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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star #interview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를, 김희애

HER STORY

EDITOR 김명희 기자

2018. 07. 09

유아인과의 진한 멜로로 찬사를 받았을 때 배우 김희애의 연기 인생은 정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특급 칭찬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배우 김희애(51)는 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연예계에 데뷔해 30년 넘게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으로 살아온 그녀다. 자신이 출연한 화장품 광고의 ‘놓치지 않을 거예요’라는 카피처럼 변함없는 외모와 몸매로 부러움을 산 김희애의 굴욕 없는 우아함은 재벌(드라마 ‘마이더스’)일 때도, 형사(드라마 ‘미세스 캅’)일 때도, 평범한 엄마(영화 ‘우아한 거짓말’)일 때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공식과 같았다. 이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누군가의 첫사랑(영화 ‘쎄시봉’),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아내의 자격’), 심지어 열아홉 살 연하남과의 멜로(드라마 ‘밀회’)까지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는 그간의 이미지에 가려졌던 김희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김희애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도와 관부재판을 이끈 사업가 문정숙을 연기했다. 관부재판은 10명의 원고단과 13명의 변호인이 뭉쳐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을 오가며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한 소송 사건이다. 부산 바닥을 휘어잡던 걸출한 사업가 문정숙은 자신의 재산을 헐어 재판 비용을 대고 일본 법정에 서서 할머니들 증언을 통역한다. 그녀가 이 일에 뛰어든 이유는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그녀의 말은 과거의 아픔을 잊거나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안긴다. 

문정숙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김희애는 체중을 5㎏ 이상 늘렸고 얼굴에는 주름을 그리고 쇼트커트에 흰머리도 만들었다. 파격 변신은 외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업가로 잔뼈가 굵은 문정숙의 걸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차진 부산 사투리와 완벽에 가까운 일본어는 그녀가 캐릭터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준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영화를 본 소감이 어땠는지 물었다. 밤새 시험공부를 하고 성적표를 기다리는 학생 같았다. 이 자리를 빌려 답하자면,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은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물론이고 한국 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주목할 만한 여성 캐릭터다.

영화를 보면서 ‘진검승부’란 단어가 생각났어요. 여기서 김희애 연기 인생의 승부를 보겠다, 그런 각오가 전해졌달까요. 

하하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올 게 왔구나’ 싶었어요. 할머니들의 가슴 아픈 스토리, 그리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 문정숙이라는 인물이 할머니들을 마음을 다해 돕는 과정이 와 닿아서 출연을 결심했는데, 작품을 하면 할수록 제가 역사에 너무 무지했구나 싶어서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 진심을 담아 연기했던 것 같아요. 그게 영화의 실존 인물들과 관객들, 그리고 귀한 작품에 저를 선택해준 분들에 대한 예의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각오로 작품에 임했다면, 촬영을 마치고 나서의 느낌도 다른 때와는 좀 달랐을 것 같아요. 

제 연기 인생에 큰 강 하나를 건넌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나던 날 처음으로 분장실에 들어가서 울었어요.연기 생활을 꽤 오래 했는데 ‘지금까지 나 뭐 한 거지?’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고, 허탈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 모든 감정이 섞여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나 봐요.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이 문정숙의 실제 모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사실 저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을 업으로 하는 배우에게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거든요. 관부재판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있었는데, 김문숙 선생님은 그런 것에 굴하지 않고 불의에 당당하게 맞선 분이세요. 그분이 처음부터 투사였거나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면 거리감이 있었을 텐데, 평범한 인물이 할머니들의 사연을 알아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에서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 연습량이 엄청났을 것 같아요. 

촬영 초반에 저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만족을 못 하시고 자꾸 “한 번 더” “한 번 더”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제 대사를 녹음해서 들었는데,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정말 이건 아니다. 이러다 바닥이 다 드러나겠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부산 지역 지인들을 총동원해 밤낮으로 통화하며 사투리를 익혔고, 일본어도 한 글자씩 발음과 억양을 교정했죠. 제 생각엔 일본어 대사 분량이 영화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은데, 편집된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겠어요(웃음). 밤새 대사를 외워 가면 감독님이 현장에서 바꾸는 바람에 더 힘들었죠. 얼마나 야속하던지(웃음). 

