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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SHE

저는 미스코리아 장윤정이에요

16년 만의 인터뷰 | 이제 배우, 정치인의 아내로 시작해요

글 · 정희순 | 사진 · 지호영 기자 | 디자인 · 김영화 | 장소협찬 · 라쏨(02-517-0078)

2016. 01. 28

1987년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후 이듬해 미스유니버스 2위라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미녀, 1990년대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MC로 활약하다 1999년 홀연히 연예계를 떠났던 스타. 방송인 장윤정(46)이 긴 공백기를 깨고 영화 (가제)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해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춘 지 꼬박 16년 만이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은 이번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오랜만의 복귀치곤 신고식이 화려하다. 블랙 슬랙스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늘씬한 몸매와 환한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눈빛만큼은 전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이기에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 김상훈(61) 씨를 만나 큰아이를 낳고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정착했다. 이곳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전통적인 부촌으로, 재작년에는 차인표·신애라, 손지창·오연수 부부가 자녀 교육을 위해 정착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2년 전,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 남편의 고향인 경북 구미에 둥지를 틀었다. 나이 마흔 중반에 맞이한 또 다른 시작이다.   
“처음엔 아이들 걱정이 컸어요. 미국과는 다른 환경에 적응은 잘할까, 학교에서 친구들은 잘 사귈 수 있을까…. 다른 엄마들과 똑같은 고민을 했죠. 걱정이 많았는데 아이들은 한국 생활이 정말 행복하대요. 미국에 살 때보다 훨씬 친구도 많아졌다면서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연예계를 주름잡았던 스타는 어느새 두 아이를 둔 엄마가 됐다. 현재 그녀의 큰딸 효원(15)은 서울에 소재한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고, 둘째 효진(10)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그녀에게 두 딸은 자식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가족이 함께 지낸 공간이 낯선 미국 땅이었기에 그 애틋함은 남들보다 더하다.  
“큰딸은 외모며 성격이 제 판박이고, 작은아이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이 아빠를 꼭 닮았어요. 아이들이 어릴 땐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줘야지’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다 컸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얼마 전엔 아이들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줬는데 큰아이가 그 반찬을 다시 집어 제 밥 위에 ‘턱’ 하고 올려놓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도 이제 엄마를 챙겨줄 나이가 됐잖아?’ 하더라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작은 일인데 괜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미국에서 찾은 진짜 장윤정

