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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power_woman #interview

#날라리여학생 #운동권언니 #페미니스트 이정미 정의당 대표

editor 김지영 기자

2017. 12. 07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공언한 대통령에 이어 페미니스트 당 대표가 나왔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 얘기다. 2000년 정당 활동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 인생을 관통한 키워드는 ‘성평등’이었다. “부모와의 별거, 범상치 않은 학창 시절, 성차별이 만연한 노동 현장을 경험하며 여성 문제에 눈을 떴다”는 그를 ‘파워우먼 릴레이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로 만났다.

최근 정치인들의 여성 비하 발언과 각계의 성폭력 사건이 잇따르면서 ‘성평등’과 ‘페미니스트’가 우리 사회의 핫 키워드로 떠올랐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억압받는 객관적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후보 시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공약을 내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새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다. 

포스트 노회찬-심상정 시대를 이끄는 이정미(51) 정의당 대표도 당선 직후 “페미니스트 당 대표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대표는 정치인이 되기 전부터 여성과 약자의 인권 회복과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의 페미니즘은 운동권 시절에 싹텄다. 

이 대표는 198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1학년 때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듬해 대학을 자퇴하고 노동운동가로 나섰다. 1988년에는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인천광역시 주안5공단의 영원통신에 위장 취업했다. 당시 사내에서 왕따와 성희롱을 경험하며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선명해졌다고 한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건 2000년, 당시 권영길 전 의원이 창당한 민주노동당에 여성 문제 전문가로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역임한 그는 통합진보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과 최고위원, 진보정의당최고위원 등을 거쳐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정의당 비례대표 1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지난 7월 정의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후 여성과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페미니스트 당 대표’를 11월 1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늦었지만 당 대표가 된 소감을 여쭤볼게요.
심상정 대표 시절보다 당을 더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납니다. 당 대표가 된 후 줄곧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그 때문에 더긴장하며 최선을 다하게 돼요. 



그사이 당 대표로서 맞닥뜨린 현안은 어떤 겁니까. 
촛불 원년에 당 대표로 선출됐기 때문에 안전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받드는 모든 일이 현안이 됐어요. 특히 탈핵과 사드(THAAD ·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이슈는 새 정부의 개혁 방향이 후퇴한 경우라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어요. 파리바게뜨의 불법 고용 문제를 제기해 고용노동부의 시정 명령을 이끌어낸 것도 중대한 이슈였죠. 

포스트 노-심 시대의 계획 내지 목표는 무엇입니까.
‘정의당에 노회찬, 심상정만 있는 게 아니구나! 리더십이 굉장히 두툼하게 쌓여가고 있구나! 사람들이 많구나! 다음에는 한번 정권을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거요. 그게 제가 해야 할 큰 임무인 것 같아요. 진보 정치가 어려울 때 두 분이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당을 안착시키셨다면, 저는 정의당 자체를 크게 키우는 리더십을 발휘해 당의 집권 가능성을 보다 많은사람들에게 검증받고 싶어요. 

심상정 전 대표와 자매 같은 사이라고 들었어요.
민주노동당 때부터 동고동락해왔는데, 맏언니 같은 분이에요.그런 멋진 선배가 있어서 저는 굉장한 행운아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당 대표에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도 응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지금도 든든하게 지켜주신다는 느낌이 들어요.(심 전대표는 7월 당 대표 경선에 불출마했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위해 당 내에서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 노회찬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여야 관계를 진두지휘하고, 이 대표는 당내의 일을 총괄한다.) 

심 전 대표와 차별화된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큰 키? 하하하. 심 전 대표님은 겉으로는 굉장히 세 보이지만 내면은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요. 저는 겉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강한 면이 있어요. 외유내강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어떤 방향으로 갈지 결정을 하면 생각한 대로 밀고 가고, 의사 표현도 분명하게 해요.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지만, 결정하고 나면 흔들림이 없어요. 정계에 몸담은 18년 동안 힘든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한눈판 적이 없어요. 그런 면은 심 대표님과 닮은 점이죠(웃음).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뭔가요.
균형 감각요. 균형 감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기준이어야 하죠. 

