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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한 그녀

‘여자를 몰라’ 팜 파탈 채민서와 나눈 착한 이야기

글·김명희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 ■ 장소협찬·커피지인 ■ 의상&소품협찬·데무 디블루메 ■ 헤어·김선화(제니하우스 올리브점 02-512-1563) ■ 메이크업·오윤희(제니하우스 올리브점) ■ 스타일리스트·박난경

2011. 01. 18

드라마를 보노라면 실제 모습이 궁금해지는 배우가 있다. ‘여자를 몰라’의 악녀 채민서가 그렇다. 그런데 만나보니 극 중 캐릭터와 간극이 너무 커 당황스럽다. 20대의 마지막을 꾸밈없고 털털한 실제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데 쏟아부은 그와 마주 앉았다.

‘여자를 몰라’ 팜 파탈 채민서와 나눈 착한 이야기


#1 민소희 계보 잇는 악녀의 탄생
채민서(30)는 SBS 아침드라마 ‘여자를 몰라’로 200% 목표 달성을 했다. 2010년 7월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계란을 맞을 정도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는데 얼마 전 목욕탕에 갔다가 그보다 더한 곤욕을 치른 것이다.
“할머니 한 분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눈 뜨고 제일 먼저 보는 게 아침드라마인데 그런 못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란 말이냐,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느냐’며 화를 내시더라고요. ‘할머니 그건 드라마일 뿐이고 실제 제 모습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제가 등 밀어드릴게요’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화를 내곤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더라고요(웃음).”
채민서는 ‘여자를 몰라’에서 유부남을 꼬여내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안방을 차지하고 온갖 악행을 일삼는 오유란 역을 맡아 지난 6개월간 대한민국 주부들의 ‘공공의 적’으로 살았다. 다른 배우들은 식당에 가면 주인이 얼굴을 알아보고 반찬 더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는데, 그는 ‘계란말이라도 덤으로 얻어먹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모자도 안 쓰고 식당에 갔다가 눈총만 받으며 나와야 했다. 드라마가 끝나면 그런 미움은 안 받아도 되니 후련하기도 하련만, 12월 중순 드라마 종영을 앞두고 만난 채민서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초반에 찍었던 장면을 보면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란 생각이 들어요. 일일드라마가 처음이라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거든요. 이왕 욕먹을 거, 더 못되게 굴걸 하는 후회도 되고(웃음).”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그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크랭크인하기 전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를 잡는데 드라마는 그때그때 대본이 나오고 몇 줄 안 되는 대사에도 감정 변화의 폭이 크다. 특히 오유란은 앞뒤 안 재는 급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 울다가 웃다가 악쓰는 장면을 한 컷에 모두 담아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채민서는 처음엔 감정의 기복을 따라가지 못해 NG를 많이 내고 선배들한테 미안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여자를 몰라’ 팜 파탈 채민서와 나눈 착한 이야기


“민정이(김지호)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나 임신했으니까 이혼해줘’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 이혼했으니까 임신해 줘’라고 말이 헛나오고 말았어요. 그 자리에선 다 같이 웃고 넘겼지만 베테랑 선배님들이 보시기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래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잘할 때까지 기다려주셨어요. 특히 극 중 시어머니로 나오는 임예진 선배는 따로 불러 대사도 맞춰주시고, 먹을 것도 챙겨주시고,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며 용기를 주셨어요. 사람은 착한 면이 80%라면, 그렇지 않은 면이 20%는 되는 것 같은데 저한테 임예진 선배는 100% 좋은 분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오유란의 악한 면에 실제 채민서를 오버랩시킨다. 사람 잘 믿고, 눈물 많아 ‘맹순이’라고 불리는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시부모에게 대드는 장면을 찍으면서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까’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오유란엔 그의 실제 성격이 녹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PD님이 오유란 역을 맡기면서 ‘아내의 유혹’에서 장서희가 연기했던 민소희를 롤 모델로 삼아보라고 하셨어요. 사실 그렇게 하면 중간은 가겠지만, 따라쟁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볼 테니 믿고 맡겨달라 하고는 제 속에 있는 여러 면 중에서 오유란이라는 인물에 맞는 성격을 끄집어냈어요. 그렇게 해서 불같은 성격의 오유란이라는 인물이 나왔죠. 어떤 연기자는 캐릭터에 자신을 맞춘다는데, 빙의도 아니고 그건 너무 어려워요. 제가 갖고 있는 여러 면 중에서 캐릭터와 비슷한 면을 찾아내는 게 제겐 더 맞는 것 같아요.”

#2 니들이 눈물 젖은 라면 맛을 아니?



‘여자를 몰라’ 팜 파탈 채민서와 나눈 착한 이야기

채민서의 얼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데뷔 초 청순한 역을 맡았던 그가 악녀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치른 이유이기도 하다.



