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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발끝으로도 시각장애를 연기하는 그녀 천우희

editor 김지영 기자

2017. 05. 04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던 소녀가 이제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인정받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했다. 단역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천우희의 연기를 대하는 자세.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무섭게 성장하는 여배우로 천우희(30)를 첫손에 꼽는 이가 많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그녀에겐 작은 체구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능력이 있다.

2004년 영화  〈신부수업〉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녀는 이후 여러 작품에서 이를 증명했다. 2011년 ‘본드녀’ 상미로 잠깐 출연한 〈써니〉에서는 소름 돋는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2014년에는 집단 성폭행의 피해 학생을 그린 저예산 독립 영화 〈한공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를 비롯한 수많은 상을 휩쓸며 최고의 해를 보냈다. 또한 지난해 4월과 5월 연달아 개봉한〈해어화〉와 〈곡성〉에서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4월 5일 개봉한 이윤기 감독의 〈어느날〉도 천우희의 ‘미친 연기력’을 기대한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영화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날〉은 아내가 죽은 뒤 희망 없이 살아가던 남자 강수(김남길)가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시각장애인 미소(천우희)의 영혼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미소는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픈 상처가 있지만 늘 해맑게 웃고 다니는 밝은 캐릭터다.

▼다른 작품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해맑게 웃는 모습이 많이 나오더군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소녀 천우희는 어떤 아이였을지 궁금했어요.
어릴 때는 사람들 앞에 나서 낭독하는 걸 무척 두려워했어요. 얼굴이 금세 빨개졌거든요. 그러면서도 장기 자랑 대회에는 정말 열심히 나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매 학년 반장, 부반장을 하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냈고요. 그 덕분에 초등학교 때는 전교회장, 중학교 때는 전교부회장으로 뽑히기도 했죠. 쑥스러움을 많이 탔지만 내성적인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민망하면 얼굴이 빨개지곤 하는데,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제가 연기자가 된 걸 신기해해요.

▼처음에는 이 영화의 출연 제의를 고사했다고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는 여주인공 캐릭터가 기존 판타지 작품에서 보던 이미지여서 상투적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가 됐어요. 그런데 감독님을 만나고 나니 감독님 스타일대로 표현될 거라는 믿음이 생겨 출연을 결정했어요. 감독님의 결대로 영화가 잘 나온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 연기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시각장애인으로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흉내만 낸다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어요. 시각장애인의 행동 패턴을 연습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요. 작품 준비를 할 때부터 시각 장애 연기에 도움을 주신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제 안에 편견이 많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회에 가서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도 경험해봤는데 제가 상상했던 느낌과 또 다르더라고요. 그 느낌들을 마음에 깔고 연기했어요. 특히 엄마와 미용실에서 만나는 장면을 찍을 때는 초집중해서 촬영해 인생 연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영화엔 발만 나오더라고요(웃음).



▼시각장애인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있었나요.
연기를 도와주신 선생님이 두 분이세요. 한 분은 시각장애인이고 다른 분은 보호자셨어요. 두 분을 처음 만난 날부터 제게 편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예상과 달리) 시각장애인 선생님이 너무도 예쁘게 치장을 하고 나타나셨어요. 하이힐도 신고요. 얘기를 나눠보니 좋아하는 것도, 지금 하는 고민도 저와 비슷하더라고요.

▼김남길 씨와 호흡을 맞춘 건 이번이 처음인데 어떻던가요.
이런 표현이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남길 오빠는 영민하다고 할까요. 저는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제가 맡은 연기만 잘해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오빠는 자기 몫을 다하면서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까지 챙기시더라고요. 남을 배려하고 현장을 케어하는 오빠의 그런 면이 저는 물론이거니와 현장 분위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워낙 털털하시고 본인만 돋보이려 연기하는 분이 아니어서 연기적인 호흡도 잘 맞았고요. 오빠는 저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네요(웃음).

▼본인에게 연기 재능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됐나요.
어릴 때는 아무런 꿈도 없었어요. 제가 왜 태어났나 싶을 정도였어요. 이런 고민을 안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동아리를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친한 친구랑 떨어지기 싫어서 방과 후 연극반 활동을 했죠.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게,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막 떨리다가도 막상 그 위에 서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연극을 통해 제가 경험할 수 없는 걸 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전국 청소년 연극제에 나가 상을 몇 번 받으면서 제게도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요. 그때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사는 데 있어서 연기가 흥미로웠어요. 관심사 1순위가 연기다 보니 그 일을 계속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가 제 적성에 맞는 직업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써니〉 이후 1년에 다섯 사람도 안 만날 정도로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걸로 알아요.

원래 제가 낙천적이에요. 예전부터 잘되면 ‘어, 내가 운이 좋네!’, 안 되면 ‘음,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고 편하게 생각했는데 〈써니> 이후 2년 동안은 그러지 못했어요. 들어오는 작품도 없었고, 오디션을 봐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최종에서 떨어지기 일쑤였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스스로 연기를 곧잘 하고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다 내 착각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드니까 저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졌었죠. 그러다 를 만나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그 작품 덕분에 슬럼프에서 헤어날 수 있었죠.

▼이번 작품의 언론시사회 무대에서 과감한 노출 패션을 선보여 반응이 뜨거웠어요.
이제 악플도 달리더라고요. 헐벗은 것처럼 나와서 욕을 좀 먹었거든요. 그래도 언짢지는 않았어요. 그게 다 저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연기 외에 평소 관심을 두는 일이 있나요.  
(골똘히 생각하더니) 관심사가 별로 없어요.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인그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을 보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날에는 철로 위에 햇빛이 드는 사진을 올려 화제가 됐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 역시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해요. (탄핵에 관한 사안은)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잖아요. 저는 배우니까 그런 문제나 이슈에 대한 생각을 너무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만 제 생각을 표현해요.

▼그동안 연기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느낌이에요.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서 하는 건 아니지만, 고루하거나 흥미롭지 않은 작품은 지양하는 편이에요.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관객이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이면 언제든 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런 제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정말 평범치 않기는 하더라고요. 하하.

▼이제는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해서 단역이나 조연 때는 할 수 없었던 연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기 폭도 넓어지고 연기할 기회도 많아져 좋은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요. 저는 일을 많이 할수록, 기회가 많아질수록 편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그런 상황에 놓이니까 전보다 더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더라고요. 제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으니까요.

예전에는 시나리오 하나만 보고 선택했어요. 제가 재미를 느끼기 힘들거나 시나리오가 정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연기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저보다 영화 팬들의 입장에서 먼저 시나리오를 보다 보니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한결 유연해졌죠. 이번 작품을 한 이유 중 하나도 중간 규모의 영화가 없어서예요. 그래서 더 발 벗고 나섰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느 날’이 있나요.
처음 연기를 시작한 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땐 그저 연기가 재미있다는 생각만 있어서 소중한 순간들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는데 연기를 다시 시작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시간들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앞으로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지금은 연기로써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배우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면서 좋은 배우로 기억되길 바라요. 하지만 좋은 사람인데 연기가 좀 부족할 수 있고, 연기가 뛰어난데 인성이 부족할 수도 있잖아요. 어떤 연기자를 좋은 배우로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제게 남겨진 숙제죠. 앞으로 계속 연기를 하며 그 답을 찾고 싶어요.

사진 홍중식 기자 디자인 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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