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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editor 김지영 기자

작성일 | 2017.05.02

“죽기 전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하던 배우 김영애는 췌장암 투병 중에도 촬영장을 지키다 드라마 종영 한 달여 만에 눈을 감았다. 연기 외에는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 중간중간 그와 나눈, 그러나 기사에 담지 못한 추억을 정리했다.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봄기운이 완연하던 4월 9일 오후, 휴대전화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배우 김영애(66)의 부고였다. 그의 가족이 전송한 문자 메시지에는 ‘연기자 김영애 씨 별세…연락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차마 믿기지 않았다. 이틀 전인 4월 7일 그의 매니저가 “선생님의 건강은 괜찮다”고 전하지 않았던가.

황급히 달려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정말 그의 빈소가 마련돼 있었다. 빈소에 들어서자 영정 사진 속 그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14년 1월 30일, 영화 〈변호인〉으로 생애 처음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고 카메라 앞에 섰을 때처럼.
그날 그는 “2012년 〈해를 품은 달〉 촬영을 마치고 췌장암 수술을 받은 후 보기 민망할 정도로 심하게 야위었었는데 살을 다시 찌워 꿈에 그리던 체중이 됐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꼭 천진한 아이 같은 표정”이라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철이 안 들어서 그래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비교적 닳지 않아서 아직도 철 안 든 얼굴을 갖고 있나 봐요. 그래서 일도 연애도 더 고달팠지만(웃음).”

그날 화보 촬영을 마치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고인은 1951년 부산 가시내로 태어난 후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과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마치 자서전을 쓰듯 풀어냈다. 그와 십수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토록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건 처음이었다.

약골에 배우 근성을 타고난 소녀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고인이 과거에 출연한 드라마 〈가을여자〉(1993), 〈빙점〉(1990), 〈파도〉(1999)(왼쪽부터).

어릴 적 그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결석하는 날이 많았고, 중학교 땐 악성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동네 의사는 신경 굵기가 다른 사람의 반밖에 안 돼서 그렇다고 진단했다. 몸은 약했지만 학창시절 그는 “당돌하고 간이 큰” 소녀였다. 이런 그를 두고 어머니는 “조선팔도에 어쩌다 저렇게 앙칼진 게 나왔느냐?”고 했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셨어요. 길거리에서 과자도 못 먹게 하셨어요. 연필과 공책을 다 쓰면 검사를 하고 새것을 주셨는데 낙서가 있으면 종아리를 때리셨죠. 그런 아버지에게 부산여고에 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공부하기 싫어서 부산여상에 원서를 냈거든요. 그 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한 달간 이모 집에서 지냈어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당돌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런 근성이 제가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저는 큰일을 만나면 더 대범하고 침착해지거든요. 작은 일에는 오히려 안달하고 겁도 많아요. 무서워서 운전도 못하잖아요(웃음).”

부산여상을 졸업한 후 그는 1971년 MBC 3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 연기자로 데뷔한다. 서울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친척 언니의 권유로 시험에 응시한 것이다. “시험에 붙으면 방송국에서 월급을 주는 줄 알았다”는 그는 데뷔 2년만이던 1973년 드라마 〈민비〉의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제 배우 인생을 빛내준 첫 번째 작품이 〈민비〉예요. 1년 가까이 방영됐는데 대단한 인기를 끌었어요. 김영애를 배우로 만들어준 MBC 주말극 〈야상곡〉(1981)도 잊을 수 없죠. 김수현 선생님의 작품인데 그걸로 백상예술대상도 받고,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도회적인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기한 드라마 〈형제의 강〉(1996)과 〈파도〉(1999), 기업 총수로 출연한 〈로열패밀리〉(2011)는 연기 폭을 넓혀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한 〈황진이〉(2006), 영화의 맛을 알게 해준 〈변호인〉(2013)도 평생 기억에 남을 작품이고요.”

그는 〈민비〉로 스타 반열에 오르지만 20대 중반에 유부남 밴드마스터 이종석 씨와 사랑에 빠져 배우 인생의 위기를 겪는다. 두 사람은 1978년 결혼한다. 이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2001년 이씨와 파경을 맞아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다 2003년 5세 연하인 황토팩 사업 동업자 박장용 씨와 재혼한 뒤에는 한동안 연기 활동을 접고 사업에 집중한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연간 매출이 1천7백억원이 넘었고 전북 정읍 일대에 공장이 증설됐다.

하지만 2007년 시사고발 프로그램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에서 ‘중금속 검출’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들던 황토팩에 다량의 쇳가루가 들어있다고 보도하면서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이후 식품의약품안전청 조사 결과 이 쇳가루는 건강에 전혀 해롭지 않은 황토 본연의 성분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사업은 재기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뒤였다.

