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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이 의미하는 것

EDITOR 곽영진 영화평론가

2019. 07. 08

지난 5월 말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모든 한국인에게 자긍심을 선물한 봉준호 감독. 영화 전공자가 아닌 그가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인으로 성공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거머쥔 행운이 아니다.

봉준호(50) 감독의 성공을 논하자면 먼저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성과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생충’은 이번 수상뿐 아니라 기대 이상의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뒀다는 점에서도 쇼킹한 영화다. 개봉 17일 차인 6월 16일, 누적 관객 수 8백만 명을 넘었으니 이런 추세라면 1천만 돌파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극장가에 천만 영화가 어디 한둘이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칸·베를린·베니스에서 열리는 3대 국제영화제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작품도 국내 흥행은 영 신통치 않았던 전례 때문이다. 7년 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개봉됐을 때,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음에도 ‘청불 영화’라는 한계와 감독의 ‘B급 이미지’ 등이 작용한 탓인지 60만 관객 동원에 그쳤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은 ‘기생충’의 디테일

매번 통하는 등식은 아니지만 좋은 뜻과 돈, 예술과 상업, 작품성과 대중성은 양립하기 어렵다. ‘기생충’이 이런 통념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등에서 증명된, 작품성과 재미를 모두 챙기는 봉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에 대중의 신뢰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요컨대 ‘기생충’의 대박 비결은 세계 1등 영화제로 꼽히는 칸국제영화제의 명성과 성공한 감독 봉준호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흥미로운 결과물에 있다. 

그렇다. 봉준호는 성공한 감독이다. 봉준호에겐 영화가 전부일 테니, 그에게 성공이란 영화와 인생 모든 것에서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통달’이다. 좋은 영화를 생산하는 성공한 감독이 되려면 비단 영화(기술)만이 아니라 인생에도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는 삶을 다루는 예술이고, 또 그 화려한 혹은 수수한 멋과 함께 감동을 자아낼 때 가치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성공 사유인 통달에는 그가 연출가(감독)이면서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를 겸하며 단독 또는 공동으로 자기 영화의 스토리를 창작하고 그 흐름을 장악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이 능력은 작곡과 노래를 겸하는 싱어송라이터처럼 감독의 생명력을 담보하는 것이며, 나아가 무의식의 저변에서부터 작품의 심화된 창의성이 발화하도록 돕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칸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풍자적으로 그리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칸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풍자적으로 그리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영화 ‘기생충’은 전원이 백수인 집안의 장남 ‘기우(최우식)’가 부잣집의 영어 고액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얽히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송강호(52)는 기우의 백수 아버지인 ‘기택’으로 나온다. 이 작품의 인기몰이 주역으로 꼽히는 두 사람은 물론이고 조여정과 이선균, 장혜진, 박소담, 이정은, 박명훈 등 모든 배우가 각자 주어진 캐릭터를 차지고 섬세하게 연기해내는 모습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의 장르적 상상력이 관객의 감정선보다 더 치밀할 때 비로소 영화는 숨 쉴 틈 없이 관객의 감정을 압도한다. ‘기생충’을 성공으로 이끈 힘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장르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다층적이고 탄탄한 서사에 있다. 평소 특정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가 외면하던 이야기를 현실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봉 감독의 재능이 여기에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기생충’은 희극 반, 비극 반의 쌍대(雙對)적 구조를 취하는 잔혹 동화와 닮았다. 극 중 송강호의 가족은 치밀하게 공모해 대저택에 사는 부부를 감쪽같이 속이고 모두 이 집에 취업하며 신분 상승에 성공하는 듯하지만 끝내 냄새나는 반지하 주택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그 여정 속에서 송강호 가족이 느끼는 감정을 관객들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이는 국적이나 인종, 세대를 초월한다. 봉테일(디테일에 강한 봉준호)의 영화답게, ‘기생충’의 다양한 상징성을 가진 소품과 공간은 영화의 초반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얼개를 맞추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퍼즐 조각들 같다. 

후반부 들어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비장미 넘치는, 봉 감독 특유의 감성 코드를 통해 스릴러적인 장르 변주를 꾀한다. 계단과 지하실을 활용한 서사의 공간화도 탁월한데, 지하실의 등장은 ‘을’보다 못한 ‘병’의 세계를 은유하며 극중극처럼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기생충’은 가족 희비극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가족을 매개로 한 코미디와 비극의 결합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긴 했지만 어린이나 중학생이 부모 동반 하에 극장을 찾기에는 러브 신과 폭력 신이 과하다 싶을 만큼 노골적으로 묘사돼서다.

