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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Interview #senior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 연 최순화

나이에 도전하다

EDITOR 김건희

입력 2019.08.22 17:00:01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모델 세계에 뛰어든 것은 못다 이룬 꿈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정 때문이다. ‘꿈이란 젊을 때 이뤄야 한다’는 편견을 깨부순 시니어 모델 최순화 씨. 인생의 풍파에 휩쓸렸을 때 ‘진짜 모델’이 된, 그의 1막보다 행복한 인생 2막을 들었다.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 연 최순화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나자 노부인의 느슨했던 눈빛에 순간 날이 섰다. 연둣 빛 정장 코트에 짙은 녹색 재킷, 짧고 풍성하게 웨이브 진 근사한 백발. 여든 가까운 나이에도 눈에 띄게 꼿꼿한 허리와 기품 있는 자신감. 이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한창 멋을 내는 젊은 여성들도 흘끔거릴 만큼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이다. 촬영을 마친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강렬한 기운이 사라지고 여유가 감돈다. 본인이 살아온 이력과 살아갈 미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1943년생, 데뷔 2년 차 신인 ‘시니어 모델’ 최순화(76) 씨는 젊은 모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멋이 묻어나는 ‘진짜 모델’이다. 2018년 시니어 모델 김칠두(64) 씨와 함께 국내 시니어 모델로는 최초로 ‘2018 가을·겨울(F/W) 헤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20~30대 모델 위주인 무대에 70대 모델이 오른 건 그가 유일하다. 2018 F/W 시즌 패션 브랜드 키미제이(KIMMYJ) 무대로 데뷔한 후 런웨이뿐 아니라 여러 패션 매거진에도 등장했다. 올 초에는 그의 모델 활동을 지원해주는 모델 학원 ‘더쇼프로젝트’와 전속 계약도 맺었다.


간병인 인생 숨통 틔워준 한 줄기 빛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 연 최순화
195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찌감치 모델의 세계를 동경했다. 부친이 사 온 잡지책에서 모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 시절 대한민국 부모 대부분은 자식이 모델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평생 천대받을 일’이라는 게 이유였다. 어려서부터 손재주 좋고 패션 감각이 남달라 모친에게 칭찬을 받곤 했다는 그는 “시대를 잘 만났다면 그 길로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아쉬워했다. 스무 살 때 언니 따라 고향(경남 창원시)을 떠나 서울로 와서 잠깐 모델을 꿈꾸기도 했다. 170㎝ 큰 키와 우월한 신체 비율을 가진 그였기에 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 간병으로 힘들어하던 가족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간호 보조 일을 배워 근무하다 결혼하면서 모델의 꿈과는 완전히 멀어졌다.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며 가정주부로 40년 세월을 지냈어요. 마음 한구석엔 미처 펼치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 늘 자리 잡고 있었죠.” 

다시 모델의 꿈을 꾸게 된 건 지인에게 돈을 빌려준 일로 이런저런 소용돌이에 휘말리고서였다. 예순여덟 나이에 빚을 갚고자 시작한 간병인 생활은 6년 넘게 이어졌다. 당시 빚 갚는 데 열중하는 그의 인생엔 막막함과 답답함뿐이었다. 삶의 돌파구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에서 운명처럼 시니어 모델과 조우했다. 



“시니어 모델을 꿈꾸는 사람들의 도전기를 그린 방송이었죠. 시니어 모델을 양성하는 학원이 있다고 하기에 그 길로 찾아가 기초반에 등록했어요. 인생이 어떻게 급변할지, 어떠한 상황이 닥칠지 알 길은 없었지만 물러설 곳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라 생각했어요. 남은 20~30년의 삶은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결론짓고 2014년부터 근 5년간 학원을 다녔습니다. 지금도 학원을 다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업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웃음).” 

살면서 한 번씩 인생이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최순화 씨는 모델 학원을 찾은 5년 전 그날이 바로 그러한 날임을 직감했다. “갑갑한 인생에 숨통을 틔워줄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는 것. 기초반 첫날 수업에 들어가자 50~60대 남녀 수십 명이 앉아 있었다. 민얼굴에 티셔츠, 청바지 차림은 자기 한 사람뿐이었고 대부분이 스타일 좋은 멋쟁이였다. 멋쩍고 난감한 표정으로 “학생 평균 연령을 올려놓아 미안하다”는 말로 웃어넘겼다. 패션 감각이야 재능을 타고난 데다, 그동안 취미 생활로 바느질과 재봉을 하며 옷을 보고 만진 풍월이 있어 별로 문제시되지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모델 수업이 있는 매주 화요일마다 자신을 대신해 근무할 간병인을 구하는 일이었다. 

“모델 학원 등록하고도 몇 년 동안 가족에게 시니어 모델에 도전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으니까요. 낮에는 간병하고 저녁에는 살림하느라 사람들 자는 새벽에 남몰래 워킹 연습을 할 정도로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죠.”


시니어 모델 학원에서도 맏언니 격

젊은 시절 첫째 아이와 함께.

젊은 시절 첫째 아이와 함께.

일흔둘 늦은 나이에 용기를 냈지만 초창기 학원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학원 분위기가 낯설고 학생들과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다, 주부에서 시니어 모델 지망생으로 갑작스레 바뀐 처지에 적응하는 데 진통을 겪었다. 그는 학생 본분에 충실하려 애썼다. 20~30대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동년배 시니어 모델 지망생들과 어울려 맏언니 역할을 자처했다. 

