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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Drinkology

가향 원두, 스페셜티커피의 진보 or 퇴보?

오홍석 기자

2022. 11. 11

큰맘 먹고 평소 2배 가격을 주고 핸드드립커피를 주문했다. 그러나 오묘한 뉘앙스에 고개를 갸웃한다. 커피 애호가라면 겪어봤을 법한 상황이다. 최근 선명하고 뚜렷한 향미의 가향 원두가 스페셜티커피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커피 업계에서 일고 있는 첨예한 논쟁을 짚어봤다. 

얼마 전 흥미로운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원두 이름은 콜롬비아 캄포 헤르모소 골드워시드 IPA 핑크버번. 이름에 IPA(India Pale Ale)가 들어가는 이유는 두 번의 숙성 과정 중 두 번째 단계에 IPA 맥주 효모를 첨가해서다. 입에 들어온 커피의 맛은 라임 산미가 도드라졌고 후미에 맥주 향이 올라왔다. 이 대목에서 피식 웃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아니 무슨 커피에서 라임, 맥주 맛이 나지?’라고 생각하며.

최근 독특한 방식의 가공을 통해 첨가한 향과 맛을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가향 커피가 급속히 늘고 있다. 냄새를 잘 빨아들이는 커피 원두의 특성을 이용해 과일이나 럼, 와인 배럴 속에서 원두를 숙성시킨 것. ‘가향 커피’라는 명칭도 커피 원두에 다양한 향을 첨가했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최근에는 복숭아, 크랜베리, 피나콜라다 향이 첨가된 커피 원두들까지 시장에 등장하고 있다. 가향 커피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커피 업계에서는 누가 더 새로운 가향 커피를 누가 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뜨거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가공 전쟁’이 발발한 것.

COE 10등 원두가 낙찰가 1등으로

인위적으로 향을 첨가한 가향 원두는 커피 업계 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왼쪽). 가향 원두는 기후변화와 농장의 이익 추구, 추적 가능성 등 다양한 이슈로 엮여 있다.

인위적으로 향을 첨가한 가향 원두는 커피 업계 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왼쪽). 가향 원두는 기후변화와 농장의 이익 추구, 추적 가능성 등 다양한 이슈로 엮여 있다.

가향 원두가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의 커피 생산국은 홍보를 위해 매년 그해에 생산된 커피로 경연 대회를 연다. 이 대회를 ‘COE(Cup Of Excellence)’라고 부른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거쳐 순위가 매겨진 커피들은 대회 종료 6주 후 온라인 경매에 올려진다.

2018년 콜롬비아 COE에 ‘엘파라이소 리치’라는 커피가 출품됐다. 엘파라이소 리치는 이중 무산소 발효라는 가공을 거쳐 리치와 복숭아 향을 극대화했다. 이 독특한 향미의 커피는 대회에서 10등을 기록했는데, 이후 진행된 경매에선 1등을 제치고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되며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가향 원두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여러 농장이 경쟁하듯 고유의 가공 방식을 고안해 생산한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커피의 맛과 향의 범주를 넘어서는 커피들이 시장에 쏟아지자 커피 업계 내에서 가향 원두를 스페셜티커피로 볼 것이냐는 논쟁이 촉발되기에 이른다. 쟁점은 크게 2가지다.



우선 인공적인 가공 방법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스페셜티커피는 자연적인 떼루아(기후, 고도, 토양 등을 포함한 재배 환경)에 의해 원두의 맛과 향에서 차이가 발생하는데, 가향 커피는 인위적인 가공 방법을 씀으로서 ‘떼루아에 의한 차별화’라는 스페셜티커피의 기본 취지를 희석시킨다는 것.

두 번째는 퀄리티 보장을 위한 생산 과정 추적 가능성의 문제다. 스페셜티커피 업계에서는 그간 품질 보장을 위해 산지 정보와 가공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왔다. 그러나 가향 커피를 생산하는 농장들은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또는 명확한 이유 없이 가공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세계적인 스페셜티커피 시장이 형성된 한국에서도 가향 원두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의견은 판이하다. 2019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우승한 전주연 모모스커피 대표는 2022년 6월호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가공도 떼루아의 일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물을 생산하던 농장이 이듬해 가보면 기후변화로 농사를 망친 경우를 여럿 봤다. 새로운 가공법은 기후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농장이 고안해낸 생존 방식”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전 대표의 말대로 커피는 기온에 극도로 예민한 작물이다. 산지를 다녀온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현재 산지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의 변화로 수확량과 품질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지금 추세로 지속된다면 아라비카 품종이 2050년 멸종할 것”이란 비관적인 예측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아라비카 품종은 세계 커피 소비량의 70%를 차지하며, 소비자들이 일상에서 가장 자주 소비하는 품종이다.

박근하 프릳츠 대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가향 원두가 등장한 배경에 대해 “농장은 면적에 비례해 매출이 고정돼 있어 사업 확장이 어렵다. 추가적인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편이 필요했고, 그렇게 고안한 게 다양한 가공 방식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가향 커피는 농장주들에게는 열심히 생산한 작물로 다양한 실험을 해봐야 하는 리스크가 있는 도전이다. 결국 결정은 소비자의 몫”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2020 코리아바리스타챔피언십(KNBC) 우승자 방현영 파스텔커피웍스 대표는 업계에서 가향 커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대표적인 반대론자다. 그는 기자에게 가향 원두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가향 원두는 스페셜티커피의 본질을 위협한다. 가공 방식을 공개하지 않으면 낮은 품질의 원두에 인위적인 향을 입혀 고급인 양 판매하는 사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사례가 여러 차례 발견되기도 했다. 질 낮은 소고기에 트러플오일을 발라 품질을 속이는 행위와 비슷하다. 열심히 땀 흘려 수확한 커피가 인위적인 향을 입힌 저품질 커피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어떤 농부가 우수한 원두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겠나. 품질이 본질인 스페셜티커피의 핵심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향 원두 판매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는 가향 원두, 어떻게 해야 하나

가향 원두에 부정적인 방현영 바리스타조차 “가향 원두는 업계에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됐다”고 말한다. 그의 바람은 가공 과정의 철저한 검증과 인위적인 향을 입힌 원두가 고품질을 의미하는 ‘스페셜티’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카페에서 주문한 스페셜티커피에서 전문가가 제공한 컵노트의 맛을 그대로 느낀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오묘함이 커피의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소비자들의 심리적인 장벽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가향 원두의 강력함은 ‘파인애플’이라고 적힌 커피에서는 정말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파인애플 맛이 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개인적으로도 스페셜티커피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소개할 때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적지 않다. 신규 소비자의 장벽을 낮출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일 것이냐, 엄격함을 추구할 것이냐. 커피 업계는 현재 갈림길에 놓여 있다.

#가향원두 #스페셜티커피 #드링콜로지 #여성동아


오홍석의 Drinkology
마시는 낙으로 사는 기자. 시큼한 커피는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대 안 가리고 찾는다. 술은 구분 없이 좋아하지만 맥주와 위스키를 집중 탐닉해왔다. 탄산수, 차, 심지어 과일즙까지 골고루 곁에 두는 편. 미래에는 부업으로 브루어리를 차려 덕업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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