사업 실패로 또 다시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는 2008년 박씨와 이혼한다. 이듬해인 2009년 영화 〈애자〉로 스크린에 복귀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2012년 〈해를 품은 달〉 촬영 도중 췌장암 초기라는 판정을 받는다. 그럼에도 다른 배우들과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바로 수술대에 오르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두 달을 더 버텨 드라마 촬영이 끝난 직후 수술을 받았다.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왼쪽부터 최근작인 영화 〈카트〉(2014)와 〈변호인〉(2013).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고인의 유작인 KBS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초기에 발견한 췌장암 끝내 이겨내지 못해

그는 “황달 증상이 심해 처음에는 췌장염인 줄 알고 검진을 받았는데 암이 발견됐다. 수술 전날 담당 의사가 와서 ‘췌장암은 이미 다 번져서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는데 초기에 발견된 건 천운’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수술은 9시간 만에 끝났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었다.

수술 직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십이지장부터 담도, 담관, 췌장 일부를 잘라내 물만 먹어도 고통이 뒤따랐다. 식사도 거의 할 수 없었다. 수술 후 2주 만에 13kg의 체중이 줄었다. 그는 “다시 밥을 먹기까지 두 달이 걸렸는데 그새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덕분에 체중은 원하던 수준까지 불어나고, 과식하던 습관은 없어졌다. 그는 “과식했다가 몇 번 큰일을 치를 뻔했다. 죽을 때까지 과식하면 안 된다. 이제는 식사할 때도, 술 마실 때도 ‘스톱’하는 타이밍을 안다”며 “예전에는 폭탄주 10잔을 마셔도 끄떡없었는데, ‘〈변호인〉 1천만 파티’에서는 맥주 2잔을 마시고 해롱거렸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수술 후 그는 조금만 무리해도 살이 금세 빠져 체력 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정기 검진도 꾸준히 받았다. 그는 2014년 1월 가진 인터뷰에서 “가끔 잠을 못 자고 기운이 없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사석에서 만났을 때는 안색이 예전 같지 않았다. 췌장암이 재발한 탓이었다. 그는 “췌장암이 재발했는데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다만 수술하기 위험한 부위에 재발해 수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신 항암치료와 비타민요법을 병행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며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2014년 11월 취재차 다시 만났을 때는 전보다 야위어 보였다. 몸무게가 47kg으로 줄었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예전에는 운동을 열심히 해도 몸무게가 500g도 줄지 않더니 지금은 잘 늘지 않는다. 자기 전에 근력을 키우려고 팔 운동을 좀 하고 자면 다음 날 몸무게가 쏙 빠져 있다”면서 “기 수련 선생님이 과한 운동이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운동량을 대폭 줄이고 항암에 좋은 비타민 주사를 계속 맞고 있다”고 고백했다.

또 그해 여름부터 시작한 기 수련 덕분에 불면증이 사라졌다며 “수십 년 동안 못 잔 잠을 이제야 자나 싶을 정도로 숙면을 하고 있다”고 흡족해했다. 이후 간간이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그는 촬영장에 있거나 촬영을 마치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이고 싶다”고 말할 만큼 연기자로서의 삶에 긍지를 갖고 있던 고 김영애. 2014년에 그와 가진 세 번의 만남은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배우로서의 소신과 연기 철학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그와 주고받은 일문일답.

배우 생활을 40년 넘게 했으니 연기로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 같아요.

지금껏 한 번도 연기가 쉬웠던 적이 없어요. 많이 해본 캐릭터라도 작품이 다르니까 매번 새로워요. 그래서 늘 힘든가 봐요. 사람들은 오래 하면 저절로 된다고들 하는데 타고난 연기 천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캐릭터가 제 안에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너무 힘들어요. 연기가 편하게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데뷔 후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백 편 넘는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해마다 두세 편의 작품을 꾸준히 해온 셈이더라고요.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기에 이 정도로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죠. 그 비결이 뭔가요.
먹고살기 힘드니까 계속 일한 거예요. 돈이 급해서. 늘 가장이었으니까. 동생 중에 잘된 아이도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도 있어요. 또 민우(친아들) 아빠에게 아이 셋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도 제가 다 공부시키고 결혼시켰죠. 그래서 늘 사는 게 팍팍했고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마흔아홉까지. 먹고살려고 다작을 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사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돈을 벌어서 제가 하고 싶은 작품만 하는 근사한 배우가 되려고요.

사업은 적성에 맞았나요.

아니요. 저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그런 경험이 제게 없던 배짱을 키워줬거든요.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져보고요. 배우로서 그런 삶도 해볼 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전남편과는 동업자로만 지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또래 연기자들과 달리 주름 펴는 시술에 초연해 보여요.
저도 주름을 보면 속상해요.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다른 배우와 비교가 되니 어쩔 수 없더라고요. 더욱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는 여자고요.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딱 한 가지 포기 못하는 게 연기예요. 주름을 펴려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아서 연기가 부자연스러워지는 건 더 용납이 안 돼요. 저는 좋은 엄마도, 좋은 아내도 아니었어요. 배우로서만 충실히 살아온 인생이에요. 내가 주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죠. 나이를 먹어도 주름마저 아름다운 배우이고 싶어요. 