채민서는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영화 ‘챔피언’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가 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의 반은 자는 딸을 업고 연기 학원을 드나들었던 엄마의 몫이다. 하지만 막상 연기와 인연을 맺은 후에는 남들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쉽게도 올라가는 길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힘겹게 느껴져 좌절하기도 했다. ‘돈텔파파’는 그의 출연 장면 중 상당 부분이 심의에서 삭제됐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찍은 대작 영화 ‘망국의 이지스’는 근거 없는 정보 때문에 극우 영화로 먼저 알려져 흥행에 참패했다. ‘채식주의자’와 ‘가발’은 흥행 여부와는 별도로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각각 8kg을 감량하고 삭발을 하는 등 고생을 한 작품이다. ‘채식주의자’에선 형부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을 모르고 극장에 갔던 그의 엄마는 영화를 보다가 밖으로 나가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엄마는 ‘우리 딸, 배우니까 그런 것 정도는 괜찮아’라며 그를 위로했지만 딸로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챔피언’ 오디션에 합격해 남들보다 쉽게 연기를 시작한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망국의 이지스’를 찍을 때는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수중 촬영을 하기 위해 몸에 피아노 줄을 묶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스크루에 휩쓸리는 바람에 스태프가 저를 놓쳤어요. 물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코로 물이 들어오고, 이젠 죽었구나 싶었어요. 엄마 아빠 얼굴과 함께 그간의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눈물이 나오고… 그다음엔 기억이 없어요. 누가 막 흔들어 깨워서 일어났는데 5분 정도 의식을 잃었다고 하더라고요.”
또 한때는 매니저 없이 혼자 방송국과 제작사를 다니며 프로필을 돌린 적도 있다. 라면 살 돈이 없어 쫄쫄 굶으면서도 씩씩하게 “신인배우 채민서입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그나마 아직 한 작품에도 출연하지 못한 연기 지망생도 많은데 그들에 비하면 나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 무렵 채민서는 TV에서 연예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바꾸고, 시상식에서 여배우들이 화려한 드레스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 모습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장면을 보면 스타일리스트에게 ‘저 배우 드레스 예쁘네. 다음 시상식엔 나도 저런 것 한번 입어보자’며 농담을 건넨다.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제가 불교 신자인데 한번은 스님께서 ‘한 신도가 3천 배를 하고 돌아서는데 개가 신발을 물어가더라.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는데, 그 순간 어떻게 됐겠느냐. 3천 배를 드리면서 쌓은 공덕이 모두 날아갔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최선을 다했으면 그 마음을 계속 가져가야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자신에게 화가 돌아온다는 걸 우회적으로 깨우쳐 주신 거죠. 원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지만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해요. 최민식 선배나 송강호 선배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때는 과거에 했던 모든 일들도 함께 빛을 보게 되겠죠?(웃음)”

#3 거울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 ‘넌 누구니?’

‘여자를 몰라’ 팜 파탈 채민서와 나눈 착한 이야기


“민서씨는 얼굴에 선 하나만 달리 그려도 이미지가 180도 달라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언젠가 채민서에게 건넨 말이다. 처음에는 무심결에 넘겼는데 연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 자기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고 한다. 오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그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긴 해요. 제 나름대로 캐릭터를 100% 분석했다고 생각하고 촬영장에 나갔는데 감독이나 선배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면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구본 위를 뱅뱅 돌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것, 그게 연기의 매력이기도 해요. 끝이 금방 보이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는 누구보다 연기를 좋아하고 배우라는 직업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집에 돌아와 청소하고 샤워를 마친 후 상쾌한 기분으로 대본을 읽을 때라고 한다. 친구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연예인은 아니다. 가끔 외롭기도 한데 그럴 땐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를 몰라’ 촬영을 시작하기 전 김호진 선배가 배우와 스태프를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초대해주셨어요. 멋진 요리를 대접하며 ‘우리 지호 잘 부탁합니다’라고 인사하는데 굉장히 부럽더라고요. 두 분 눈에서 하트가 반짝반짝하는데, 김지호 선배가 나날이 예뻐지는 비결을 알겠더군요(웃음). 저도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예쁜 아이도 낳고 싶어요. 결혼이 어려우면 아이만이라도(웃음).”
그가 백지처럼 웃는다. 연기 경력 10년째면 좀 노련해지기도 하련만, ‘맹순이’란 별명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의 인생 모토는 ‘나는 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갈 준비가 돼 있다. 그의 꿈은 단시간에 승부가 결판나는 단거리가 아닌, 오랜 시간 끈기 있게 달리는 마라톤 선수 같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20대의 마지막 작품인 ‘여자를 몰라’의 오유란은 그 긴 여정의 터닝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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