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이재한(44)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멜로와 전쟁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멜로 영화로 기억되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그린 ‘포화 속으로’(2010)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서다.
최근 그를 인터넷 실시간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한 영화 ‘제3의 사랑’과 ‘인천상륙작전’은 반복의 ‘평행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제3의 사랑’은 한중 톱스타 송승헌과 류이페이가 각각 재벌 2세와 미모의 변호사로 등장해 애틋한 로맨스를 펼치는 멜로물. 내년 6월 25일 개봉될 예정인 ‘인천상륙작전’은 ‘테이큰’ 시리즈와 ‘쉰들러 리스트’ ‘러브 액츄얼리’ 등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으로 출연해 뜨거운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
9월 25일로 다가온 ‘제3의 사랑’ 중국 개봉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그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한 달 전 약속된 화보 인터뷰를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시간을 낸 그는 촬영 장소의 분위기에 걸맞은 세련된 슈트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레드카펫 위를 걸을 때처럼 멋지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실은 무척 어색한데 찍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애써 노력하고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배우들의 고충을 알 것 같네요(웃음).”
낭만에 대한 묘사가 남다른 감독
▼ 외모가 이국적입니다.
외국인들도 혼혈이냐고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외탁을 해서 그래요. 외가 식구들이 서구적으로 생겼거든요.
▼ ‘제3의 사랑’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많이 바쁘겠네요.
너무 바빠서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에요. ‘제3의 사랑’ 개봉 날짜가 당초보다 닷새 앞당겨져서 후반 마무리 작업이 급해졌고, 한국에서 ‘인천상륙작전’의 프리프로덕션 준비를 병행 중이어서 베이징과 서울을 정신없이 오가고 있어요. 부지런히 움직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소요 시간보다 덜 걸리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 ‘제3의 사랑’ 연출을 맡은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연출을 맡기 전 시나리오 초기 작업에 참여했어요. 중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라기에 독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1억 명이라고 하더라고요. 대한민국 인구의 두 배가 읽은 거죠. 중국에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데, 영화는 소설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니 재창조가 많이 이뤄졌어요. 그 시나리오를 중국 제작사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그동안 제가 연출한 영화는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해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죠.
▼ 남자 주인공 역에 송승헌을 적극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원래 남자 주인공 후보로 중국에서 인기 많은 한류 스타가 5명 정도 거론됐어요. 다들 로맨스와 어울리는 배우였지만, 트라우마로 고뇌하는 재벌 2세 역에는 송승헌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송승헌이라면 품격 있는 하이 클래스 멜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죠.
▼ 류이페이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아요.
남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타입이죠. 저는 류이페이도, 송승헌도 사랑합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합니다(웃음).
▼ 평소 멜로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가요.
감독은 예술의 많은 영역을 탐닉해야 하는데 물리적인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클래식과 재즈를 좋아해서 그 분야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고 다양한 종류의 책을 갖고 있지만, 그런 걸 즐기면서 영상 언어의 첨단을 걷는 영화, 뮤직비디오, 건축, 콘서트 등을 경험만 하고 다니면 영화는 언제 만들겠어요. 짬이 났을 때도 제가 좋아하는 공상과학영화부터 챙겨보다 보면 멜로나 로맨스물은 뒷전으로 밀려요.
▼ “멜로 영화를 잘 만든다” “낭만에 대한 묘사가 남다르다”는 평을 받아왔는데, 실전 경험이 풍부한 덕분인가요.
그럼 연쇄살인 영화를 만들려면 연쇄살인을 해야 하나요? 오히려 경험하고 싶은 열망과 욕망이 신선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거(소주)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속 대사) 같은 유치한 낭만이 관객에게 먹히는 거겠지요. 멜로 영화 하면 흔히 사랑 이야기를 떠올려요. 우산 속의 키스, 다리 위의 포옹 등등. 근데 저는 멜로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범죄 영화의 목표가 범인을 잡는 것이라면, 멜로 영화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는 관계의 굴레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로 2시간을 채우는 거죠.