“아들딸뻘 되는 젊은 친구들에게 존대를 했어요. 말을 편하게 하라고들 했지만 되도록 그러지 않았어요. 나이 먹어 다시 시작하는 사회생활은 교만함이 없어야 젊은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유연해져야 해요. 수십 년 사회생활을 한 시니어 모델 지망생들 앞에서 허튼 행동을 하면 윗사람으로서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매사에 조심스러웠죠. 간병인 생활로 인생의 한 단면을 경험해본 것이 이 세계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평범함과 모방을 허용하지 않는 모델 세계에서 독특한 매력이 없다면 생존하기 어렵다. 시니어 모델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분명할 때 좋은 모델로 성장할 수 있다. 모델 학원에서 보낸 5년은 ‘최순화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그는 평생 추구할 지향점을 발견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옷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소화하고 싶어요. 나이 많은 시니어 모델도 구멍 난 청바지를 소화해야 진짜 모델이 아닌가 생각해요. 패션 잡지를 찾아보고, 패션쇼에 참석해 다양한 스타일을 눈으로 익히고, 리듬을 온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난타를 배우는 것은 나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 덕분에 웨이브 진 백발은 저의 최고 트레이드마크가 됐죠.” 

무대에 오를수록, 모델 세계에 깊이 빠져들수록 고민은 커져간다. 모델은 언제나 몸의 언어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표현 수단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평생 주부로 정적인 생활에 갇혀 지내선지 몸에 밴 딱딱함을 깨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델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유니크한 감수성을 키우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모델 수업 초창기엔 선생님께 칭찬받는 시니어 모델의 장점을 응용하던 그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게 돼버리자 고민에 빠졌다. 그는 “틀을 완전히 깨뜨렸을 때 진정한 모델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정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직업과 달리 모델은 매뉴얼이 없고 무대가 원하는 콘셉트 안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어요. 하지만 워킹할 때 어느 지점에서 나만의 느낌을 표현할지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어렵습니다. ‘파워 워킹’을 하더라도 너무 오버하면 좋은 스텝이 안 나와요. 좀 더 노련해지려면 끊임없는 자기 개발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 같아요.”


건강 비결은 절제된 식습관 & 긍정적 마인드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 절제된 식습관과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이다. 기본적으로는 마른 체질이지만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끼니로 먹던 빵도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사과와 당근, 삶은 달걀, 고구마로 식사를 해결한다. 연령이 높을수록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고혈압이나 당뇨 질환을 앓아본 적이 없다. 그는 “모델 수업을 통해 굽은 어깨를 일자로 바로잡았다. 모델 활동을 시작하고 더 건강해졌다”며 만족해했다. 

SNS에서 누리꾼으로부터 ‘힙한 할머니 모델’이라 불릴 만큼 젊어 보이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는 마냥 젊어 보이려 애쓰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욕구를 가지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걸 인생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박에서 벗어나 무대에 오른다는 것, 그 자체가 좋다. 

모델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매주 화요일 수업을 받고 있는 그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회사에서 모델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지만, 개인적으로 취미 활동이 아니라 거의 투자 수준으로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는 것. 유지 비용뿐 아니라 옷이나 아이템만 해도 값이 엄청 비싸다. 그래서 요즘 다른 곳에 돈 쓰지 않고 죄다 모델 활동에 투자하고 있다. 

“시니어 모델은 많아졌는데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아요. 시니어 모델을 바라보는 시각도 취미 생활 내지 자아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무대에 올라도 낮은 수준의 개런티를 받아요. 앞으로 더 많은 무대에 올라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그는 몇몇 시니어 모델과 학원 밖에서도 종종 어울리며 지낸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아이템을 공유하는 즐거움 말고도 다른 방식 그리고 개성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가 있다. 또 모델 활동을 통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사람들과 지내며 깨닫는 바가 크다고 한다. 그는 “워낙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일이 많아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니지만, 철저하게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롤 모델은 경력 70년의 미국 패션모델 카르멘 델로레피체다. 1931년생인 그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델로레피체와 함께 세계 패션쇼에 올라 한국에도 멋진 시니어 모델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꿈이다. 그래서 그에게 무대에 오르는 행위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또 다른 도전이다. 누구나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도전하며 꿈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령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신의 스토리가 이를 증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 연 최순화
새털같이 수많은 날을 살아가며 그가 인생에서 가장 알차고 보람 있는 시기로 꼽는 것은 학원에서 모델 수업에 몰두하던 지난 5년이다. 그는 “무대에 올랐을 땐 모든 게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소한 몸짓이나 조그마한 표정 변화에도 관객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과감히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죠. 사람들 대부분이 나보다 가족을, 꿈보다 돈을 택합니다. 꿈을 이루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결혼해 아이 낳고 남편 뒷바라지하다 꿈도 이상도 없이 현실에만 안주하게 되죠. 너무 늦으면 새로운 길을 갈 수 없다는 생각들을 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조금 늦었을 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할 만큼 늦지는 않았습니다.” 

긴 세월 다른 곳을 헤매다 힘겹게 다시 얻은 기회 앞에 선 최순화 씨. 그는 “이런 인생사를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결정적 순간을 놓치게 되면 그다음은 어떠한 세파에 휩쓸려버릴지, 그로 인해 얼마나 긴 시간을 후회 속에서 보내야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리라. 인터뷰가 끝난 시간은 늦은 오후.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해가 쨍쨍하고 하늘이 푸르렀다. 그 하늘이 말하는 듯했다. 인생은 길다고, 어릴 때만 뭔가 해낼 수 있단 생각을 버리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기획 정혜연 기자 사진 김도균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최순화




여성동아 2019년 8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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