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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behind atelier

김택상 포스트 단색화가 "서구의 모노크롬과 단색화는 다르다"

이진수 기자

2022. 11. 08

지난 9월에 열린 세계 3대 아트 페어 ‘프리즈 서울’에서 기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리안 갤러리’. 차갑고 맑은 다홍 계열의 변주 그림이 갤러리 부스 안으로 발길을 잡아당겼다. 물 머금은 빛을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김택상 단색화가의 작품이다.



‘단색화(dansaekhwa)’, 한 가지 색 혹은 비슷한 톤의 색을 사용해 한국의 미학을 담은 그림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한 추상화 경향을 가리키는 미술 용어. 하나의 색으로 평면을 표현하는 서구의 ‘모노크롬 페이팅(monochrome painting)’과 닮아 ‘한국의 모노크롬’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동서양은 엄연히 출처부터 다르다. 단순 ‘미니멀리즘’ 아트가 아닌, 단색화라고 정확히 명칭해야 하는 이유다.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 1세대 단색화가를 주축으로 한국 미술이 국제화를 이루면서 포스트 단색화가로 불리는 2세대가 주목받고 있다. 김택상(64) 작가는 그중 손꼽히는 대표 주자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리움 미술관 등 공관 및 국내 유명 미술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해외 메이저 갤러리 및 미술관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전시 논의가 오가는 상황. 그는 “해외 갤러리와 일해보니 하루빨리 단색화를 서구의 표현에 빗대지 않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김 작가와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경기도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았다.

김택상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누가 옆에서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 듯 환하게 느껴진다. 1990년대 초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화산 분화구의 물빛을 인상 깊게 본 작가는 물을 이용한 회화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2017년부터 사용하고 있다는 그의 공장 작업실은 그동안 방문했던 미술 작가의 작업실 중 물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3개의 창고 건물이 작업과 전시 공간으로 그 쓰임을 달리하고 있다. 작가는 2020년, 30여 년간 재직했던 청주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직을 은퇴한 후 이곳에서 전업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경기도에 위치한 김택상 스튜디오 전경.

경기도에 위치한 김택상 스튜디오 전경.

공장 건물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계시네요.

단색화가의 작업실은 대개 큽니다. 동료 작가들도 대부분 이런 공장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림을 바닥에 놓고 그리다 보니 작업 자체가 큰 공간을 요하거든요. 대출 받아 마련한 작업실입니다(웃음). 돈이 덜 드는 방향으로 개조하려고 했는데 예상 비용보다 많이 들었어요. 이런 작업실을 가진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이전에는 여기의 4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에 쥐가 들끓는 곳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어떻게 개조하신 건가요.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광이에요. 햇빛에 따라 작업실 공간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걸 체감할 수 있도록 개조했죠. 일단 다 막혀 있던 천장에 창을 만들었고, 롤스크린 형태로 암막 장치를 설치했어요. 보통 공장·창고형 건물은 직사광선이 들어와서 천장을 막아놓거든요. 또 물을 많이 쓰다 보니 곰팡이가 생겨요. 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수로도 만들고, 공기가 잘 흐를 수 있도록 천장 쪽에 환기창을 달았어요.

직사광선을 받으면 작품이 상하지 않나요.

당연히 상하죠. 색이 날아가요. 근데 30년 전에 한 작업이 육안으로는 아직까지 문제가 거의 없더라고요. 다만 예술 작품도 영원한 건 없으니 제가 감동한 것들을 계속 나누려면 보존이 필요하죠. 그래서 암막 장치를 설치했어요.

작품을 걸어두신 공간은 천장이 높아서 웬만한 갤러리 전시장보다 좋네요.

작품이 잘 보이려면 높은 천장이 필요해요. 광원이 그림과 가까울수록 중간 색은 다 날아가죠. 휴대폰 전등을 켜놓고 얼굴에 가까이 대면 살색이 잘 안 보이는 원리와 같은 거예요. 대개 전시장은 인공광이잖아요. 작품이 인공광으로부터 멀어져야 중간 톤이 발현돼서 그림이 잘 보일 수 있죠. 해당 조건이 잘 구현된 예로 ‘김환기 미술관’이 있어요. 김환기 선생님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니까요. 천장도 높고, 자연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죠. 대중은 실제 보고 싶은 그림을 생생하게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아요. 그럼 그림을 잘 보이기 위한 조건을 갖춰야죠.

