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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작가 단독 인터뷰

editor 김지영 기자

작성일 | 2017.06.27

2010년부터 활동해온 미디어 아티스트 문준용 작가는 최근 세계 1백50개국에서 출시된 게임의 개발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다. 맑고 커다란 눈, ‘~것이죠’라는 익숙한 말투, 솔직한 태도가 아버지를 빼닮은 그는 이미 대선 과정에서 혹독하게 유명세를 치렀다. 그가 〈 여성동아 〉와 두 차례 단독으로 만나 일과 가족, 그리고 ‘아버지 문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작가 단독 인터뷰
누군가를 인터뷰하기로 약속하고 조바심을 내긴 처음이었다. 5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금호미술관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미디어 아티스트 문준용(36)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 개막한 기획전 〈 빈 페이지 〉에 그가 7명(팀)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전날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아버지인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인 데다, 선거 운동 기간에 문 작가 자신이 언론과 SNS에 오르내리며 크게 마음고생을 했으리란 걸 충분히 짐작하기에 약속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나기로 한 오후 5시 정각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자신의 출품작 ‘비행’이 전시된 공간으로 직접 안내해 열정적으로 작품을 설명했다. ‘비행’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다. 관객이 작품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위아래, 좌우로 날갯짓을 하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대형 스크린 위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팔의 움직임이 빨라지면 이미지가 생성되는 속도도 빨라진다. 한참 그렇게 날갯짓을 하다 보면 별들이 점점이 박힌 우주를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이 작품의 이름을 ‘비행’이라고 붙인 이유다.

“관객들은 어릴 적 하던 그림자놀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비물질적인 소재와 공간성을 이용해 관객에게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려는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에 맞게, 학생 때 만든 작품인 ‘바디 펜’을 많은 부분 수정하고 업그레이드해 완성한 것이죠.”

귀에 익은 “~것이죠” 화법에 절로 웃음이 났다. 문재인 대통령의 그것과 흡사해서다.

‘비행’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해하자 문 작가는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팔의 각도, 몸의 각도를 일일이 체크해 영상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며 “처음엔 익숙지 않아 연습이 좀 필요하지만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른 작품을 완성할 때도 직접 만든 웹 프로그램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중학생 시절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배워둔 것이 대학에서 다양한 웹 프로그래밍 기술을 습득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문 작가는 2007년 건국대 시각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이하 파슨스 스쿨)에서 ‘디자인&테크놀로지’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해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열린 파슨스 스쿨 졸업 작품전이 데뷔 무대가 됐다. 이후 그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스페인 바르셀로나미술관, 이탈리아 로마 국립21세기현대미술관 등 권위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첨단 과학기술과 예술을 접목한 작품으로 미디어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또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전〉, 지난 4월부터 경북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Play Art, 놀이하는 미술〉전 등 국내 전시에도 꾸준히 참여해왔다. 〈빈 페이지〉전 큐레이터는 그를 “관객과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추구하며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신선한 재미를 안기는 작가”라고 평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작가 단독 인터뷰

어릴 적 꿈은 뭐였나요.
만화가가 돼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어요. 만화 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림을 그리면 친구들이 제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미술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미술 입시에 사교육비가 많이 들었겠어요.
많이 안 들었어요. 고3 때 부산에서 동네 미술 학원에 다닌 게 전부예요. 국어, 영어, 수학도 개별 지도를 받지 않고 세 과목 다 가르치는 입시 학원에 다녔고요.

사춘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애니메이션과 일본 만화에 빠져 있었어요.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죠. 반항도 해봤어요. 심하진 않았지만요. 부모님 말을 안 들은 적이 거의 없어요. 학교에서도 사고 치지 않는 얌전한 아이였고요.

친구들에게 아버지 자랑을 안 했다고 하던데, 원래 과묵한 스타일인가요.
자랑을 자기 입으로 하면 멋없어요(웃음). 더구나 아버지 얘기를 친구들에게 할 이유가 없죠. 아버지가 뭐 하는 분인지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죠.

대학 때 만든 작품을 당시 지도 교수가 극찬한 글을 봤어요. 지하철 바닥에서 직접 뒹굴며 ‘차별’을 시각화한 영상 작품이라는 평이더군요.
당시 엽기 영상이 유행했어요. 위험한 행동을 촬영해서 동영상으로 올리는 게 트렌드였죠. 그래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만들었어요. 그 작품은 차별이 아니라 ‘이방인’ 혹은 ‘이질적인 감정’이 주제예요. 지방에서 오래 살다 서울에 오니 이방인이 된 것 같았어요. 서울 특유의 문화에 동화되기도 힘들고 오해받을 때도 많아서요.

