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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sexology

섹스의 공간들 296 PAGE.

2016. 11. 14

그동안 만난 여자들의 집은 그녀들의 삶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빛났고, 누군가는 어두웠으며, 누군가는 흠이 없었다.

남향집의 오후는 황홀하다. 금빛 노을은 창을 뚫고 내 안 깊숙이 들어온다. 밤이 찾아와도 노을이 남긴 상처는 깊어서 쉬이 아물지 않는다. 노을이 거실까지 들어오는 창이 넓은 집을 찾고 있다. 큰 창 앞에는 더블 침대를 둘 것이다. 섹스를 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으면 한다. 바라는 것은 그 정도다.


1

S의 집은 남향이었다. 작은 주방 겸 거실과 방 두 개가 있는 다세대주택의 3층이었다. 작은 방은 옷방이자 창고였고, 안방에는 컴퓨터 책상과 침대가 있었다. 우리는 가끔씩 옷방에서 섹스를 했다. S의 원피스 지퍼를 내려주다가, S가 겉옷을 벗고 속옷으로만 남겨졌을 때나, 거실에서 키스를 하다가 옷방으로 이어졌을 때 등. 작은 방에서의 섹스는 급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열정적이었다. S와 섹스를 하면서 작은 창문을 통해 동네의 풍경을 보았다. 오밀조밀하고 평화로운 동네의 모습.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더욱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안방에서의 일들이다. S와 오후. 노을이 핑크빛이거나 황금빛이거나 하는 날 우리는 안방의 침대에서 벌거벗고 누워 한가로이 가을을 즐겼다. 키스를 하다가 목덜미를 핥았고, 그렇게 가슴과 배로 또 등으로 입술을 옮겨 몸 구석구석을 핥았다.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적절한 배경음악을 고르기도 했다. 함께 앉아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 과일을 먹기도 했다. 그래도 됐다. 불안한 건 없었고, 황금빛으로 채워진 S의 안방은 에덴의 동산이었다. 우리의 맨몸도, 아무렇게나 자라버린 서로의 음모도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그건 자연스러웠고, 어느 순간은 섹슈얼하기도 했다. 그녀가 내 위에 앉았을 때, 태양은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S를 물들였다. 갈색 머리칼은 더 밝게 빛났고, 초점 잃은 눈과 어지러운 표정은 금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하얀 피부와 동그란 어깨, 얇은 쇄골, 살짝 처진 묵직한 가슴, 둥그런 골반 모두 금빛이었다. 아름다워. 금색의 S는 눈부시게 황홀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다시 자리를 바꿔, 내가 그녀 위에 올랐을 때도 그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땀 흘리는 내 모습이 아닌 노을이 빚은 내 색감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해가 마을 뒤로 사라지면서 노을은 더 진하고 날카롭게 침대 위에 내려앉았다. 누워 있는 그녀의 몸 반쪽이 황금색으로 갈렸다. 그림자 진 그녀의 얼굴 반쪽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황금빛 S의 몸만이 생각난다. 우리는 완전한 밤이 되자, 다시 한 번 섹스를 했다. 어둠 속에서의 섹스는 지난 꿈처럼 잊혔다.