자녀분들과 함께 일하고 계시죠.

30대 아들은 조교 역할을 하고, 20대 딸은 사실 필라테스 강사인데 예술학교 디자인과를 나와서 갤러리스트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보는 눈이 좋거든요. “이 색이 아빠 작업과 잘 어울린다” “이 색은 튄다” 등 의견을 내주고 저의 미적 감수성을 돕죠. 주로 혼자 작업하다 보니 자신을 객관화할 시간이 필요해요. 작업실을 나눠 한 공간을 전시장처럼 사용하는 것도 내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함이에요. 나와 비슷한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조언까지 해주면 훨씬 도움이 되죠.

세 분이 함께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어요. ‘작가가 작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예술보다 중요한 게 제 목숨이고, 가족이죠. 아들이 대기업에서 8년간 근무했는데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가 넘어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는 모습이 마음 아프더라고요. 우리나라는 경쟁 지향적인 사회잖아요. 업무 스트레스도 많고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아빠 일을 좀 도와줘라” 얘기했죠. 그렇게 협업을 시작했고, 같이 일한 지 1년 정도 됐어요.

학교까지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선 상황이라 책임감도 느끼시겠어요.

학교에 오랫동안 머물었던 이유도 생활과 처자식 때문이죠. 조기 퇴직 당시 임기가 5년 정도 남았는데 더 이상 학교에서 할 일이 없겠더라고요. 학교라는 틀 안에서는 작품 활동에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라, 이제는 전업 작가로 나설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 무렵 작품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해 퇴직을 결정했죠.

적극적인 작품 판매로 생업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수요가 생기기 전에 스스로 작품을 판매한다는 건 제 상식선에서 이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내가 좋아서 그린 그림인데요. 좋아해서 하는 건데 저 좋으면 됐지 뭐, 그 이상까지 바라나요. 작품이 팔리지 않아 고민인 작가들에게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싶어요. 누가 그림을 그리라고 했나요? 본인이 좋아서 한 거잖아요. 사라고 강요하면 안 되죠.

데생 장인에서 단색화를 그리기까지

김택상 작가의 작업은 물과 시간 그리고 바람, 햇빛 등 자연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작가는 바닥에 눕힌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만든 색 물을 붓고, 그 색이 천에 스밀 때까지 기다렸다가, 벽에 걸어 말리고 하는 과정을 60번 정도 되풀이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색은 그의 작품명 ‘Breathing Light(숨 쉬는 빛)’ ‘Aurora (오로라)’처럼 생생한 오라를 지닌다. 사람의 피부도 여러 층이 존재하지 않은가. 작가는 세포 공간이 쌓여 만들어진 피부와 거기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피부색처럼 자신의 그림 색에도 그런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별명이 ‘데생’이셨다고요.

데생(이미지를 선으로 그려내는 회화 표현)을 잘했어요. 그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작업이 자연스럽지 않더라고요. 자연스러운 건 뻔하지 않은 것에서 나오잖아요. 이미 데생에 숙련된 손인데 뻔한 그림밖에 안 나오죠. 그래서 손 대신 물이 알아서 그림을 그리도록 연구한 거예요.

물을 한번 붓고 얼마나 두세요.

계절에 따라 다른데 여름에는 한 3일만 둬도 썩어요. 30년 동안 같은 작업을 했어요. 이제는 노하우가 생겨서 (정해 둔 기간은 없고) 물을 빼야 할 때를 순간적으로 결정하죠. 물감의 농도도 만들 때마다 다르고요. 물 작업이 대단히 예민하거든요.

물빛을 캔버스에 그대로 구현하기까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셨나요.

‘물이 스스로 표현하게 해야겠구나’를 깨닫기까지 1년 걸렸어요. 우여곡절 끝에 폴리에스테르 캔버스를 찾아서 쓰고 있는데, 그 전에 종이도 써보고 천도 여러 가지를 써봤어요. 지금은 작업에 따라 5~6가지 천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고요. 면 캔버스 천에는 반드시 곰팡이가 생기거든요. 작업에 맞는 천을 찾는 데도 4~5년 정도 걸렸어요.

같은 과정을 60번 정도 반복하고 계신데 완성의 시점은 작가님만 아시겠네요.