어떤 오해요.
우선 부산 남자들은 무뚝뚝하다는 선입견이 있더라고요. 일단 목소리가 크니까 공격적으로 들리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사투리로 얘기하면 “왜 화를 내냐”는 오해를 사곤 했어요. 그때 느낀 감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거예요. 제가 갑자기 지하철 바닥을 뒹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거 아니에요. 그때의 감정이 이방인이 된 느낌과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죠.

부모님이 진로에 대해 조언한 적이 있나요.
늘 공부 잘하고 사고 안 치고 착하길 바라실 뿐 진로엔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는 말 대신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어요.

해외 유학을 꿈꾼 건 언제부터인가요.
대학 다닐 때부터 유학을 준비했어요. 제 전공이 모션 그래픽스예요. 영상 디자인을 그렇게 부르는데, 그건 외국에 나가야 배울 기회도 많고 취직할 기회도 많아서 유학이 필수라고 생각했어요. 파슨스 스쿨은 일반적으로 시각디자인보다 패션 명문으로 알려졌지만 제가 가고 싶은 학교 중 하나였어요. 인터랙티브 아트에 대한 교육 체계가 잘돼 있거든요. 게다가 첨단 미디어 아트의 본거지인 뉴욕에 있는 학교여서 배울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학 갈 당시 토플(CBT) 점수가 300점 만점에 250점이었다고 들었어요. 677점이 만점인 요즘 PTB 기준으로 치면 600점대 고득점이라고 하더군요.
미국 유학을 염두에 두고 토플 공부를 했어요. 대학 4학년 때 거의 매일 수험생처럼 학원과 도서실을 오가면서 종일 토플에 올인했어요. 그렇게 꼬박 1년을 공부해서 딴 점수죠. 유학 가려면 토플 점수가 꼭 필요하거든요.

문 작가는 파슨스 스쿨로 유학을 가기 전 한국고용정보원(이하 고용정보원)에 취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2006년 12월 고용정보원 공채 시험 일반직에 응시해 2007년 1월 첫 출근한 것. 고용정보원에 따르면 당시 일반직에 응시한 인원은 모두 39명, 최종 합격자는 9명이었고 이 가운데 7명이 정규직 전환을 원하던 내부 계약직 사원이었다. 나머지 2명만이 외부 응시자였는데 문 작가는 그중 한 명이었다. 문 작가는 일반직 5급 공채 사원으로 채용됐다. 1~9급인 일반 공무원 체계와 달리 고용정보원은 1급부터 6급까지 있으며 일반직 6급은 고졸 신입, 5급은 대졸 신입 말단 사원에 해당한다. 대학 재학 시절 애경, CJ미디어, LG텔레콤, 현대캐피탈 등 대기업에서 주최한 광고 공모전에서 4회 수상한 경력이 있는 문 작가는 고용정보원에서도 동영상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 2008년 입사 14개월 만에 고용정보원에 휴직계를 내고 파슨스 스쿨로 유학을 간 그는 2010년 학교 졸업을 6개월 앞두고 회사를 그만둔다. 휴직 23개월 만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취업을 발판으로 유학을 갔다는 의혹을 샀다. 유학을 갈 계획이었는데 왜 굳이 고용정보원에 취직했는지 묻자 그는 “유학과 취업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지원했는데 취업이 된 후 파슨스 스쿨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둘 다 합격할 줄 알았다면 그런 선택을 안 했겠죠. 2006년 12월 고용정보원 공채 시험에도 응시 원서를 내고, 그 전후 몇 달 사이에 파슨스 스쿨을 비롯해 제가 가고 싶었던 해외 대학원 몇 곳에 입학 지원서를 냈어요. 고용정보원 공채 시험 공고는 채용 정보 사이트 워크넷에서 봤는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석사 과정을 밟기보다 실무 경험을 먼저 쌓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2007년 고용정보원에 채용된 이후 파슨스 스쿨과 다른 해외 학교 두 곳에서 동시에 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참 난감한 상황이었죠. 고민을 하다가 입학 조건을 알아보고 파슨스 스쿨 입학 신청을 1년 늦춘 거예요.

학비가 비싼 학교로 알려져 있는데 경제적 부담이 컸겠어요.
파슨스에 다니려면 학비가 1년에 1억은 든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등록금은 한국 대학원의 2~2.5배 수준이에요.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많이 비싼 편이지요. 다행히 그 학교에 장학생으로 선발돼 학비의 50%를 장학금으로 감면받을 수 있었어요. 입학 신청을 1년 연기해도 장학금을 준다는 조건이 파슨스 스쿨로 유학 간 이유 중 하나죠.

