그후에 심혈을 기울여 노래 ‘한계령’을 발표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산한 삶의 무게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묵묵히 견뎌낸 결과 지금은 이 땅의 여자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팍팍 긁어줄 만큼 넉넉한 도량을 갖게 됐다.
중년의 부부 대부분은 “아이 때문에 산다”고 하듯,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혈연 지상주의가 옹벽처럼 남아 있고, 자식은 옹벽을 지탱하는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기에 아이가 없는 이들 부부는 대체 무엇으로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중 하나예요. 아이 타령하다가 헤어지거나, 서로 아이 노릇 하며 사는 것이지요.”
“(아이가 없는 건) 선택한 게 아니라 종양이 있어 (자궁을) 떼어냈기 때문이에요. 단지 그뿐이에요. 우리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양희은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남편 조중문씨(55)가 설명을 덧붙이자 양희은이 고통스러웠던 오래 전 이야기를 어렵게 끄집어냈다.
“82년 여름에 첫번째 수술을 했어요. 당시 (자궁)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선생님께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배 긴 시간을 들였어요. 여성호르몬과 목소리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서 한쪽 난소만이라도 남겨놓으려고 애를 쓰셨던 거죠. 당시 제가 미혼이기도 했고요. 87년에 결혼해 89년에 두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선생님께서 무척 아쉬워하셨어요.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요.”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간 양희은은 결국 자궁을 드러내야 했다. 그렇다면 입양에 대해선 전혀 생각을 안해본 걸까? 두 사람은 없는 인연은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일이라 결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외국에서는 입양을 할 때 처음부터 입양 사실을 공개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공개 입양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뒤늦게 입양 사실이 밝혀져 가족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려다가 상처를 남기는 것보다는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게 살다 가자’는 것이 두 사람의 일치된 견해. 서로 아이 노릇을 해가며 경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양희은은 가끔씩 쓸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친구처럼 애인처럼 날이 갈수록 사랑 깊어가는 양희은·조중문 부부

팔씨름을 하는 두 사람. 서로 아이 노릇도 하고, 져주기도 하며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남편에겐 강아지와 아이를 쳐다보는 눈이 따로 있어요. 저에겐 보여준 적이 없는 얼굴이에요. 그럴 땐 ‘저렇게 좋아하는데…’ 하며 좀 쓸쓸해지죠. 하지만 특별히 미안한 마음은 없어요. 마누라가 병에 걸려 아이를 못 낳는 것은 이 사람의 팔자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양희은은 당당하다. 유난히 아이를 예뻐하고 귀여워하는 남편이 남의 아이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마음이야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죄책감이나 과잉의 희생 혹은 봉사의 필요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시어머니께서 가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가 아이를 못 낳아요’ 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비수처럼 꽂혀 굉장한 상처가 됐겠지요. 그런데 전 그럴 때 시어머니께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요. 참 자유롭고 좋아요’ 하고 말했어요. 사실이 그렇거든요. 남편하고 가끔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어떻게 키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는데 결론은 ‘아마 개판으로 키웠을 거야’ 하며 낄낄 웃는 거예요(웃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세상일에 대해서는 잔머리라도 굴리겠지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괜히 고민하며 피폐해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럴 땐 ‘탁’ 놓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은 그렇게 대범하게 해도 왜 상처가 없었겠는가. 그는 몇해 전 시어머니가 담석증 수술을 받았을 때 시어머니에게 “이제 어머니는 쓸개 빠진 사람이 되셨어요. 어머니가 쓸개를 떼어놓고 싶으셔서 뗀 게 아닌 것처럼 저 역시 원해서 수술을 받은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 이제 그런 말씀은 그만 하세요” 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냥 삭이기만 했으면 굉장히 서러웠을 텐데 그렇게 기회가 되는 대로 자연스럽게 표출하며 살았다고.

