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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literature_travel

한승원의 <야만과 신화> 그리고 전남 장흥

숱한 신화를 캐어 올린 바다와 포구로 떠나는 여행

editor 남기환 여행작가

2017. 05. 17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한 문학가의 중편과 단편 작품들을 알뜰하게 채워놓은 한 권의 결과물이 소장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그 자체로 기념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등단 50주년을 맞이하는 거장 한승원이 손수 뽑은 자신의 중·단편 13편을 담은 작품집 <야만과 신화>를 손에 든 순간이 그랬다. 그 한 권에 가득 담긴 치열한 삶의 순간들과 그를 표현하는 언어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졌다

지난해 한국 문단 최고의 사건은 누가 뭐래도 작가 한강이 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일이다. 때를 맞춰 작가 한강과 지난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등이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작가와 함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이가 있었다. 작가 한강의 부친이자 한국 문학의 거장이란 수식어가 자연스러운 작가 한승원이다. 1968년 신춘문예에 단편 ‘목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으니 50년 세월을 꼬박 작가로 살아온 그다.

우리 땅,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채워간 50년


한 인간의 삶으로만 따져도 결코 간단치 않은 50년의 세월인데, 그 시간만큼 소설을 써왔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비롯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학상을 그에게 수여한 건 그에 대한 존경을 대신하는 것일지 모른다. 작가 한승원의 50년을 말해주는 진정한 징표는 누가 뭐래도 그가 써 내려간 숱한 소설들이다. 그 소설들은 1960년대 말을 살았던 그 시절의 청춘과 지식인부터 2017년의 독자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아왔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문학가의 꿈을 키웠던 이들이 문단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로 성장해 있는 일이 비일비재할 만큼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우리 문단의 자양분이자 작가의 산실이라고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렇게 긴 세월 써 내려온 많은 소설들 가운데 중·단편 13편을 모아 담은 의 발간은 서점가의 큰 관심을 모았다. 작품 수가 워낙 방대하고 작가로 활동한 시간의 궤적이 넓다 보니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다 구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만큼 훌륭한 소장 가치를 지닌 선물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작가가 요즘 표현으로 ‘인생 소설’이라 할 것들로만 손수 골랐기에 더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한승원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라도 접해봤고, 그래서 그의 싱싱한 날것 느낌의 야생적인 글에 이끌렸던 이들이라면 이 작품집을 선택한 걸 후회할 리 만무하다. 그의 등단작인 ‘목선’(1968)을 시작으로 ‘어머니’(1974), ‘폐촌’(1976), ‘낙지 같은 여자’(1977), ‘해신의 늪’(1977), ‘해변의 길손’(1987) 등으로 이어져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2001)로 맺는 13편의 이야기들이 그 작품명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 어느 한 편 쉬 책장을 넘길 만한 작품이 있을까 싶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과 감동의 기억을 버무려 다시 고르자면 이들 가운데서도 ‘폐촌’과 ‘낙지 같은 여자’ ‘해변의 길손’ 만큼은 절대 빼놓지 않을 듯하다. 작품을 읽는 동안 어디선가 더운 입김이 훅 하고 불어올 것만 같은 미륵례와 밴강쉬의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삶, 그리고 가상의 공간 하룻머릿골이라는 폐촌을 배경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은유했던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맛보며 읽어 내려갔던 작품 ‘폐촌’. 평론가 김형중이 “신화적 모티프들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과 결합해서 이후 한승원의 문학이 역사를 외면하지 않은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한 이 ‘폐촌’은 ‘한국’의 ‘현대사’라는 시간과 공간을 한데 압축해놓은 마을을 설정해 읽어가는 흥미를 더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낙지 같은 여자’는 좀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작품이다. 30여 년 전, 중학생이었던 당시 고향집 서가에 꽂혀 있던 문학 전집에서 한승원 편을 우연히 꺼내 읽게 되었는데, 그 첫 소설이 하필이면(?) ‘낙지 같은 여자’ 였다.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여인의 삶에서, 그리고 원시적 본능에 이끌린 주인공의 욕망을 읽어 내려가며 심장이 뛰었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하필이면’이라는 표현을 물리지 않아도 될 만큼 한승원의 여러 작품 중 가장 강렬한 것 하나를 골랐던 셈이다.

‘해변의 길손’은 역사성을 더 돋아내면서 은유보다는 사람과 공동체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정한 공간을 두고 인간의 역사와 우리의 현대사가 어떻게 오버랩되는지를 말하는 소설은 그 자체로 기시감이 크지만, 여기에 한승원이 설정한 공간의 매력, 인간과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묘사, 특유의 문체 등이 더해지면 독자들은 더없이 깊은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한승원의 소설을 면밀히 읽어왔던 열혈 독자라면 당연히 알아차리겠지만) 이 작품들을 비롯한 중단편집에 소개된 소설들은 몇 가지 일관성을 뚜렷하게 보인다. 우선 평론가 김형중의 말을 또 한 번 빌리자면, “우리네 땅과 역사에서 신화적 요소를 찾아내어 탁월한 상징성을 띤 이야기들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 바다가 등장하고, 포구와 마을이 이어진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하고 징한 남도의 사투리 한 사발을 걸쭉하게 내놓는다. 그리고 그 일관성을 관통하는 말이자 날것 같은 토속의 정서와 욕망, 삶에서 역사와 신화를 캐 냈던 작가의 창작 시원(始原)은 바로 그의 고향 전라남도 장흥이다.

