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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trend #embroidery

헬렌정의 프랑스 자수 이야기

나를 위한 선물

editor 김명희 기자

2017. 03. 07

한 땀 한 땀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결이 일고 꽃이 핀다. 색색의 실들이 천과 만나 생명을 얻고 멋진 그림으로 완성돼가는 모습은 우리 삶의 궤적과 닮았다. 헬렌정은 프랑스 자수를 통해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는 법을 이야기한다.

한동안 엄마의 장롱 속에 잠자고 있던 자수가 트렌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나 돌체앤가바나, 발렌시아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전통과 아예 담을 쌓았을 것 같은 아디다스의 이지부스트도 자수 장식을 포인트로 한 한정판 제품을 내놓고 있다. 쇠락해가던 구찌를 부활시킨 천재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하든카드도 자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선 프랑스 자수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늘면서 이를 배울 수 있는 공방이나 문화센터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 팀이 이끄는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17〉은 이를 자신만의 취향과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흐름으로 해석하며, “많은 것들이 기계화되고 디지털화된 시대에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성취감을 얻는 취미가, 고단한 현대인들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활력이 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헬렌정(50·본명 최수정) 씨가 최근 출간한 〈헬렌정의 프랑스 자수〉(동아일보사)라는 책을 펼치면 그런 복잡한 설명 없이도 프랑스 자수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동양 자수가 한 가닥의 실로 정갈하게 질감을 표현해내는 것이 특징이라면, 프랑스 자수는 여러 가닥의 실로 겹쳐서 수를 놓기 때문에 입체적이며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헬렌정 씨는 업계에서 유명한 프랑스 자수의 고수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헬렌의 마르세이유’(blog.naver.com/dkdldpf08)는 이웃이 2만6천여 명에 이르고 그에게 직접 배워 프랑스 자수에 입문한 사람도 1천 명이 넘는다. 그는 2010년 무렵 우연히 원서로 접한 풍부한 색감과 입체감에 매료돼 프랑스 자수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배울 만한 마땅한 전문가가 없어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해하고, 그래도 안 되는 부분은 관련 동영상을 찾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자수 전문가들과 구분되는 노하우와 독창적인 부분이 많아 수강생이 줄을 잇고 있다.


“핸드메이드는 최소 10년은 해야 고수라고 할 수 있어요. 아직 경지에 올랐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제가 프랑스 자수를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블로그를 개설했는데, 그걸 통해 프랑스 자수를 알게 된 분들이 행복을 느끼고 힐링이 된다고 말씀해주셔서 저도 에너지를 얻고 있어요.”

프랑스 자수를 시작한 지 햇수로 8년째. 헬렌정 씨는 이제 레슨을 하고 수를 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한 번도 고되다 느낀 적은 없다. 그만큼 자수에서 얻는 기쁨이 크다.



“요즘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수를 이렇게 놓으면 어떨까, 이걸 완성하면 어떤 모양이 될까 궁금하고 설레서 다시 일어나 수틀을 잡곤 해요. 모두 잠들어 고요한 새벽이면 바늘이 천을 지날 때마다 ‘뽁뽁’ 하고 소리가 나는데, 그게 마치 낙숫물 소리처럼 들려요. 그럼 복잡한 일상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죠. 프랑스 자수를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더 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살다 보면 작은 일로 속상해하고, 분을 참지 못해 화를 낼 때가 있는데, 수를 놓다 보면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해지면서 그땐 왜 그랬을까, 하고 돌아보게 되거든요.”

자수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 자수 장식이 발견되었으며,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은 가장자리를 자수로 장식한 의상을 즐겨 입었다. 자수가 가장 성행했던 17~18세기 프랑스 귀족 여성들 사이에선 드레스에 유명 화가의 그림을 수놓은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선 의상은 물론 가방, 구두 등 다양한 아이템과 인테리어 소품에 자수가 활용되고 있다.

“처음 자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자수는 클래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자수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또 젊은 분들이 청바지나 속옷 같은 아이템에 자수를 접목하는 걸 보면서 한계가 없다는 걸 느꼈죠. 바늘 꽂을 자리만 있다면 자수는 무엇이든 무궁무진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요.”

최근 프랑스 자수 붐이 일면서 자수를 배우는 이들의 면면도 다양해졌다. 아이들 옷에 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결혼하는 딸에게 직접 수놓은 티 코스터를 선물하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어서 등 자수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이유도 제각각이다.  

“공부를 엉덩이 싸움이라고 하는데, 자수도 오래 붙잡고 있는 분들이 잘해요. 처음 수업을 받는 분들 중에도 잘하는 분과 못하는 분이 계신데 그게 몇 번 바뀌고 뒤집히더라고요. 곰손이라고 걱정하던 분들도 애착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 몇 달 만에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걸 많이 봤어요. 저는 수를 놓는 건 바다에서 노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요. 얕은 바다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면서 놀면 재미있잖아요. 그러다 수영도 배우고 잠수도 익히면서 더 많은 즐거움을 찾게 되는 것처럼, 자수도 좋아하고 익숙해지다 보면 그 안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큰 즐거움을 얻게 되죠.”

사진 이상윤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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