“나를 성숙하게 만든 영화”
그가 처음 영화감독을 꿈꾼 건 12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 간 미국에서다.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낼 때는 이소룡을 좋아하고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소년 이재한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에서 “영화를 보며 눈이 열리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귀가 열렸다”고 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란 걸 12세 때 ‘스타워즈’를 보고 깨달았어요. 영화가 끝나면서 ‘리튼 앤드 디렉티드 바이 조지 루카스(Written&Directed by George Lucas)’라는 글씨가 화면을 크게 메웠는데 ‘리튼’은 알아도 ‘디렉티드’는 뭔지 몰랐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사전을 뒤져 디렉티드의 의미를 찾고 그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마음에 품었죠.”
하지만 대입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는 현실과 타협한다. “미래가 불안정해 결혼하기 쉽지 않고 보통 사람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영화감독의 길이 두려워서” 아버지의 바람대로 뉴욕대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간 것. 수학과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건축학이 적성에는 맞았지만 꿈을 포기하고 사는 삶은 그의 영혼을 지치게 했다. 결국 “영화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영화과로 전과한 그는 이후 미국 뉴욕의 인디 영화계에서 연출부, 촬영부, 조명부, 편집 기사 등으로 아르바이트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는 운 좋게 투자를 받아 감독 데뷔작인 ‘더 컷 런스 딥’(2000)을 크랭크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영화를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개봉했을까.
“촬영 후반 작업 비용이 없어서 한국 자본을 투자받았어요. 필름을 다 들고 한국에 와서 후반 작업을 마쳤죠.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면서 ‘한 편만 여기서 더 찍고 미국 LA로 돌아가자’고 한 게 지금까지 온 겁니다. 하하하.”
감독 데뷔 후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사요나라 이츠카’(2010), ‘포화 속으로’(2010) ‘제3의 사랑’(2015), ‘인천상륙장전’(2016) 등이 담겼다. 그는 이들 영화가 그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성숙의 정의가 나이 들어 주름살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성숙은 익는 겁니다. 지성과 감성 모두요. 영화 찍고 난 후 좀 더 아량 있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져졌을 때 제 자신이 성숙해진 걸 느낍니다. 영화 찍다 보면 상처만 잔뜩 받을 수 있는데 성숙한 지성과 감성은 그런 상황을 이겨내게 하죠. 사실 ‘포화 속으로’를 찍은 뒤 ‘첩혈쌍웅’ 리메이크작인 ‘킬러’라는 영화를 2년간 준비했어요. 오우삼 감독이 직접 제작을 맡았는데 엎어졌죠. 그때도 자칫 슬럼프에 빠질 수 있었지만 성숙의 힘으로 극복했죠(웃음).”
이 감독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은 “영화가 완성됐을 때”이며,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랑을 못 누리고 있을 때”라고 한다.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지 묻자 그의 낯빛이 환해졌다.
“얼핏 보면 시니컬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영화감독 지망생 시절 혈연, 지연, 학연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영화를 하겠다고 나서거나, 10~15년 후 제가 지금의 모습이 돼 있을 거란 믿음을 스스로 갖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 싱글 생활 청산하고 싶어
연내 출연진 캐스팅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포화 속으로’에 이어 그가 두 번째 만난 전쟁 영화다. 2월 감독 제의를 받고 기꺼이 수락한 그는 “멜로가 한가로운 육체에 불어닥친 마음속의 폭풍 같은 거라면, 전쟁 영화는 마음속의 화염 같은 것”이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소재로 한 스케일이 큰 작품을 맡아 신나면서도 어깨가 무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 리암 니슨은 감독님이 연출을 맡은 후 출연 결정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에이전시 CAA 소속이라는 점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나요.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어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된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리암 니슨이 출연을 결정하겠어요? 리암 니슨은 자신이 맡을 역할과 시나리오 내용, 감독의 역량을 중시하는 배우예요. 감독이 연출한 전작들과 어떻게 찍는지를 죄다 살펴보고 나서 출연하겠다고 한 거예요.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지만 아직 그와 만난 적이 없고, 사적인 친분도 없습니다.