▼ 그동안 취업과 유학 관련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억울했죠.

이날의 인터뷰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의 아내와 지인들이 전시를 함께 보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약속을 잡고 엿새 뒤인 5월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두 친구와 함께 이곳을 쓰고 있었다.

언제부터 문래동(최근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됐다) 작가가 됐나요.
2010년 파슨스 스쿨을 졸업한 직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창작자들을 위한 레지던스를 이용하다가 2013년부터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공간 규모에 비해 임차료가 쌉니다. 하하.

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 문준용 작가 단독 인터뷰

유학 중에도 임차료가 싼 방을 찾아다녔다면서요.
그 전까지 번 돈에 부모님 도움을 좀 받아서 미국에 갔는데 학생 비자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불법이었어요. 그래서 돈을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뉴욕 맨해튼은 임차료가 너무 비싸서 근처 뉴저지에서도 방세가 싼 동네에서 살았어요. 유학 간 첫해는 정말 싼 방만 찾다가 무너져내리기 직전인 집에 잘못 들어가 무진장 고생했어요. 월 임차료가 6백50달러인 ‘원 베드룸(침대가 1개인 방)’에서 대학 동창과 함께 살았는데, 1층 외벽에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 ‘이 집에서 살 수 없으니 대피하라’는 경고 문구도 있더라고요. 쓰지도 않는 가스 요금이 수십만원씩 나오고요. 그럼에도 계약 기간이 남아 버티다가 맨해튼에서 좀 더 가까운 월 1천5백 달러짜리 원 베드룸으로 이사했어요. 룸메이트랑 분담해 1인당 80만원 정도씩 냈어요. 방세를 너무 아끼면 정말 큰일 치를 것 같아 좀 무리해서 빌렸죠.

건국대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봤어요. 막노동부터 길거리 좌판에서 인터넷 가입 신청자를 받는 일도 해보고 술집, 커피숍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리고 저희 학과로 웹사이트나 동영상 만드는 아르바이트가 들어와서 고학년 때는 그런 일을 많이 했어요. 용돈이 되게 적었거든요. 하하. 부모님 도움을 안 받고 자수성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부모님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았고, 부모님 덕으로 잘되기도 싫었어요. 장남이기에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고요. 

결혼을 어디에서 했나요.
2014년 한국에서 했어요. 미디어 아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아내를 만나 1년 좀 넘게 연애하다 결혼했죠. 아내는 미디어 아트를 이용한 융합 인재 교육을 하고 있어요. 과학, 기술, 교육, 예술, 수학을 아우르는 스팀(STEAM) 교육을 미디어 아트와 접목한 것이죠.

자녀가 있나요.
두 돌 된 아들이 있어요.

유학을 오래 했는데 요리 좀 하시나요. 어머니 손맛을 닮았을 것 같아요.
제가 와이프보다 요리를 더 잘해요. 찌개, 볶음 같은 기본 한식은 웬만하면 다 맛있다고 하던데요. 하하.

‘어머니’표 요리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뭔가요.
어머니가 직접 담근 열무김치로 만들어주시던 열무냉면요. 멸치 육수와 김칫국으로 국물을 만들어 냉면에 붓고 열무김치를 위에 얹어주셨는데, 그걸 제일 좋아했어요. 김치도 잘 담가야 하고 냉면 국물도 잘 만들어야 하는 요리여서 손이 많이 가는데도 척척 만들어주셨죠. 원래 요리 솜씨가 좋으셔서 양식도 잘하세요. 어릴 땐 전문점에 가야 먹을 수 있던 피자나 스파게티를 집에서 해주셨어요. 이북 음식인 가자미식해도 잘 만드셨고요. 어머니는 요리에 정성을 많이 쏟는 분이죠.

아버지로서 문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나요.
어릴 때 같이 많이 놀아주셨어요. 캐치볼이나 축구,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많이 시키셨어요. 아버지 취미가 등산이어서 가족들을 산에 많이 데려가셨어요. 특히 능선이 깎아지른 듯하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바위가 많은 난코스를 많이 따라갔어요. 어릴 때였으니 힘들고 무서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다른 집 아이들도 다 그러는 줄 알고요(웃음). 저는 아버지에게 100점 만점을 드리고 싶어요. 자상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살아오신 인생 자체가 자식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됐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아버지시죠. 인품도 훌륭하지만 판단력과 결단력도 대단하세요. 저도 그런 면들을 닮고 싶어요.

