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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KALEIDOSCOPE

선수들, 프린트로 한판 붙다

Print Matters

글 · 조엘 킴벡 | 사진 · REX 제공 | 디자인 · 최정미

2016. 03. 10

뉴욕의 날씨는 아직 추위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패션의 세계에선 이미 봄이 한창이다. 백화점 매장들은 두툼한 겨울 상품들을 정리해 아웃렛 매장으로 보내고, 화사한 컬러와 화려한 패턴에 소재까지 가벼움이 느껴지는 아이템들로 소비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그들의 지갑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이번 봄 시즌에는 프린트를 전면에 내세운 아이템들이 상당히 눈에 띈다.
패션에서 프린트라고 하면 흔히 명품 브랜드의 로고 패턴을 떠올리지만, 로고 패턴과 프린트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프린트는 드레스나 셔츠 혹은 스카프 등에 날염된 무늬를 말하는데, 쉬운 예로 에르메스 스카프 위에 펼쳐진 클래식한 마구 문양이나 베르사체 실크 드레스를 가득 채운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 문양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실 패션 업체들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식들을 사용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고와 로고를 베이스로 한 패턴 그리고 브랜드만의 특유 문양이나 특성을 담은 프린트다.
위에서 언급한 에르메스나 베르사체의 프린트는 사람들이 한눈에 그 브랜드의 아이템이라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하지만 모든 브랜드가 ‘시그니처 프린트’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확고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프린트는 큰 자산임이 분명하지만, 남발하다 보면 신선함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브랜드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는 프린트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시즌별로 적절히 사용하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전통 있는 유럽의 패션 하우스들이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프린트에 매 시즌 감도 높은 변화를 더해가며 이를 전개하는 예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젊고 역량 있는 디자이너들이 자신만의 프린트를 개발해 컬렉션에 적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은 데뷔 당시부터 자신만의 세계관이 확연히 드러나는 ‘갤럭시’ 프린트로 패셔니스타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런 프린트를 기반으로 한 컬렉션의 전개는 패션 업계에서 케인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고, 베르사체 디퓨전 브랜드의 하나인 베르수스와의 콜래보레이션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크리스토퍼 케인은 구찌의 모그룹인 케링에 편입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패션 하우스 구찌는 최근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책임 디자이너로 새롭게 발탁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브랜드로 탈바꿈 중인데, 그 중심에는 미켈레의 세계관을 한껏 보여주는 다양한 프린트가 존재한다. 특히 다소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오래된 시골집에나 붙어 있는 꽃무늬 벽지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프린트들이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또 하나의 영국발 브랜드인 에르뎀 역시, 프린트를 전면에 내세워 전 세계 패션 셀렉트 숍과 백화점의 바이어들로부터 큰 찬사를 이끌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자랐고, 터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특유의 프린트들을 선보인 그는 패션 피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여배우 니콜 키드먼, 엠마 왓슨을 비롯해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에 이르기까지 두꺼운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프린트에 관한 한 베트멍도 주목할 만한 브랜드. 베트멍은 가수이자 패셔니스타인 리한나가 입은 거대한 항공 점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일약 잇 브랜드로 떠올랐다. 남자가 입어도 헐렁할 정도의 오버사이즈 디자인이 주특기인 줄로만 알았던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가 이번 시즌에는 극도로 여성스러운 꽃 프린트를 소개해 전 세계 패션 바이어들의 러브 콜을 받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근의 프린트 붐 최고의 수혜자는 바로 발렌티노가 아닐까. 매 시즌 특유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프린트들을 전 라인에 적용하며 패셔니스타들을 열광케 하고 있는 발렌티노는, 남성복에서는 절대 불패이지만 여성복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카무플라주 프린트를 과감하게 변형시켜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꽃무늬, 나비 무늬에 이어 한복의 색동 무늬와 비슷한 프린트까지 등장시켜 3연속 홈런을 쳤다. 이번 시즌에는 아프리카의 부족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국적 프린트들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그 외에도 여성스럽고 섬세한 프린트가 강점인 프린이나 H&M과의 콜래보레이션을 전개했을 만큼 강렬하고 대담한 색채의 프린트를 내세우는 매튜 윌리엄슨, 이미 자신만의 시그니처 프린트를 구축한 가방 브랜드 이스트팩과 공동 브랜드까지 론칭한 디자이너 듀오 엘리와 미시모토의 엘리 키시모토 또한 프린트의 마술사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프린트가 유럽 브랜드의 전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뉴욕에서도 “프린트 하면 내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디자이너가 있는데, 바로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그 주인공.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하면 가운처럼 몸을 휘감아 묶는 ‘래핑 드레스’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그 래핑 드레스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특유의 프린트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래핑 드레스 외에도 그녀의 컬렉션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의상들에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장기인 기하하적인 문양이나 식물 또는 동물에서 영감을 얻은 여러 버전의 프린트들이 매 시즌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2008년부터 뉴욕 패션 위크에 등장한 수노 역시 프린트로 주목받는 브랜드다. 케냐의 빈티지 직물을 직접 사용하거나 혹은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 제작하는 프린트들은 여태껏 흔히 접하지 못했던 아프리카의 감성을 담고 있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 주 태생의 두 친구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씨(Sea)라는 브랜드 또한 인상적인 프린트로 백화점의 러브 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노의 이국적인 느낌과는 달리 씨는 전형적인 미국 동부의 클래식함을 소녀적 감성으로 빈티지스럽게 풀어낸 프린트로 팬층을 두껍게 쌓고 있는 중이다.
이외에도 많은 브랜드가 컬렉션을 통해 다양한 프린트를 선보이며 자신들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가기도 하고,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일면을 제시하기도 한다. 프린트야말로 디자이너의 또 하나의 디자인이자 구매를 불러일으키는 숨은 병기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한국의 디자이너 이신우가 고구려 벽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프린트로 파리 컬렉션(1994)에서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앞으로의 한국 디자이너들도 디자인과 소재 개발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눈에 인지할 수 있는 독자적인 프린트를 개발해나가는 데 신경을 쓴다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자, 그럼 올해는 어떤 프린트의 아이템으로 화사한 봄날을 만끽해볼는지.






Joel Kimbeck
뉴욕에서 활동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줄리아 로버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현재 ‘pertwo’를 이끌며 패션 광고를 만들고 있다. ‘레드 카펫’을 번역하고 ‘패션 뮤즈’를 펴냈으며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칼럼을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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