그렇죠. 연애도 억지로 못 하잖아요. 작업을 쭉 하다가 마음이 가지 않으면 중단하고 그냥 벽에다 걸어놔요. 작업에 내가 먼저 감동을 해야 하거든요. 작업한 그림을 완결로 두고 싶을 때 비로소 그 작업이 마무리되죠. 작업하다 말고 10년 동안 걸어둔 그림도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띄면 이어서 작업해보고요. 한두 달 만에 완성된 작업도 있고, 20~30년 걸린 작업도 있어요. 제 작업은 자연이 꽃잎 색을 내는 방법과 비슷해요. 시간 차에 따라 조금씩 레이어가 쌓이면서 만들어지죠.

구조색을 표현하고 계신데요.

자연색은 색소색과 구조색으로 구성돼 있어요.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색소색이에요. 꽃잎을 문질렀을 때 나오는 색이죠. 반면 구조색은 나비, 곤충의 피부색처럼 빻아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색이에요. 나노 차원의 색 구조는 빛의 산란에 의해서 나오거든요. 작업 초반에는 몰랐는데 작업을 이어오면서 제가 선택한 방법이 구조색을 좇으려고 애썼던 작업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제 작업을 보고 “색이 스물스물 움직이는 것 같아요” “광선이 나올 것만 같아요” 하는 이유가 색소색과 구조색 체계가 함께 녹아 있는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단색화라는 명칭은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을 기획한 미술평론가 윤진섭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의 단색화를 모노크롬 양식과 분리하고 고유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어느덧 1세대 단색화가들의 제자였던 후기 단색화가들이 선도하는 시대가 왔다. 1985년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김택상 작가는 박서보 선생이 홍익대 미술대 학장으로 지내던 1986년에 홍대에서 서양화과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세대가 쌓이고, 해외 관심이 나날이 커질수록 단색화에 대한 좀 더 정교한 정의가 필요한 때다.

작가 초창기 때 갤러리에 직접 연락해서 본인의 작업을 알리셨다고요.

어렸을 때부터 사람도 잘 안 만나고 낯가림이 심했는데,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에요(웃음). 제 안에 이런 성격이 숨어 있는지 몰랐었어요. 지금 만나는 친구들 덕분에 깨달았죠.

어떤 친구들인가요.

전시장을 직접 찾아가서 나이에 상관없이 친해진 작가 친구들이에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우연히 매장에 찾아갔다가 평생 친구가 됐어요. 또 연필로 큰 꽃을 그리는 김은주 작가는 그전에는 전혀 모르고 지냈는데 그림이 너무 좋아서 제가 먼저 찾아갔어요. 예전부터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하고 봐요. 인스타그램도 그래서 시작했어요. 이왕 선택한 길을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요. 잘하게 되면 행복해지더라고요.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박서보 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시던데요.

박서보 선생님의 사모님인 윤명숙 선생님이 저희 어머니와 고등학교 동창이세요. 저희 어머니가 “얘 가진 재능이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면서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대학교 때인가 한번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대학은 선생님이 계신 홍대에는 못 들어가고, 대학원을 홍대로 갔어요. 그때 처음 박서보 선생님한테 강의를 들었죠.

당시 박서보 선생님을 잠시 멀리하셨다고요.

선생님을 오해했어요. 홍대 학장이셨는데, 젊은 친구들이 선생님을 “화단의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라고 얘기했었거든요. 19년째 유지하고 있는 이 장발만 봐도 아시겠지만, 저는 그런 권력에 좀 개기는 성격이에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멀어졌죠. 그때 화단은 미술협회장 선거부터 전부 다 밥그릇 싸움이 치열했거든요. 선생님께 인사드리러도 안 가고 왜곡된 시선으로 봤어요. 그러다 미술사 공부를 좀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 세대 때는 또 그 나름의 이유가 있구나, 선생님도 치열하게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술계가 말도 못하게 척박했던 시절이죠.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었을 때예요. 미술과 관련된 어떤 혜택도 없고,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요. 미술 한다고 하면 먹고사는 걱정부터 할 때였어요. 후진국의 미술인으로 살면서 열등감과 한계도 느꼈을 거고요. 윤형근(1세대 단색화 거장) 선생님 옆에서도 공부했었어요. 1세대 선생님들 작업량은 기가 찰 정도로 많아요. 지금은 예술가적 기질이 없어도 취미로, 아니면 오직 입시를 위해 그림을 그리잖아요. 그 시대에는 진짜 그림이 좋아서, 간절한 분들만 그림을 그렸어요. 저도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제가 해온 일들과 선배들의 활약을 비교해보면, 그분들은 그 세대에 하셔야 할 일들을 충실하게 하신 것 같아요.