문학 여행, 장흥으로 떠난 가장 바람직한 이유
서울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직선을 그었을 때 만나는 해변을 정동진이라고 한다면 그 선을 남쪽으로 곧게 늘어뜨렸을 때 닿는 땅의 끝에는 장흥이 자리하고 있다. 육지를 향해 깊숙한 발자국을 쑥 남기듯 넉넉하게 들어앉은 득량만을 두고, 등으로는 보관(寶冠)을 머리에 인 듯하다고 불리는 천관산을 두른 곳이 장흥이다. 장흥을 여행하는 동안 바다와 산을 고루 만나는 사이, 그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무채색인 듯하나 맑고 넉넉한 느낌에 서서히 젖어 들어갈지 모른다.

그런 풍경 속에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많은 문학가들을 키운 곳이 장흥이기도 하다. 한승원도 이곳에서 나고 성장했으며, 지금은 귀향해 안양면 율산마을에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 겸 후학 양성의 공간을 꾸려가고 있는가 하면, ‘축제’와 ‘서편제’ 등 역시나 남도의 정서가 뚝뚝 흘러내리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고 이청준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흥이 자랑하는 문학인의 면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동문학가 김녹촌과 소설가 송기숙, 이승우, 이대흠, 김영남 등을 비롯한 많은 문학가들이 이곳 장흥에서 나고 자랐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등단한 작가만 1백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수나 우리 문단에서의 영향력을 장흥의 규모로만 따지면 쉬 이해하기 힘들 만큼 압도적이다. 장흥을 두고 문학의 산실이라거나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 여행지라고 치켜세우는 건 결코 넘치는 일이 아닐 듯하다. 그 문학가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장흥이 두른 바다와 그 속에서 강인하게 삶을 이어왔던 사람들이 문학적 영감의 샘이라고 말한다. 만약 장흥을 처음 여행하게 된다면 이 땅에 발을 들인 후 얼마 못 가 그 말에 감성적 동의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흥 여행의 여정은 장흥 문학가들의 흔적과 그들의 작품이 남아 있는 곳들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사실 문학 여행지가 이토록 곳곳에 흘러넘치는 듯한 곳은 장흥이 아니고서는 드물다. 특히나 오늘 장흥 여행을 부추긴 작가 한승원은 그의 소설 대부분이 장흥의 바다와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와 닿는 포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많은 ‘문학 여행지’가 산재해 있을지는 쉬 짐작할 수 있다.

장흥 문학 여행의 대표적인 방문지는 회진면 일대다. 우선 신상리는 한승원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로, 슬레이트 지붕을 소박하게 얹은 생가가 어촌 마을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39년 이곳에서 태어난 한승원에게 신상리 마을과 그 바다는 문학의 뿌리 그 자체였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길은 생가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나와 바닷가 방향의 작은 언덕을 넘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앞메잔등’이라 불렸다는 이 언덕은 ‘폐촌’의 주요 무대이고, 그 언덕을 넘어 나타나는 ‘넓바우포구’는 한승원의 소설이 잉태된 산실 그 자체였다. ‘갈매기’ ‘폐촌’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낙지 같은 여자’ ‘해변의 길손’ 등 걸작들이 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한승원은 이 포구에서 목선을 타고 김 걷는 일을 하러 다녔다고 알려진다.

이곳 회진면은 장흥 문학 여행의 중심점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한승원의 흔적만이 아닌, 이청준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억지로 조성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벽한 문학 테마 마을이 된 셈이다. 회진면 진목리(혹은 진목마을이나 진목포구로도 불린다)에는 이청준의 생가가 소박한 모습 그대로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생의 생가는 좁은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섣불리 차를 몰고 그 담길을 들어갔다가는 오도 가도 못하게 갇혀버릴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의 마을이다. 작은 마당과 단출하기 그지없는 집. 선생의 생가는 굳이 더 단장하지도 않고 일부러 ‘박물관’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그저 대청마루에 잠시 앉아 선생의 흔적을 들여다보고, 장독대에 핀 꽃 몇 송이 바라보고, 또 가랑비가 내리면 처마 끝에 물 달리는 모습도 보며 그의 작품 몇 줄 읽어 내려가기 딱 좋은 곳이다. 1979년 마을 아래에 정착해 집필을 계속한 이청준은 2008년 7월 31일 세상을 떠났고, 마을 언덕배기에서 영면하고 있다.