▼ 팀 버튼 감독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봤는데, 할리우드 감독들과도 친분이 있나요.
에이전트를 통해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감독들이 있긴 한데 다들 자기 영화 만들기 바빠서 사석에서 어울리진 못해요. 저도 그런 처지고요. 대신 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는 두루두루 친해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로 만난 정우성과 ‘포화 속으로’에 출연한 빅뱅의 탑이 그런 친구들이죠.
▼ 일 없을 때는 어떻게 지내나요.
일이 없던 적이 없어요. 영화를 하지 않을 때는 CF나 뮤직비디오를 찍거든요. 최근작이 박진영의 ‘놀 만큼 놀아봤어’죠. 만날 일에 빠져 있어서 연애할 시간도 없었어요. 이제 사색은 그만하고 데이트를 좀 하려고요. 어머니가 저를 장가보내려고 서울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몇 번 선을 봤는데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답니다(웃음).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가끔 스트레칭을 하고 일요일마다 야구를 해요.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 소속인데, 제가 팀의 막내이자 나이 많은 루키여서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하하하.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제 나름의 건강 노하우죠. 스트레스는 해소하려고 하는 순간 더 큰 스트레스가 닥치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제가 도달하려는 목적지에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웃음).
이재한 감독은 싱글 생활을 청산하고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일복 많은 그에겐 녹록지 않은 소망이 될 듯하다. 중국인의 취향을 잘 알고 영어 소통이 원활한 그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 평가해 할리우드에서도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다음 스케줄을 선점한 까닭이다.
앞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인류애를 다루는 대서사극을 스크린에 펼쳐보고 싶다는 이재한 감독. 10년 후 그는 촬영 현장에서 여전히 ‘액션’ ‘컷’을 외치며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들과 행복한 여가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기를 바랐다.
“늦은 만큼 얼른 낳아서 키워야지요. 하하하.”
■ 턱시도협찬 · 로드앤테일러(02-515-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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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를 인터넷 실시간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한 영화 ‘제3의 사랑’과 ‘인천상륙작전’은 반복의 ‘평행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제3의 사랑’은 한중 톱스타 송승헌과 류이페이가 각각 재벌 2세와 미모의 변호사로 등장해 애틋한 로맨스를 펼치는 멜로물. 내년 6월 25일 개봉될 예정인 ‘인천상륙작전’은 ‘테이큰’ 시리즈와 ‘쉰들러 리스트’ ‘러브 액츄얼리’ 등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으로 출연해 뜨거운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
9월 25일로 다가온 ‘제3의 사랑’ 중국 개봉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그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한 달 전 약속된 화보 인터뷰를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시간을 낸 그는 촬영 장소의 분위기에 걸맞은 세련된 슈트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레드카펫 위를 걸을 때처럼 멋지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실은 무척 어색한데 찍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애써 노력하고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배우들의 고충을 알 것 같네요(웃음).”
낭만에 대한 묘사가 남다른 감독
▼ 외모가 이국적입니다.
외국인들도 혼혈이냐고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외탁을 해서 그래요. 외가 식구들이 서구적으로 생겼거든요.
▼ ‘제3의 사랑’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많이 바쁘겠네요.
너무 바빠서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에요. ‘제3의 사랑’ 개봉 날짜가 당초보다 닷새 앞당겨져서 후반 마무리 작업이 급해졌고, 한국에서 ‘인천상륙작전’의 프리프로덕션 준비를 병행 중이어서 베이징과 서울을 정신없이 오가고 있어요. 부지런히 움직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소요 시간보다 덜 걸리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 ‘제3의 사랑’ 연출을 맡은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연출을 맡기 전 시나리오 초기 작업에 참여했어요. 중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라기에 독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1억 명이라고 하더라고요. 대한민국 인구의 두 배가 읽은 거죠. 중국에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데, 영화는 소설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니 재창조가 많이 이뤄졌어요. 그 시나리오를 중국 제작사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거예요. 그동안 제가 연출한 영화는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해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죠.