2



Y는 달동네에 살았다. 사실 달동네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작은 언덕이었지만 Y는 그런 자신의 동네를 달동네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방에서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옆집 방범창만이 보였다. Y의 집은 반지하였다. 언덕 중간에 위치한 다세대주택의 넓은 반지하에는 방이 두 개였고, 거실 겸 주방이 있었다. 주방에는 냉장고와 조리대가 있지만 그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은 없었다. 요리를 한 것 같지만 흔적만 있을 뿐 실제로 만든 음식을 본 적은 없다. 냉장고 역시 오래된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목이 말라도 냉장고에 있는 생수는 마시지 않았다. 대신 안방에 있는 어제 마시다 남긴 듯한 생수를 마셨다. 거실의 장판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생뚱맞은 소파가 있었다. 앉지 않았고, 눕지도 않는 소파였다. 소파에는 Y가 지난주에 입었던 옷들과 가방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화장실의 창은 작았고, 마음만 먹으면 밖에서 화장실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Y는 화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타일 사이에는 곰팡이가, 거울 틀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Y의 집에서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Y가 사용하는 옷방에는 속옷들을 보관해두는 서랍장이 있었다. Y의 속옷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결코 속옷을 서랍에 보관하지 않았다. 서랍장 위에 쌓아두었다. 무슨 대단한 자극을 찾고자 속옷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Y의 옷방에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아니 나는 갈아입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안방은 넓었다. 더블 사이즈 침대와 책장, 책상, TV를 설치할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Y는 안방에서만 머물렀다. 안방에서 게임을 하고, 책을 읽고, 가끔 일을 했으며 주로 TV를 시청했다. Y는 안방의 일부였다. Y와 섹스를 할 때면 이 공간의 일부와 섹스를 한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녀가 수동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과감하고, 자유분방했지만 그런 점이 이 집과 닮아 있었다. 지금은 Y의 체취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때도 그녀의 냄새가 강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녀의 집이 가진 냄새가 강렬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섹스했다. 그녀의 더블 사이즈 침대는 다양한 체위를 화려하게 구사해도 무방할 정도로 넓었다. 방범창으로 단단히 무장한 옆집에서 Y의 안방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가끔 길고양이들의 실루엣이 창에 비쳤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그 긴장감을 즐겼던 것도 같다. 가끔씩 그녀는 참지 않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우리의 섹스는 거리낌이 없었다. 침대에서 Y의 살결은 언제나 촉촉했고, 미끄러웠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털이 많은 내게서는 땀 냄새가 체취와 섞여 더 진한 호르몬 냄새를 풍겼다. Y의 침대에서는 낮과 밤이 없었다. 조금 밝거나 조금 어두운 정도였다. 옆집과 골목 가로등의 불빛은 완전한 어둠을 지웠고, 옆 건물의 그림자로 눈부신 빛이란 있을 수 없었다. 우리가 흘린 땀 또한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벽지 뒤의 곰팡이로 새겨졌다. 섹스가 끝난 뒤 그 침대에 다시 눕고 싶지는 않았다. 눅눅한 침구의 먼지들이 살에 들러붙을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더라도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그리고 대자로 누운 Y를 바라봤었다. 섹스할 때의 Y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우리에겐 빛이 없었으니까. 욕실에서 씻고 돌아왔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백열등에 비친 Y와 Y의 검은 음부만 어렴풋하다. 지친 모습이었다.


3

H는 대학가의 원룸촌에 살았다. 잠들기 전에 옆방 커플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자야 하는 곳이었다. 벽이 얇기도 했지만 H의 방이 너무 고요하기도 했다. H는 별다른 조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밝은 형광등만 켰고, 그래서 방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구석구석이 명확했다. 물건들은 항상 제자리에 정방향으로 있었고, 침대의 침구는 정돈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그 흔한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H는 내가 오기 전에 늘 청소를 했다. 물론 내가 가지 않을 때에도 청소를 했다. 그녀의 방에서 옷을 벗기란 부담스러웠다. 아니 미안했다. 내가 흘린 터럭이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그녀의 공간을 망쳐놓는 것만 같았다. 모델하우스도 여기보다 깨끗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깨끗한 바닥에 앉아서 키스를 했다. 그리고 침대로 넘어갈지 말지를 정해야 했다. 그건 눈치 싸움이었다. 그녀가 침대로 가자고 말해야지 침대로 넘어갔다.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의중이 먼저였다. 솔직히 티끌 하나 없는 남의 공간에서 섹스를 하면서 내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내가 삽입을 하는 것보다 침구가 흩트려지는 걸 더 신경 쓸 것만 같았다. 이건 다른 종류의 부담감이었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정중해야 했고, 또 친절해야 했다. 나 역시 그런 쪽이 마음이 편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H는 열정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키스했고, 천천히 애무했다. 나는 그녀의 물건들처럼 정방향으로 누워 있어야 했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다뤘다. 조심해서 만지고, 핥았다. 그녀의 방식이 편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솔직해지려 하면 그녀는 입을 닫았다. 그런 얘기는 쑥스럽다고 했다. 물어보는 나도 부끄러운데…. H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곧 이 공간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였다. 규격별로 정리된 책이나, 차곡차곡 개어진 셔츠처럼. 그녀의 애무를 받으면서 생각하곤 했다. 이 원룸의 천장은 정사각형이 아니라 두 변이 비뚤어진 사각형이라고. 눈금으로 마주 보는 두 변이 평행한지를 재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사각형이 아니었다.

          
조진혁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에게 할애했다. 많이 차이고, 가끔 고백을 받았다.
체력은 줄어드는데 성욕이 증가하는 기묘한 현상을 겪고 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 칼럼에선 요즘 남자의 솔직한 연애와 섹스 후일담을 연재한다.

기획 여성동아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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