열일곱. 그녀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도전장을 내민 나이다. 지금에야 어린 친구들이 ‘아이돌’이라는 이름으로 우후죽순 데뷔식을 치르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열일곱의 나이는 상당히 어린 축에 속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어렸죠. 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고 닥치는 대로 일만 했으니까요. 원래 겁도 많고 소심해요. 연예인이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죠. 그땐 지금처럼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없을 때라 헤어와 메이크업부터 의상 준비까지 전부 다 스스로 해야 했어요. 제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던 것 같아요.”
한 차례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톱스타가 받은 타격은 일반인보다 더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세간의 관심은 참 견디기 버거웠다. 힘든 시기를 겪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특수화물 물류 전문업체 (주)동특을 운영하던 사업가 김상훈 씨다.
“남편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예요. 연애할 땐 둘이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말 한마디 없이 한 시간 동안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헤어진 적도 있죠. 청혼도 특별히 안 했어요. 그런데 알면 알수록 편안한 사람이더라고요. 앞뒤가 다르지 않고 가식이 없죠. 살갑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직하게 곁을 지키는 모습이 멋지게 느껴졌어요. 한결같은 모습의 남편을 보면서 ‘믿고 의지해도 되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2002년엔 큰딸 효원을 낳았고 2004년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톱스타’라는 특권을 떼고 진짜 장윤정의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어바인 지역에는 한인 마켓 하나 없을 정도로 한국인이 드문 곳이었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큰아이 둘러 업고 남편 손을 잡고 떠난 거였죠. 한국에서 살 땐 시장에서 장을 본 적도 없었고, 은행에서 계좌를 열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살려고 하니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남편과도 투닥투닥 다퉜죠. 연애할 땐 바쁜 시간 쪼개가며 싸웠었는데 미국에선 24시간 붙어 있었으니…. 더 이상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웃음)”
미국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는 보통 엄마들처럼 아이들 학교에 나가 봉사활동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요가도 배웠다. 평범함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었다. 외향적인 성격의 남편 덕에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사람들을 아우르고 모임의 리더가 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문득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장윤정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딸들은 제가 왕년에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걸 잘 몰랐어요(웃음). 친구 엄마들이 ‘너희 엄마 이런 사람이었던 것 아니?’ 하고 먼저 물어보니까 그제서야 알게 된 거죠. 한편으론 제 마음속에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미스코리아 후배인 김성령, 고현정, 오현경 씨는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잖아요. 내심 부러웠죠.”
그리고 그녀는 남편에게 ‘복귀’를 선언했다. 연예계에 다시 컴백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의 첫 반응은 “왜?”였다.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거냐며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확고했다. 두렵다고 물러서는 게 아니라 도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이제는 장윤정의 모습을 찾고 싶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처음엔 반대하던 남편도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돌아와 컴백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차근차근 연기 수업도 받았다. 신인의 마음으로 임하겠다는 일종의 각오였다. 1990년대에 CF 모델, 라디오 DJ, 쇼 프로그램 MC 등으로 방송가를 주름잡았던 그녀지만 막상 컴백을 앞두고는 걱정이 앞섰다. 세월이 흐른 만큼 환경도 많이 바뀌었고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꼬리표도 그녀 입장에선 큰 벽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영화다. 영화 속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해 연기를 하다보면 연예계를 떠나 있는 동안의 삶 속에서 느낀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 수업을 받으며 알게 된 지인을 통해 이창열 감독을 소개받았고, 그렇게 만난 작품이 올 상반기에 개봉을 앞둔 영화 이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인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더라고요.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영화 촬영장에서 저 엄청 떨었어요(웃음). 첫 신을 촬영하는데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사실 제가 방송만 많이 해봤지, 영화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제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니 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해요. 지난 여름엔 영화 시나리오의 합을 큰아이와 함께 맞춰봤어요. 큰딸도 학교에서 드라마 수업을 받고 있는데, 저도 딸의 대본 리딩을 도와줬죠.”  



‘아내’라는 이름으로  남편 응원

지난해 말께, 이번엔 남편이 ‘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제18대 대선 당시 남편이 새누리당 재외선거대책위원회 유세단장으로 활동할 때만 해도 그녀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라고만 생각했지 직접 선거판에 뛰어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보통 ‘정치인의 아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저는 남편 내조를 퍼펙트하게 하는 현모양처도 아니었으니 겁이 덜컥 났어요. 제가 연예계에 복귀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더라고요(웃음). 결국 ‘그래, 남편도 나를 지지해줬는데 나 역시 그래야지’하는 생각으로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남편의 출마 선언으로 덩달아 그녀도 분주해졌다. 요즘 그녀는 경북 구미을 지역을 돌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에 7~8곳 정도를 돌아다닌 날이면 저녁 무렵엔 파김치가 된다.
“남편의 선거운동에 도움이 될까 싶어 마을에서 열리는 신년회에 가서 마을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렸어요. ‘안녕하세요. 장윤정입니다!’하고요. 그런데 반응이 ‘에이, 장윤정 아닌데?’가 대부분이었어요. ‘어르신, 트로트 가수 장윤정이 아니고요. 예전에 미스코리아였던 장윤정이에요’하고 한참 제 소개를 했죠.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럼 노래 한 곡 해봐’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이제부터 노래 연습도 좀 해야 하려나 봐요.”   
그녀는 요즘 ‘공동체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지역을 돌아보며 생각보다 공동체 모임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재미지’ 싶은 생각도 든다. “마을센터에서 하는 요가 클래스가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다”며 조만간 회원 등록을 할 참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하는 건 ‘진심으로 하자’예요.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웃으면서 내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 그게 진짜는 아니잖아요. 더 이상 저는 옛날의 ‘톱스타 장윤정’이 아니에요. 관계의 소중함을 알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줄 아는 ‘인간 장윤정’이죠.”
그녀의 복귀작은 개봉을 앞두고 있고, 남편의 도전 역시 곧 결과가 나온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화려하게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 장윤정이 어떤 봄을 맞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걸음을 내딛은 그녀의 겨울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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