성장 과정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별로 없더라고요. 
1966년 부산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있어요. 어머니는 2003년에 돌아가셨고요. 어머니가 저를 낳고 할머니에게 엄청 구박을 받으셨대요. 또 딸 낳았다고요. 그 때문에 젖먹이 때부터 저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태어나자마자 인천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죠. 그러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저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과 언니, 부모님이 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는데 집도, 남동생과 언니도 낯설었어요. 그 집에 적응을 못 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거의 자폐아같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출석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고, 시험도 만날 빵점 맞고요.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 그랬는데, 당시 어머니가 우연히 제 일기장 한 권이 죽고 싶다는 말로 채워진 걸 보고 큰일 났구나싶었대요. 그때부터 어머니가 저를 더 살뜰히 챙겨주셨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져 4학년 때부터 구구단을 외우고 공부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그럼에도 고등학교 때까지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금방 극복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부산에서 큰 물류 창고를 운영하셨어요. 제가 인천에 살다 부산에 내려갔을 때 집이 광장히 크고 좋았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여러 사업에 손을 대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어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다가 중학교 때 완전히 파산하면서 다시 인천 외할머니 댁에 얹혀살았어요. 

내성적인 성격이 지금처럼 활달해진 계기는요. 
고3 때 놀기 시작했어요. 소위 ‘날라리’였죠. 친구들이랑 카페에 주로 가다 학력고사가 끝난 뒤에는 디스코텍에서 놀았어요. 학교 앞 언덕에 디스코텍이 있었거든요. 거기가 신포동인데, 지금은 구도심이라 상권이 다 죽었지만 그때는 인천의 명동으로 통했어요. 한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디스코텍에 개근을 했는데 그러고 나니 재미가 없어져서 발길을 끊었죠. 노는 친구들을 쫓아다니며 살짝 물들기 시작할 때 대학에 갔는데, 제가 입학한1984년에는 화장을 하거나 장신구를 달고 다니는 새내기가 거의 없었어요. 당시는 취업 준비하면서 화장하는 법을 배우던 시절이었거든요. 당시 분위기와 다르게 저는 입학하자마자 화장하고 귀고리 달고 다녔는데, 학생운동을 하면서 스타일이 바뀌었죠. 학교 선배들에게 성실하다고 예쁨을 많이 받다 보니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고요(웃음). 

원래 꿈이 기자였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고3 때 친구들과 어울리며 활동적인 성향을 갖게 되니까 기자를 해보면 재미있고 신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운동을 하면서 진로가 바뀌었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것이 무엇입니까.
대학 1학년 때 과 선배에게 들은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요. 그때부터 제 삶이 바뀌었어요.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느냐 하면 아예 대학을 자퇴한 뒤 노동운동에만 집중하게 됐을 정도죠. 

노동운동을 하려고 대학을 자퇴하신 거네요.
그렇죠.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가두시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5일간 구류를 살고 나왔더니 어머니가 “학교를 계속 다닐지, 데모를 계속할지 한 가지를 정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하고 1년을 휴학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어머니가 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고요. 휴학 중에 한 구두약회사를 다녔는데,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그때 노동운동을 계속해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생겼죠. 

이 대표가 ‘1988년 영원통신에 다닐 때 왕따와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여성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사실인가요. 
왕따와 성희롱을 견디지 못해서 노동조합을 만든 건 아니에요. 애초에 ‘노동 현장에서부터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노동자들이 노동법에 정해져 있는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부당한 근로조건을 바로잡아 나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회사가 저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본 거죠. 그냥 돈이나 벌려고 온 애가 아닌 것 같으니까 계속 부서를 이동시키고, 멀리 심부름 보내고…. 부서 회식을 갔다 오는 차 안에서 과장이 저를 덮치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다 저를 못 견디게 해서 스스로 나가도록 하려고 그런 거였더군요. 그런 일을 겪은 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 노동자들과 노조를 결성했는데, 이후 6개월 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저를 해고하고 노조원들을 회사에 못 들어오게 했거든요.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면 구사대들이 와서 폭력을 가했죠. 6개월 동안 아침마다 얻어맞고 병원 실려 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어요. 회사 앞이 바로 경찰서였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0년 민주노동당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질 무렵 우리 사회에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그래서 저도 당원으로 가입했는데, 2003년 권영길 당 대표 시절 당내에서 여성 할당이 필요하다고 여겨 마땅한 인물을 찾다가 제게 연락을 해왔어요. 마침 여성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때여서 당의 제의를 수락했죠.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 할당제가 필요하다는생각에서요. 