어린 만화광의 예술성을 깨운 가족의 힘

봉준호 감독은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2세(한국 나이 14세)부터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었다”며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내 손으로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어린 시절 그는 만화광이자 영화광이었고 사진 한 장을 2시간 동안 들여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봉 감독의 예술성은 집안 내력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소설가인 구보 박태원(1909~1986)이다. 박태원 작가는 1934년 출판된 단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1930년대 서울 청계천변 서민들의 삶과 문화를 담아낸 소설 ‘천변풍경’으로 유명하다. 봉 감독의 아버지는 고 봉상균 씨.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를 지낸 한국 1세대 그래픽디자이너다. 봉 감독은 어릴 때 아버지 서재에서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서양의 영화·건축·디자인 책들을 보며 자랐다. 

그는 1988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한 후 영화 동아리 ‘노란 문’에서 활동했고, 인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영화관을 구축했다. 그때부터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접하고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재학 시절 영화만큼 그가 관심을 보인 분야는 만화였다. 그는 교내 학보 ‘연세춘추’에 4컷 만화 ‘연돌이와 세순이’ ‘춘추만평’을 연재했는데 이는 훗날 영화 콘티를 그리는 실력으로도 발전해 봉테일의 작업에 밑거름이 됐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해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생 시절 만든 ‘백색인’(1993)을 시작으로 여러 편의 단편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초청됐다. 감독 입봉작인 ‘플란다스의 개’(2000)는 독특한 소재와 스타일을 가감 없이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확고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만드는 작품마다 흥행 궤도에 진입하며 충무로를 넘어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해갔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그의 성공 뒤에는 과묵하고 겸손하며 소외된 이들을 보듬으려는 남다른 인성과 덕성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박 확률 100%, ‘호호 커플’의 브로맨스

‘기생충’의 주연으로 또 한 번 주가를 올린 배우 송강호와 봉준호 감독의 특별한 인연이 새삼 화제다. 송강호는 원래 무명 연극배우였다. 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단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97년 ‘초록물고기’ ‘나쁜 영화’의 단역을 거쳐 ‘넘버 3’(1997)에서 조연을 맡은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 직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송강호는 ‘모텔 선인장’(1997)의 조연출이던 봉준호와 미팅을 한 적이 있다. ‘초록물고기’에서 건달 역으로 등장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송강호의 연기에 매료돼 봉 감독이 먼저 그에게 만남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 특별한 인연과 두 사람의 브로맨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6년 뒤 개봉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다. 당시 송강호는 ‘넘버 3’에 이어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쉬리’(1998)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연거푸 ‘홈런’을 날려 이미 대배우가 돼 있었고, 봉준호는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로 흥행 실패를 맛본 신인 감독이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서로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신뢰와 존경심을 품은 두 사람은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괴물’(2006), ‘설국열차’(2013), ‘기생충’까지 함께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송강호에겐 ‘봉준호의 페르소나’라는 애칭이 생겼다. 

페르소나(Persona)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실제 본성을 반영하거나 때론 대조적인, 한 개인의 외부적 인격이나 모습을 의미한다. 원래는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 어원의 라틴어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으로 번역되며 일반적으로는 ‘무대 위의 배우’ ‘영화감독의 분신이 되어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일컫는다. 성격(캐릭터)이나 취향은 다르다 하더라도 감독과 유머 코드가 비슷하고 감독에게 영감을 주며, 연기를 통해 감독의 심중과 의도를 잘 표현해내는 배우 말이다. 봉 감독도 송강호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배우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기생충’ 시나리오를 쓸 때 처음부터 송강호를 아버지 기택 역으로 염두에 뒀다고 고백했다. 

송강호를 좋아하고 “위대한 배우”라 칭하며 존경심을 표하는 감독은 한둘이 아니다. 봉준호와 김지운, 박찬욱 등이 대표적이다. 송강호는 김지운이 연출한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밀정’(2016)에 출연했고 박찬욱과는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쥐’(2009)에서 감독과 배우로 호흡을 맞췄다. 그럼에도 대중이 송강호를 김지운이나 박찬욱이 아닌 봉준호의 페르소나로 여기는 건 그들 중 송강호의 진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가 봉 감독이고, ‘호호 커플’이 함께할 때 그 시너지 효과가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획 김지영 기자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신화=뉴시스 AP=뉴시스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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