롤 모델이 아버지인가요.
어릴 때는 정말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디어 아트 분야의 선구자로 꼽히는 세계적인 작가이자 교육자인 존 마에다와 골란 레빈, 그리고 파슨스 스쿨에 다닐 때 제 스승이셨던 재커리 리버맨(Zachary Lieberman)을 롤 모델로 삼고 있어요. 재커리 리버맨은 미디어 아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첨단 기술을 교육에 활용하는 분이죠.

그는 2015년 지인들과 함께 게임 회사 티노게임즈를 설립했다. 그중 한 사람이 게임 제작팀을 꾸리면서 4명이 공동 투자 형식으로 동업을 하게 됐다고 한다. 5월 25일 이 회사의 첫 작품인 전략형 모바일 게임 ‘마제스티아’가 세계 1백50개국에서 출시됐다. 2012년 대선 당시 아버지의 유세를 적극 도왔던 그가 이번 대선 때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게임 출시가 임박해서”라고 말했다.

대선이 끝난 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나요.
당선 이후 한 번 뵀어요. 선거 기간에 게임 출시 준비를 하느라고 못 뵈어서 청와대에 들어가 제가 하는 일을 설명드리고 전시회와 게임 출시 등 요즘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고생한다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저희는 만나면 말을 많이 하지 않아요. 눈빛만으로도 통한다고 할까요(웃음).

문 대통령이 당선 전 “아들 덕분에 게임을 알게 됐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요.
어릴 때부터 제가 게임을 하도 좋아해서 아버지가 같이해주시곤 했어요. 게임이 아버지 적성에 맞았던 건 아니지만 저와 함께하려고 노력을 하셨던 것이죠. 제가 초등학교 2~3학년 때 즐겼던 ‘젤다의 전설’이라는 게임이 있어요. 최초의 롤 플레잉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전설적 게임이에요. 그때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지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는데, 게임 가이드북과 영상이 다 영어로 돼 있었죠.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지 아버지가 영문으로 적힌 게임 설명 밑에 한 줄 한 줄 한글로 번역을 해주셨어요. 얇은 종이에 영문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고 분량이 수십 페이지에 달했어요. 그걸 죄다 번역하느라 진땀을 뺐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오더라고요.

‘마제스티아’는 롤 플레잉 게임이 아니라 전략 게임이라고 들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 삼국지 〉에서 착안한 전략 게임이에요. 전략 게임은 장기 같은 거예요.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공격과 방어를 통해 장기판에서 말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고,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과 대전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이죠.

게임을 개발하면서 어려웠던 점은요.
개발 작업보다 회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미래가 불확실한데 충분치 않은 자본과 인력으로 회사를 끌어가야 하니까요. 다들 일당백의 역할을 해야 했는데 당초 계획보다 개발 기간이 길어져 제작 경비가 많이 들었어요. 게임 유통사에서 받은 계약금으로는 부족할 정도로요. 그 때문에 힘들었는데 출시가 돼서 일단 한시름 놨어요. 고비를 넘어섰으니까요. 이 게임의 성패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데 다행히 지금 반응이 좋아요. 컴퓨터와 대전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들 합니다(웃음).

티노게임즈의 이사로 재직 중인데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테크니컬 디렉터여서 영상이나 특수 효과,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부분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그래픽 디자인과 아트워크 같은 분야에도 관여하고 있고요. 제가 캐릭터를 직접 그리진 않아요. 캐릭터 디자이너는 따로 있어요. 임원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진 않아요. 회사 직원이 많지 않아서 서로 의견을 자주 교환하면서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해요.

예술과 게임 중 어느 쪽에 더 애착이 가나요.
둘 다 잘해보려고요. 구체적이진 않지만 게임으로 작품을 할 수도 있고, 작품으로 게임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예술성 높은 아트 게임을 만드는 작업도, 게임에서 예술적인 요소를 끌어내 작품을 만들어가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네요.
미디어 아트 작가로서는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게 궁극적 목표고, 게임 개발자이자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니까 첨단 기능을 이용해 미디어 아트, 프로그래밍, 게임을 모두 융합한 작품 또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여러 분야를 융합한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3D 애니메이션 영상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는 아버지가 어떤 대통령이 되길 바랍니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라신 것처럼, 아버지도 지금과 같이 국민과 소통하며 대통령으로서 가고자 하는 길을 소신껏 가시기를 응원합니다.


사진 홍중식 기자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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