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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SEX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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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진혁| 일러스트 · 곤드리 | 디자인 · 김영화

2016. 03. 17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줄어들지 않는 빚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연애는 사치일지 모른다. 세상은 무겁고 피곤하며 우리는 욕망에 충실할 시간조차 없다.

“그래도 행복해?”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며,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말없이 운전했다. 그녀의 집은 멀었다. 강남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토요일 새벽이었고, 우리는 다시 화해했다.
금요일 밤이었다. 그녀가 재촉했다. 나도 빨리 퇴근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집중하려 노력했고,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모니터에 쓰이는 문장들은 형편없었다. 당장 넘겨야 할 원고였다. 그녀는 계속 카톡을 보냈다. 모니터에는 그녀의 짜증들이 깜빡이며 떠올랐고, 나는 집중하기 더 어려웠다. 그만해. 그만 좀 괴롭혀라. 키보드를 두들기며 혼자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중 여자친구는 악의 대마왕이었고. 그렇게 느끼자 확신이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최근 그녀는 의기소침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연애 초의 자신감이 사라졌다. 언제나 불평만 늘어놓는다. 안 될 거라고, 못 하겠다고 칭얼댄다. 그럴 때면 나는 카톡 창을 꺼놓는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를 맺고 싶지만, 이런 식이라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카톡을 ‘씹고’, 일에 열중했다. 결국 우리는 만나자마자 싸웠다. “헤어지기 싫어.” 그녀는 싸움의 끝을 그렇게 정리했다. 욕하고, 소리 지르던 모습은 사라지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봤다. 헤어지기 싫다는 말은 그녀의 용기였다. 나는 끝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용기에 맥없이 무너졌다. 사랑한다는 말로 우린 화해했다. 그녀가 먼저 나를 안았고, 나는 그녀의 마음에 답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일을 관두고,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해안 도로를 따라 조깅을 하고, 바다가 보이는 마당에서 드립 커피를 마시는 일상.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책을 읽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용기가 필요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등 돌릴 용기, 내게는 없었다. 서른이 넘자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지만 그때 즈음 부모님이 쓰러지셨다. 실비보험이 돈 걱정을 완전히 없애주는 것은 아니었다. 병원비는 비쌌다. 생활비도 더 들었고, 집에서 해야 할 일은 늘어났다. 그리고 부모님의 빚은 내 몫이 되었다. 월급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시간을 쪼개서 돈을 벌었다. 이달의 빚을 갚는 게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여자친구와 싸우기 시작한 것은. 여자친구는 내 상황을 안쓰러워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불쌍히 여겼다. 그녀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남자친구였고, 그녀를 우울에서 건져내는 건 내 의무였다. 그녀는 이번 주말도 바쁘냐고 물었고, 자존심 구겨가며 그런 질문을 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주말에 데이트 신청을 못 하는 남자친구가 되는 건, 정말… 죄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집중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남은 체력을 쥐어짰다. 화장실도 안 갔고, 사람들은 점심때만 만났다. 동창과 동문도, 선배나 후배들, 친구들마저. 그렇게 일하고 여자친구를 만나면 졸았다. 그녀와의 대화도, 영화를 보는 것도, 모텔에 가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모텔에서 일찍 잤다. TV를 보다가,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럴 때면 내 작은 방에서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잠드는 꿈을 꿨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런 나를 깨웠다. 너만 피곤하냐며 불평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사는 게 힘들어서 섹스도 못하겠다!

30대가 되자 여유가 사라졌다. 회사에서는 해야 할 업무량이 늘었고, 책임도 커졌다. 업무에 시간을 쏟아부을수록 살이 오르고, 체력이 약해졌다. 주말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주말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 코앞에 닥친 카드 대금을 갚아야 하니까. 이런 스케줄에서 연애까지 하는 것은 부담이었다. 일과 연애를 제대로 병행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관둘 수는 없고, 가능한 선택은 이별뿐이었다. 그럴 때 형들은 말했다. 결혼하면 된다고. 삶이 안정되면, 나아질 거라 위로했다. 하지만 모아둔 돈이 없었다. 빚은 아무리 갚아도 끝이 없었다. 부모님의 건강이 나아지셨으나, 내게는 새로운 빚들이 생겨났다. 혹은 이 빚을 다 갚는다 하여도, 집살 돈을 모으는 게 가능할까? 아니 서울에서 전세 아파트 하나는 구할 수 있을까? 혼자만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녀에게 더 용기를 내달라고 말했다. 꿈보다 현실을 택하라고. 그녀는 열정으로 일한다. 그래서 열정만큼만 돈을 받는다. 정규직도 아니다. 그렇다고 비정규직도 아니다. 미래는 없고, 집에서는 취업을 강요한다. 그녀는 매일 싸운다. 부모님과 세상과 매일마다. 당연히 그녀는 벌어둔 것도, 당분간 벌 가능성도 많지 않다. 나는 그녀에게 작은 회사라도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녀에게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게 또 다른 싸움의 화근이 됐다. 청년 취업난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녀에게 취업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매번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친구들처럼 그럴듯한 직장을 다니고 싶어했다. 어서 돈을 모아 나와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건 빚뿐이었다. 만일 내가 더 능력이 있었다면, 더 많은 시간이 있다면 또래보다 조금 더 많이 벌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이미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망상은 관두고, 현실을 직시하자면 확실한 방법은 절약이었다. 모텔비만 아껴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우리는 비용을 각자 부담했다. 정규직인 내가 주로 내지만, 그녀도 자주 계산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쉬웠다. 그래서 모텔비를 줄이기로 했다. 덜 만나고, 덜 먹기로 말이다. 그녀는 못 견뎠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기에 그녀는 너무 외롭다고 말했고, 내겐 심심하다고 들렸다. 나는 섹스보다 잠이 필요했다. 섹스는 즐겁지만 피곤했다. 아직 30대 초반인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성욕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습관처럼 한 번만 했다. 그게 다였다. 이벤트나 새로운 시도는 안 했다. 그녀도, 내게도 욕망에 충실할 시간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결혼을 해? 집을 보고 왔다는 친구를 만났다. 신부 쪽에서는 아파트 전세를 요구했다. 친구는 매주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일과가 되었지만, 여전히 마땅한 집은 보이질 않는다. 집에서 결혼 자금으로 1억원을 준단다. 그 돈을 밑천으로 대출금을 합해 아파트에 들어가겠다는데, 대출 이자를 계산하면 차라리 월세가 나아 보였다.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친구는 장모님 댁에서 신혼살림을 꾸렸었다. 빈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둘째를 낳고, 운 좋게 장기전세주택에 들어갔다. 역시 무리한 대출을 받았다. 우리 셋 모두 돈 벌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이 없는데, 연애를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럼 결혼은 현명한 걸까? 그녀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됐는데, 취업을 강요하는 건 옳은 걸까? 고민만 하다간 이 상태만 지속될 뿐이었다.
여자친구는 나를 보면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낡은 중고차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고속도로에서 그녀는 내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늘어놨다. 병아리처럼 종알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아파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우리 둘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녀 마음이 예뻐서 웃었다. 정말, 그거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조진혁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에게 할애했다. 많이 차이고, 가끔 고백을 받았다. 체력은 줄어드는데 성욕이 증가하는 기묘한 현상을 겪고 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 칼럼에선 요즘 남자의 솔직한 연애와 섹스 후일담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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