▼ 남자 주인공 역에 송승헌을 적극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원래 남자 주인공 후보로 중국에서 인기 많은 한류 스타가 5명 정도 거론됐어요. 다들 로맨스와 어울리는 배우였지만, 트라우마로 고뇌하는 재벌 2세 역에는 송승헌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송승헌이라면 품격 있는 하이 클래스 멜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죠.
▼ 류이페이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아요.
남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타입이죠. 저는 류이페이도, 송승헌도 사랑합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합니다(웃음).
▼ 평소 멜로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가요.
감독은 예술의 많은 영역을 탐닉해야 하는데 물리적인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클래식과 재즈를 좋아해서 그 분야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고 다양한 종류의 책을 갖고 있지만, 그런 걸 즐기면서 영상 언어의 첨단을 걷는 영화, 뮤직비디오, 건축, 콘서트 등을 경험만 하고 다니면 영화는 언제 만들겠어요. 짬이 났을 때도 제가 좋아하는 공상과학영화부터 챙겨보다 보면 멜로나 로맨스물은 뒷전으로 밀려요.
12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 간 미국에서 영화 ‘스타워즈’를 보고 감독의 꿈을 품은 이재한 감독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연쇄살인 영화를 만들려면 연쇄살인을 해야 하나요? 오히려 경험하고 싶은 열망과 욕망이 신선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거(소주)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속 대사) 같은 유치한 낭만이 관객에게 먹히는 거겠지요. 멜로 영화 하면 흔히 사랑 이야기를 떠올려요. 우산 속의 키스, 다리 위의 포옹 등등. 근데 저는 멜로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범죄 영화의 목표가 범인을 잡는 것이라면, 멜로 영화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는 관계의 굴레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로 2시간을 채우는 거죠.
“나를 성숙하게 만든 영화”
그가 처음 영화감독을 꿈꾼 건 12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 간 미국에서다.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낼 때는 이소룡을 좋아하고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소년 이재한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에서 “영화를 보며 눈이 열리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귀가 열렸다”고 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란 걸 12세 때 ‘스타워즈’를 보고 깨달았어요. 영화가 끝나면서 ‘리튼 앤드 디렉티드 바이 조지 루카스(Written&Directed by George Lucas)’라는 글씨가 화면을 크게 메웠는데 ‘리튼’은 알아도 ‘디렉티드’는 뭔지 몰랐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사전을 뒤져 디렉티드의 의미를 찾고 그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마음에 품었죠.”
하지만 대입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는 현실과 타협한다. “미래가 불안정해 결혼하기 쉽지 않고 보통 사람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영화감독의 길이 두려워서” 아버지의 바람대로 뉴욕대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간 것. 수학과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건축학이 적성에는 맞았지만 꿈을 포기하고 사는 삶은 그의 영혼을 지치게 했다. 결국 “영화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영화과로 전과한 그는 이후 미국 뉴욕의 인디 영화계에서 연출부, 촬영부, 조명부, 편집 기사 등으로 아르바이트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는 운 좋게 투자를 받아 감독 데뷔작인 ‘더 컷 런스 딥’(2000)을 크랭크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영화를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개봉했을까.
“촬영 후반 작업 비용이 없어서 한국 자본을 투자받았어요. 필름을 다 들고 한국에 와서 후반 작업을 마쳤죠.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면서 ‘한 편만 여기서 더 찍고 미국 LA로 돌아가자’고 한 게 지금까지 온 겁니다. 하하하.”