배우가 천직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 지는 오래됐어요. 사업한답시고 연기를 못하는 동안 병이 났어요. 전남편이 ‘김영애의 남편’으로 비치기 싫다며 제가 연기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연기를 해야 활력이 생기는데 그걸 못해 우울증이 심했어요.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6개월 동안 받다가 〈황진이〉 라는 드라마를 한 거예요. 그 작품을 하며 우울증을 치료했어요. 다 죽어가다가도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지죠(웃음).

갱년기엔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았나요.

잘 극복했어요.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지만 제가 겪는 모든 일에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매순간을 열심히 살았거든요. 췌장암 수술대에 누워 마취하기 직전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너무나도 편안해지더라고요. 속으로 ‘참 열심히 살았다. 김영애, 수고했다’ 그랬어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라고 해도 원도, 한도 없어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가장 아쉬운 게 뭔가요.

저를 돌보지 않은 거요. 몇 년 전 우리 아이들과 유럽 유행을 하면서 한 번도 저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게 후회됐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저만을 위해 살자고 결심했는데, 평생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선지 그게 잘 안 돼요. 제 몸이 주인을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구나 싶어요. 자신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 나왔으니 충실하게 살자. 지구에 폐 끼치지 말고 살자. 그러다 생을 마감할 때 세상 구경 잘하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배우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있을까요.

상상이 안 가요. 그러면 시집을 다섯 번은 가지 않았을까. 하하.

연애와 연기 중 하나만 고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그야 연기죠. 연애보다 연기가 좋아요. 연기는 내 숨구멍이니까. 저는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연기로 풀어낸 것 같아요. 연기할 때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 맛에 연기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전 카메라 앞에 섰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죽기 전까지 연기하고 싶어요. 남한테 폐를 끼치거나 연기하다 죽는 일만 없다면요.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동료들의 추모 행렬로 외롭지 않았던 마지막 길

벌써 그리운  배우 김영애

발인식에 참석한 염정아, 문정희, 나영희, 오달수 등 많은 동료 연예인들이 고인을 떠나보내며 애통해하고 있다.

“죽기 전까지 연기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을까. 지난해 그는 유난히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특별수사 : 사형수의 편지〉 〈인천상륙작전〉 〈판도라〉와 드라마 〈닥터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 그것. 하지만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은 6개월간 찍는 50부작으로 기획된 작품이어서 그가 촬영 레이스를 완주하기엔 애초에 무리였을지 모른다. 결국 방영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이던 지난해 10월 그는 병세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외출증을 끊어 촬영장을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세상과 작별하기 전 고인은 외롭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평소 친자매처럼 돈독하게 지내던 배우 염정아와 문정희, 정경순, 이정은 등이 지난해 10월 그가 입원한 후 수시로 병원을 찾아 곁을 지킨 덕분이다. 고인은 생을 마감하면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 함께 출연하던 정경순과 이정은에게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때때로 고인의 간병인을 자처하고, 영정사진도 함께 고른 이정은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장의 사진 중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사진을 미리 두 장 골라 선생님의 며느리에게 주었다”며 “의사에게서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선생님이 하신 첫 마디가 ‘드라마 같지 않구나’였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내 연기가 부족했구나’라고 연기를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정경순과 염정아는 오랫동안 빈소에 머물며 상주 이민우 씨 내외를 도왔다.

고인의 빈소에는 신구, 김혜자, 최불암, 나문희, 정동환, 김용건, 고두심, 연규진, 금보라, 나영희, 송강호, 전도연, 정우성, 송일국, 박지영, 조성하, 문정희, 오달수, 라미란, 오현경, 차인표, 이동건, 조윤희, 김원해, 엄효섭 등 동료 배우들과 연예 관계자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영화 〈애자〉에서 고인과 모녀로 호흡을 맞춘 최강희는 4월 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애자〉 포스터 사진과 함께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4월 11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발인식이 거행됐다. 발인식은 상주 이민우 씨 내외를 비롯한 유족과 생전 고인이 다니던 교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 예배 형식으로 진행됐다. 배우 염정아와 문정희, 나영희, 임현식, 윤유선, 개그우먼 이성미 등 많은 동료 연예인들도 자리를 함께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 기간에 영정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던 유족은 발인식 역시 비공개로 치렀다. 고인이 “늘 엄격하게 키워 미안했고, 잘 커줘서 고맙고 대견한 아이”라고 하던 외동아들 이민우 씨는 “어머니께서는 많은 분들의 기도 속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겪은 희로애락을 연기로 승화시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선물했던 배우 김영애. 영면에 들면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듯하다. “그동안 수고했다, 김영애! 세상 구경 잘하고 간다!”고.

사진 김도균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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