정치인으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2012년 있었던 ‘통진당 사태’(제19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2012년 3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경선부정 의혹이 제기돼 같은 해 5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정 공동대표가 강령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순간, 당권파가 단상을 점거하고 비당권파인 유시민 공동대표 등을 구타한 폭력사태)요. 그게 저한테는 인생 최대의 슬픔이었어요.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태 이후 정의당을 만든 거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는나라니까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진 않아요. 다만 그분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건 진보주의자로서 용납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리 진보의 가치가 본인에게는 소명이고 옳다고 해도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폭력까지 동원했다면, 그것은 제가 꿈꾸는 진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저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분들이 나와서 만든 당이 정의당이에요. 진보 정당을 포기하지 않고 당을 만들 때 목표를 굳건히 하고 다시는 실패하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지금 정의당이 외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한 건 아니지만 어떤 정당 못지않게 하나씩 목표를 다질 수 있었어요. 이 당을 통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한 것이 저한테는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힘들 때는 어떻게 견뎌냅니까.
얼마 전 비정규직 노동자 총회에 갔어요. 한라그룹 계열 자동차용 센서 업체인 만도헬라 생산 공장이 관리자 빼고는 100% 비정규직인 회사였는데, 제가 국정감사 때 치열하게 다퉈 불법 파견 판정을 받아냈죠. 그것을 발판으로 이번에 모두 정규직화가됐어요.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노동자들과 함께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고 서로 격려하면서 보람을 느꼈어요. 그런 힘으로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겨왔던 것 같아요. 

요즘 정의당에 대한 색깔론 공격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에요.
종북 색깔론은 전 정부에서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해 만든 프레임이기 때문에 이제는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해요.그게 촛불 집회 이후의 큰 변화 중 하나죠. 보수 진영에서도 반공 색깔론이 안 먹힌다고 느끼기 때문에 요즘은 동성애라든가 젠더 이슈로 공격 포인트를 바꿨더라고요(웃음). 

동성애를 찬성하는 건가요, 인정하는 건가요.
인정하는 거죠. 비록 소수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해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을 보장해줘야 마땅하고요. 그런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정의당이 좀 더 과감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 대표로서 현 정부의 잘한 정책과 아쉬운 정책을 꼽는다면요.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 적폐 청산에 속도를 내는 것이 굉장히 좋은 점수를 받았더라고요. 저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요. 특히 과거 노동 적폐라고 지적받던 노동정책들을 시정해나가는 일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조세정책은 미적거린다는 인상을 주고 있어요. 아주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증세를 해서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하는데 그런 ‘핀셋 조세’로는 현 정부가 5년 동안 추진하고자 하는 복지정책을 10분의 1도 실현할 수 없어요. 피부에 와 닿는 복지정책이 미흡한 실정이어서 아쉬워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단축 등이 기업의 경제활동을 어렵게 만들고 고용시장을 더 위축시킨다는 우려의목소리도 있습니다.
기업에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양극화와 불평등이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도 사실이에요. 책임 분담이 절실한 상황이고, 이는 양극화를 불러온 소수 기득권 쪽에서 나눠 지는 게 맞다고 봐요. 기업이 좀 부담이 되더라도 경제 성장의 과실을 고루고루 나누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구성원들도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기업도 좋은 이미지로 가치를 높여 경제 시장의 선순환이 활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 부담으로 파산하게 되면 일자리가 더 줄어들 텐데요.
최근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비용이 인건비라고 답한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2%였어요. 자영업자들에겐 임대료가 가장 큰 부담이에요. 중소기업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요소도 인건비가 아닌 원청으로부터의 불공정 거래로 나타났고요. 가장 힘든 순으로 해결해야지, 반대로 접근하면 양극화가 심해질 수 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국가도 없고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 정부의 여성정책과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이제 시작 단계고 아직 가시적으로 드러난 면이 많지 않은데, 앞으로 잘해주기를 원해요.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에 거는기대가 커요. 거기서 남녀 임금 격차 해소에 박차를 가했으면좋겠어요. 독박 육아 문제를 해결할 공공시설을 많이 만들고, 정의당이 슈퍼우먼방지법을 통해 강조해 온 아빠육아휴직제도가 정착되도록 권장해나가야 해요. 20대 여성들이 안고 있는 신종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서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석기 전 의원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건 진보주의자로서용납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리 진보의 가치가 본인에게는 소명이고 옳다고 해도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폭력까지 동원했다면, 그것은 제가 꿈꾸는 진보와 같은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지난해 12월 28일 시민들과 함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무효화를 촉구하고 있는 이정미 대표.