감독 데뷔 후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사요나라 이츠카’(2010), ‘포화 속으로’(2010) ‘제3의 사랑’(2015), ‘인천상륙장전’(2016) 등이 담겼다. 그는 이들 영화가 그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성숙의 정의가 나이 들어 주름살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성숙은 익는 겁니다. 지성과 감성 모두요. 영화 찍고 난 후 좀 더 아량 있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져졌을 때 제 자신이 성숙해진 걸 느낍니다. 영화 찍다 보면 상처만 잔뜩 받을 수 있는데 성숙한 지성과 감성은 그런 상황을 이겨내게 하죠. 사실 ‘포화 속으로’를 찍은 뒤 ‘첩혈쌍웅’ 리메이크작인 ‘킬러’라는 영화를 2년간 준비했어요. 오우삼 감독이 직접 제작을 맡았는데 엎어졌죠. 그때도 자칫 슬럼프에 빠질 수 있었지만 성숙의 힘으로 극복했죠(웃음).”
이 감독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은 “영화가 완성됐을 때”이며,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랑을 못 누리고 있을 때”라고 한다.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지 묻자 그의 낯빛이 환해졌다.
“얼핏 보면 시니컬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영화감독 지망생 시절 혈연, 지연, 학연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영화를 하겠다고 나서거나, 10~15년 후 제가 지금의 모습이 돼 있을 거란 믿음을 스스로 갖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 싱글 생활 청산하고 싶어
연내 출연진 캐스팅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포화 속으로’에 이어 그가 두 번째 만난 전쟁 영화다. 2월 감독 제의를 받고 기꺼이 수락한 그는 “멜로가 한가로운 육체에 불어닥친 마음속의 폭풍 같은 거라면, 전쟁 영화는 마음속의 화염 같은 것”이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소재로 한 스케일이 큰 작품을 맡아 신나면서도 어깨가 무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 리암 니슨은 감독님이 연출을 맡은 후 출연 결정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에이전시 CAA 소속이라는 점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나요.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어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된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리암 니슨이 출연을 결정하겠어요? 리암 니슨은 자신이 맡을 역할과 시나리오 내용, 감독의 역량을 중시하는 배우예요. 감독이 연출한 전작들과 어떻게 찍는지를 죄다 살펴보고 나서 출연하겠다고 한 거예요.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지만 아직 그와 만난 적이 없고, 사적인 친분도 없습니다.
▼ 팀 버튼 감독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봤는데, 할리우드 감독들과도 친분이 있나요.
에이전트를 통해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감독들이 있긴 한데 다들 자기 영화 만들기 바빠서 사석에서 어울리진 못해요. 저도 그런 처지고요. 대신 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는 두루두루 친해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로 만난 정우성과 ‘포화 속으로’에 출연한 빅뱅의 탑이 그런 친구들이죠.
▼ 일 없을 때는 어떻게 지내나요.
일이 없던 적이 없어요. 영화를 하지 않을 때는 CF나 뮤직비디오를 찍거든요. 최근작이 박진영의 ‘놀 만큼 놀아봤어’죠. 만날 일에 빠져 있어서 연애할 시간도 없었어요. 이제 사색은 그만하고 데이트를 좀 하려고요. 어머니가 저를 장가보내려고 서울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몇 번 선을 봤는데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답니다(웃음).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가끔 스트레칭을 하고 일요일마다 야구를 해요.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 소속인데, 제가 팀의 막내이자 나이 많은 루키여서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하하하.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제 나름의 건강 노하우죠. 스트레스는 해소하려고 하는 순간 더 큰 스트레스가 닥치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제가 도달하려는 목적지에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웃음).
이재한 감독은 싱글 생활을 청산하고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일복 많은 그에겐 녹록지 않은 소망이 될 듯하다. 중국인의 취향을 잘 알고 영어 소통이 원활한 그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 평가해 할리우드에서도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다음 스케줄을 선점한 까닭이다.
앞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인류애를 다루는 대서사극을 스크린에 펼쳐보고 싶다는 이재한 감독. 10년 후 그는 촬영 현장에서 여전히 ‘액션’ ‘컷’을 외치며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들과 행복한 여가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기를 바랐다.
“늦은 만큼 얼른 낳아서 키워야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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