청바지에 통기타, 선머슴 같은 외모 속에 감춰진 애교와 싹싹함에 반해 3주 만에 프러포즈
양희은 조중문씨 부부는 87년 뉴욕의 한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만났다. 당시 조중문씨는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업가. 두 사람은 만난 지 3주만에 결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일전에 가수 조영남은 양희은을 가리켜 ‘무경우의 천적(天敵)’이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무경우가 발견되면 그녀는 즉시 독립투사형 훈육주임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싸워서라도 시시비비를 가린다. 그러나 후배들을 다독거릴 때는 천하에 싹싹 상냥 무쌍한 큰언니”라고 표현했다. 남편 조중문씨는 청바지에 통기타, 중성적인 목소리, 막대기처럼 무뚝뚝해 보이는 양희은의 속내에 가냘픔과 애교 있고 싹싹한 여성성이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습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집안의 6남매 중 막내아들로 자란 남편과 이북출신의 집안에서 여자라고 해도 자유롭게 끼를 분출하며 살아온 아내는 ‘적당히 입어 몸에 익숙해진 옷’처럼 편안한 관계로 정착하기까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같음을 확인하고 전기가 ‘찡’ 하고 통했다 하더라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양희은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남편에 대한 환상이 컸다고 한다. 무조건 덮어주고, 품어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친구처럼 애인처럼 날이 갈수록 사랑 깊어가는 양희은·조중문 부부

최근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건강이라고 한다.


“이 집은 6남매가 참 잘 뭉쳐요. 그런데 식구들이 모이면 밥상을 세번쯤 차리고 네번째나 돼서야 여자들 차례가 돌아와요. 제겐 그게 굉장히 생경했어요.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죠. 그래서 제가 눈치코치 없이 굴면 이 남자의 인상이 싹 바뀌는 거예요. 그러고는 말을 안해요. 난 이 남자가 왜 그러는지 통 알 수가 없어서 몇날 며칠 동안 말을 안하면 정말 환장할 것 같은 거예요.”
“전 제게 화가 나면 말을 안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나중에 집사람이 ‘말로 하자’고 요구했을 때 참 많이 당황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내 말이 옳더라고요. 말을 안하면 뭐가 잘못된 건지 상대방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어법을 빨리 통일하는 것이 부부가 같이 사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아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남편은 맨하튼에서 18명의 직원을 두고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집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2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가 밖에 나와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양희은은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며 남편의 가게에 들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집사람이 쉬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결혼과 동시에 집사람이 일에서 좀 풀려났으면 싶었어요. 일을 잊고 집에서 살림만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오히려 집사람에겐 그게 불만이더라고요.”
남편은 나름대로 아내를 배려해서 내린 최선의 결정이었는데 아내 입장에선 최선이 아니었던 모양이라며 멋쩍어했다.
“그렇다고 여행을 자주 갈 수 있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요. 미국 생활 7년 동안 남편과 여행한 곳은 ‘벚꽃을 보고 싶다’고 타령해 워싱턴에 한번 가본 것 하고, 필라델피아 여행이 전부였어요. 세상에 영화관에 가자는 소릴 한번 하나,엉엉 운 적도 있어요. 입이 튀어나오고, 투쟁을 해야 이 사람이 겨우 몸을 움직이니까요. 막상 영화관에 가도 이 남자는 숀 코넬리 포스터 앞에 서 있고, 저는 월트 디즈니 포스터 앞에 서 있어요. 취향이 다르면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나중에 만나면 될 텐데 이 남자는 제가 어떤 걸 보고 싶다고 하면 마지못해 ‘그러자’ 하고 따라와요. 전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 또 한마디하죠.”
순탄치 않은 이민 생활이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양희은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잘하는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 것.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그 시절에 작업한 곡으로 두고두고 애착이 가는 노래라고 한다. 두 사람은 93년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갑자기 쓰러져 몸 가누지 못하는 남편 보며 남모르게 많이 울었어요”
누구나 한세상 살면서 굽이굽이 힘든 시기가 있다. 이 부부 역시 그런 때가 있었다. 지난 97년 여름, 일주일에 닷새 이상 테니스를 즐길 만큼 건강했던 남편이 갑자기 몸을 못 쓰게 됐다. 병이 찾아오기 6개월 전부터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양 발바닥이 바늘로 쑤시듯 아픈 전조증상이 있었지만 운동이 과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갑자기 손목 통증이 심해져 티스푼 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가 됐다. 진단 결과 급성 다발성 류마티스성 관절염으로 나왔다. 자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생기는 질환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원인이나 뚜렷한 치료법이 없는 병이다.
암 치료 전문으로 유명한 한 병원에서 이 병을 고친다고 하기에 찾아가 약을 처방받고, 한입에 털어넣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약을 한달 동안 꾹 참고 먹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명이 생겼을 뿐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것은 다반사고 아주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데도 어기적거리고 너무 힘들어했어요. 밥숟가락을 들어올리면서도 진땀을 흘렸고, 승용차에 겨우 앉아 키를 꽂은 다음에도 손목이 아파서 키를 비틀지 못해 시동을 걸 수 없었어요. 혼자서 치약을 짜지 못해 제가 아침마다 칫솔에 치약을 짜놓아야 할 정도였어요.”