이번 작품에선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였어요. 외모 욕심을 내려놓는 것 자체가 배우에겐 큰 도전 아닌가요. 

실제 저보다 나이 많은 분을 연기하는 거라 주름이나 다이어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편하고 자연스럽고 좋았어요. 의상도 과거 기록에 나와 있는 김문숙 선생님의 실제 모습을 많이 참고했어요. 선생님이 늘 스카프를 매시고 과감한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하셨더라고요. 그야말로 멋쟁이셨어요. 

이번 작품에 출연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 경력을 합하면 2백 년이라고 하더라고요. 선배 배우들과 작업한 소감은 어떤가요. 

현장에서 늘 ‘선배님’ 소리를 듣다가 오랜만에 막내로 돌아왔는데, 함께 출연한 선생님들이 의지가 되고 좋았어요. 함께하는 동안 동지애도 느낄 수 있었고요.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선생님 모두 제가 존경했던 분들이고 워낙 프로들이시라 현장에서 합을 맞출 때는 마치 수능 시험장에 들어선 기분이었어요. 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알고 보니 선생님들도 같은 마음이셨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다들 탈진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올해로 데뷔 35년째예요.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싫증 나거나 힘들 때도 있는데, 어떠세요. 여전히 연기가 고픈가요. 

그렇진 않아요. 시나리오를 주시면 감사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받으면 재미있고, 연기가 천직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를 찾는 사람이 없다면 억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매순간 최선을 다해 왔기에 이제 그만둔다 해도 미련도, 여한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도 이순재 선생님이나 나문희 선생님 같은 분들을 뵈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멀구나’란 생각을 하게 돼요. 항상 새롭고 자기 관리도 철저하시거든요. 후배 배우들의 수명을 늘려주시는 것 같아 감사하고, 존경스럽죠. 

촬영이 없을 땐 주로 뭘 하세요. 

너무 바빠요(웃음). 실내자전거 타기나 스트레칭 같은 운동도 하고, 또 제가 스스로에게 준 숙제가 있어요. 오래는 10년에 걸쳐서 하는 것도 있는데, 오는 10월에 그중 한 가지가 끝나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거창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저는 너무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남들이 예전에 다 했던 걸 이제 하는 거예요.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어떤 일인지 궁금한데요. 

아유, 별거 아니에요(웃음). EBS로 토익 공부를 하는데 어디 가서 공부한다는 말씀을 드리기 조심스러워요. 영어로 말해보라고 할까 봐요(웃음). 하루가 다르게 기억력이 떨어지는 나이에 영어를 배워서 뭐 할까 싶기도 하지만 강사님 말씀으론 수업을 듣는 분들 중에 예순, 일흔 된 어르신들도 많대요.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아기죠. 

자녀들이 공부하는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나름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아들 둘을 두고 있는데, 영어 공부를 하다가 가끔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물어보기도 해요. 제대로 대답해준 적은 없지만, 꼭 문제를 풀어야만 맛인가요. 아이들이 엄마를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것 자체로 고맙고, 그런 것들이 계기가 돼서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아요. 

뭔가를 배우거나 취미를 갖는 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신 건강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럼요. 제가 피아노도 배우는데, 어쩌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되게 좋아요. 이 나이에 건반을 뚱땅거리고 있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요. 인생 뭐 대단한 거 있나요. 그렇게 짬짬이 시간 내서 한 것들이 쌓여서 실력이 되고, 그 과정에 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며 사는 거죠. 취미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멘탈도 건강해진 것 같아요. 

차기작은 정해졌나요. 드라마 ‘밀회’ 같은 멜로 제안이 들어온다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저도 궁금해요. 데뷔할 때 이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줄 꿈에도 몰랐던 것처럼 행운이 주어져서 앞으로 오래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고 기적일 것 같아요. 선배님들이 열심히 길을 닦아놓으셨으니 저도 후배들을 위해서 더 노력해야죠.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YG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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