지난해 12월 28일 시민들과 함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무효화를 촉구하고 있는 이정미 대표.

여성 비하 논란이 있었던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선임행정관에 대한 평가는요.
개인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정부의 성격과 방향에 걸맞은 사람인가 하는 관점으로 볼 때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요 대통령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몰라도, ‘여성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런 의사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많은 여성이 상처 받을 수 있거든요.

연애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요.

왜 없겠어요. 그 기억을 간직하고 살지 않아서 그렇죠(웃음). ‘나이가 많은데 혼자사는 것’에 대해 관심들을 갖는데, 사실 제가 결혼 생활을 4년 정도 하다 이혼했어요. 아주 어릴 땐 아니고30대 중반에요.

자녀는 없나요.

예.

왜 헤어졌는지요.
더 이상 결혼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신뢰와 사랑이 깨지면 이혼하는 거죠.

엄마 같은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국민을 자괴감에 빠지게 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공감 능력은 정치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인데 박 전 대통령에겐 그것이 결여돼 있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죠. 결혼이나 출산 경험이 없어서는 아니고 인간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심을 가지려고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스스로 ‘페미니스트 당 대표’라고 천명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 젠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전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냥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여성 대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실제 그삶을 해결해나가는 당 대표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거예요. 페미니즘은 성평등에 방점을 두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가부장제가 우리 사회를 굉장히 오랫동안 지배해왔기 때문에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한 번 더 뒤집어서 보게 되면, 남성과 여성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점에서 합의를 이뤄갈 수 있는지도 답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당 대표로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과제는 뭔가요.

내년에 치를 지방선거요. 정의당은 현재 전국에 1백 곳 정도의 지방 조직이 있어요. 그곳에서는 기초단체장 후보로 한 명씩이라도 나가 몇 석이라도 얻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도록 당을 이끄는 것이 지금 제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예요. 아울러 지금의 선거제도를 바꿔서 민의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유권자가 겪는 문제가 국회에서 다뤄질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고 싶어요. 당 대표를 뽑는 경선에서 내건 임기내 ‘청년 정의당’을 만들겠다는 공약도 당연한 과제입니다. 청년정의당은 자기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를 청년 시기부터 키워내기 위한 당내 조직이에요. 이는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꼭 필요해요. 청년,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가 대표성을 갖고 의회에 진출하도록 돕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죠. 누구나 편견 없이 꿈꾸고 도전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게요.

취업난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주고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격려라기보다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자신의 문제는 누가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무기를 가져야 한다. 청년들의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이제는 본인들이 싸워나가야 한다”고요.

정의당에선 언제쯤 대통령이 나올까요.

10년 정도 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하.

photographer 조영철 기자 designer 김영화
사진제공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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