진통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통증 완화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데일 정도의 뜨거운 물에 통증부위를 담그는 것. 물이 뜨거워 살이 벌겋게 익을 정도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밤새도록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뺐다 반복하며 지옥 같은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양희은은 모든 일을 접고 남편 간호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그는 CBS 라디오 ‘양희은의 정보시대’와 SBS 라디오 ‘2시의 친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와 운전대를 잡고서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남편은 점점 어두워졌다. 남편의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던 양희은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남편과 동행했다. 그때마다 몸무게 70kg의 남편을 앉히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차력 쇼’를 불사할 정도로 힘겨웠지만 그는 남편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한계령을 넘는다’라는 제목의 장기 공연을 강행했는데 정말 그때 우리 부부는 인생의 한계령을 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아픈 남자가 공연장에 나타났어요. 아픈 몸을 이끌고 나타난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으앙’하고 울어버렸어요.”
다행히 이 부부는 은인을 만날 수 있었다. 백방으로 찾아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 절망의 터널에 갇힌 것처럼 암담해하던 이들에게 재미교포 의사인 김문호 박사가 나타난 것. 김박사는 벌의 독에서 추출한 생약으로 류머티스나 퇴행성관절염 등을 치료해 이미 교포사회에는 이름이 나 있었다. 남편은 고국에 잠시 다니러 온 김박사와 인연이 닿아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았고, 김박사가 출국한 뒤에는 그가 추천한 후배에게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차츰 걸을 수 있게 된 남편은 곧 혼자서 변기에 앉을 수도 있게 됐다. 그렇게 차도를 보이다 98년 여름 마침내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남편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인데 치료하러 집에 오셨을 때 밥 한끼 대접해드린 것밖에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요.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항상 빚으로 담아두고 있었는데 마침 그분이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통증클리닉(안아픈세상 www.thepaincenter.org)을 오픈하셨는데 남편은 매일 그곳에 나가 환자들을 돌보고 있어요. 아픈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주변을 돌아보니 의외로 남편과 같은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남편은 현재 김박사가 운영하는 통증클리닉에 매일같이 출근해 김박사와 환자들을 돕고 있다. 양희은도 일주일에 2번 정도는 병원을 방문해 통증관리를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부부가 함께 늙어가니 자연스럽게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 했다.
서로 아픔을 감싸고, 부축하며 오십 고개를 넘고 있는 두 사람. 친구처럼 애인처럼, 그리고 때론 자식처럼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보듬어주는 양희은 조중문 부부는 두 사람만으로 더 부족할 게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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