진목마을은 굳이 문학 여행이 아니라 해도 그 지형부터가 예사롭지 않아 한참이나 마을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며 머물게 한다. 도로에서 가파른 사면을 따라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집들이 원색의 지붕을 이어가고 있는 덕분에 바다와 산 사이에서 매혹적인 색감을 완성하고 있다. 누군가 ‘장흥 산토리니’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는데 그보다는 더 우아하고 묵직한 느낌에 가깝다. 아마 회진의 바다가 주는 무채색의 배경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진목마을에서 빠져나와 서쪽 포구로 가서 이르는 선학동은 이청준의 연작(‘서편제’도 그 연작에 속한다) 중 하나인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자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1백 번째 영화 의 실제 촬영 무대다. 회진포구를 멀찍이 감싼 산세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오르는 듯해 선학동이라 불리는 이 일대는 봄이면 유채가 만발해 ‘남도스러운’ 풍경을 하나 더한다. 포구 가까이 가면 촬영 당시 사용했던 주막 세트가 남아 있다. 벌써 세월이 꽤 흐르다 보니 낡고 쇠락했지만, 몽환적인 듯하면서도 투박한 질감이 살아나는 양철 지붕의 건물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산과 바다,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깊이와 정감



문학 여행만으로도 마음이 꽉꽉 차오르는 듯한데 장흥은 여기서 그만두지 말라고, 더 마음을 뒤흔들 곳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부추긴다. 포구와 바다, 마을은 넉넉히 봤으니 이제 장흥의 뒷배를 책임지는 명산, 천관산을 볼 차례다. 해발 723m의 천관산은 호남의 5대 명산이자 머리에 아름다운 장식을 단 보관을 얹은 듯하다는 이름처럼 기암괴석이 솟아 신비로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정상인 연대봉에서 바다를 향했을 때 마주하는 장관 또한 그만이다. 겹겹이 늘어선 섬들이 마치 바다에서 솟아 굽이치듯 넘실대 넘어온다. 맑고 깊은 계곡인 장천재는 천관산행의 시작과 끝에서 만나는 청량제와 같다.

편백나무 특유의 향이 숲 전체에서 뿜어져 나와 온몸이 맑게 깨어나는 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좋다.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봄이면 코끝이 알싸해지는 편백나무의 향이 숲 전체에 피어오른다. 억불산 기슭에 최소 40년생이 넘는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빼곡한 숲을 이룬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편백나무의 피톤치드로 심신을 치유하고 생태주택을 체험하는 인공림으로 유명하다.

장흥을 마주 안은 득량만을 따라가는 바다 여행도 이어진다. 너른 해안과 고운 모래, 얇은 유리판을 깔아 놓은 듯 잔잔하고 완만한 바다가 넉넉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완성한 수문해수욕장과 여러 크고 작은 해변이 장흥 여행의 낭만을 더해주고, 광화문 정남방의 한 지점에 세워진 전망대는 이곳이 땅의 남쪽 끝이 아닌 바다의 시작점임을 알려주듯 시원한 풍경을 선사한다. 해안에서 부교를 놓아 바다 위에 조성한 인공 낚시터인 정남진 해양낚시공원은 장흥의 바다를 만나는 재미있는 방법이다. 멀리 배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바다낚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고, 여기에 더해 바다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이글루형 펜션에 머물면 은근한 짜릿함마저 맛볼 수 있다.

먼 길이기도 해서 더욱 그렇겠지만 장흥을 알면 알수록 하루이틀 정도에 여행을 마치기가 얼마나 아쉬운지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오늘 이 여행에 함께한 책 를 펼쳐보며 그 문학적 영감이 비롯된 바다와 파도와 바람과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고 책장 한 장 한 장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묘하게도 장흥은 사람을 붙잡아 주저앉히는 마력 같은 게 느껴지는 곳이다. 머무르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하는 여행자에게는 아주 고약하게 매력 있는 그런 여행지다.  


Travel Information

장흥 여행 정보
http://travel.jangheung.go.kr

장흥의 볼거리 & 진미
정남진 장흥토요시장 정기 5일장(2일, 7일)이자 주말 관광 시장으로 조성된 장흥의 전통 시장이다. 장흥 한우와 표고버섯 등의 특산물이 풍성한 장터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주말마다 다채로운 공연이 열린다.

장흥 삼합  “장흥 인구보다 한우가 더 많다”는 고장에 왔으니 한우 구이를 놓치면 서운하다. 한우를 부담 없는 가격에 사서 키조개 관자, 표고버섯 등과 함께 돌판에 구운 뒤 한 번에 그 쫀득한 식감의 조화를 즐기는 장흥 삼합이 그만이다. 정남진 장흥 토요시장 내 많은 식당에서 이 장흥 삼합을 먹을 수 있다.

기획 여성동아 사진 남기환 디자인 박경옥 취재협조 장흥군청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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