“2세대로서 단색화 정립에 책무 느껴”

2세대 단색화가들은 어떤가요.

적어도 국가에 대한 열등감은 없어요. 인터넷과 책으로 얼마든지 인문학 공부를 할 수 있던 세대고, ‘서구 작가들과 기꺼이 맞짱 뜨겠다’는 야심도 갖고 있는 세대죠.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스트’ 단색화 작가 얘기가 나온 것 같아요.

그럼 작가님 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선 단색화에 대한 정립이 제대로 안 돼 있어서 정리가 필요해요. 1세대와 포스트로 불리는 2세대의 시대정신이 분명히 달라요. 이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하신 분이 박서보 선생님입니다. 단색화의 개념 정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발언할 생각이에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정의하고 설명하지 못하면 정의가 왜곡될 수밖에 없어요.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 미술이 그런 상황이에요. 서구의 미니멀, 추상표현을 우리 것으로 착각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죠.

뭐가 문제인가요.

결과 중심적 사고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게 가장 큰일이라고 생각해요. 김택상의 작업을 이야기하려면 작가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작업 과정을 거쳤는지 맥락을 알아야 하잖아요. 아직 우리만의 배경이나 역사에 대한 맥락이 조성돼 있지 않아요. 그래서 서양의 지식으로 한국 작가들을 바라보는 거죠. 영국에서 모노크롬 페인팅 전시가 열렸다고 하면, 기자들은 단색화가 한국의 모노크롬 페인팅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단색화가가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거냐”고 물어요. 하지만 서양미술사에서 말하는 모노크롬 페인팅 작가와 한국 미술 역사에서 나온 단색화 작가는 엄연히 달라요. 이걸 동일시하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어요.

해외에서 단색화가들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이미 한국에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춘 작가들이 많아요. 그럼에도 한국 미술계가 갖고 있는 후진성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올해 국내에서 처음 열린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해외 메이저 화랑들과 전시를 논의하면서 느끼는 게 많아요. 국내 미술계가 터닝 포인트를 맞아야 할 시기예요.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해요. 그리고 그에 맞는 인식과 비전을 가져야 해요. 외국 사람들이 제 작업을 선호한다고 하면, 한국 화랑의 목표는 작가 김택상을 세계 무대에 올려서 유명 화랑에 정착시키는 거예요.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저는 외국 유수 화랑으로부터 우리 미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인류 미술사에 기여하는 목표를 가지게 돼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그래야 서구와 동등해지죠.

미술 전문가나 평론가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이런 담론을 작가와 이야기해야죠. 작업에 대한 개념과 용어를 만들고, 미술사에 기록해야죠. 이미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굉장히 많아요. 그런 맥락에서 ‘단색화’ 용어를 만들어낸 윤진섭 미술평론가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단색화라고 명명했잖아요. 최초로 주체적인 사고를 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분이 평론가이기 전에 행위예술가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물꼬를 터줬으니 단색화 역사를 정교하게 담론화시키고, 미술사적으로 서양의 문화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죠. 역사는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했을 때, 몇십 년 뒤에 비로소 어느 정도 자리매김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나가야겠네요.

예술 분야는 국가의 자존감이기도 한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에요. 공립 현대미술관에서 적극 나서야죠.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잖아요. 선진국은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을 제시해야죠. 이제까지 영어 문명권인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미술사를 주도해왔지만 이제는 “한국도 단색화라는 한자 문명권식 모더니즘을 갖고 있다”고 설명해야 해요. 이게 저희 포스트 세대의 책무라고 생각하고요. 1세대 선생님들이 힘든 시대를 버텨내시면서 한국 미술의 기틀을 닦았잖아요. 저희는 작업만 보여줄 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독립된 위상을 함께 보여줘야 해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세계 미술계에 제언해야 합니다.

#김택상 #단색화가 #박서보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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