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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star

스크린 안과 밖의 온도차 문소리

EDITOR 김지영 기자

2019. 06. 17

‘투사’ 이미지가 첫 만남에서 단박에 깨졌다. 영화 ‘배심원들’에서 연기한 판사처럼 소신껏 목소리를 내는 배우인 줄로만 알았던 문소리에게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문소리(45)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대해 자기 소신을 밝혀온 ‘소셜테이너’다. 또한 1999년 스크린 데뷔작인 ‘박하사탕’을 시작으로 ‘오아시스’ ‘아가씨’ ‘리틀 포레스트’ 등 여러 영화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파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배우다. 최근에는 TV로 활동 반경을 넓혀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과 ‘라이프’에서 색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문소리 하면 여전히 ‘잔다르크’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5월 15일 개봉된 영화 ‘배심원들’에서 그가 연기하는 판사 김준겸도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다.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에서 재판장 김준겸이 사법부의 우려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배심원 8인의 좌충우돌 속에서 어떤 결론을 낼지가 이 영화를 이끄는 주요 관전 포인트다. 하지만 영화 개봉 일주일 전, 카메라가 없는 공간에서 마주한 문소리는 그에게 가졌던 선입견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언론시사회를 재미있게 봤어요. 문소리 씨는 어땠나요. 

기술시사회만 봤어요. 원래 언론시사회를 안 볼 때가 많아요. 사람들 반응이 신경 쓰여서 영화에 집중을 못 하겠더라고요. 개봉 후에도 제 영화를 여러 번 보지 않죠. 저의 부족한 점도 보이고 관객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다가갈지 걱정돼서요. 그래도 이번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배를 띄운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어요. 배우들도 영화를 보고 나서 흡족해했고요. 배우라면 누구나 자기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있지만 모든 배우들이 좋다고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너무 훈훈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죠. 

직접 보기 전엔 딱딱한 영화인 줄 알았어요. 



‘배심원들’ 하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영화인지 연상이 잘 안 돼요. 그 지점이 궁금증을 유발할 것 같아요. 요즘은 남자 배우 위주의 영화가 주류를 이루는데, 다채로운 연령대의 남녀 배우들이 끌고 가는 작품이라는 점도 신선할 것 같고요. 또 영화든, 드라마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극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는 끝까지 대화로 풀어가요. 그 점이 장점으로 작용해 흐뭇했어요. 

그런 면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했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호감이 갔어요. 주변에선 “배심원들이 많이 나와 재판장이 묻힐 수 있다”며 걱정과 우려를 쏟아냈지만 ‘내가 잘하면 되겠지!’ 싶었어요.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거든요. 

지난해 드라마 ‘라이프’를 7월 중순까지 찍고 바로 영화 촬영에 들어간 걸로 알아요. 신인 감독(홍승완)과의 작업이어서 힘들진 않았나요. 

경험 많은 감독에게는 심적으로 의지하기도 하고 제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편한데, 신인 감독에게는 그러지 못해요. 혹시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신뢰감을 못 주고 있다고 여길까 봐, 기운 빠지게 할까 봐 늘 조심스러워요. 근데 홍승완 감독과는, 제가 일찍 캐스팅된 덕분에 1년 이상 신뢰를 쌓을 수 있었어요. 감독님이 시나리오 준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발품을 들였는지도 알게 됐고요. 감독님은 현장에서 모든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줬어요. 현장 경험이 적은 배우들의 목소리엔 더욱 귀를 기울였고요. 그런 리더십 덕분에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이 다 살지 않았나 싶어요.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뭔가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작품 전체의 느낌을 가장 중시해요. 그리고 그 느낌이 감독님의 생각과 맞아야죠. 이번 작품도 ‘톤 앤드 매너’가 굉장히 유쾌하고 경쾌해서 끌렸어요. 법원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많아 관객들이 답답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배우들이 각자의 캐릭터로 그런 우려를 잠재웠죠. 배우들과 호흡을 주고받는 과정도 너무 재미있었고요. 이런 팀워크를 또 만나기 힘들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배심원들 중 욕심나는 캐릭터를 꼽는다면. 


배심원들보다 김선영 씨가 맡은 ‘청소 요정’ 역이 탐나더라고요. 너무 재미있게 연기하기에 저도 집에서 따라 해봤어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중요한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하면서 박형식(청년 창업가 배심원 역) 씨의 정신을 쏙 빼놓잖아요. 

극 중 박형식 씨와의 케미가 특히 좋았다는 평이 많아요. 두 사람이 다른 작품에서 멜로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분들도 꽤 있어요. 

그런 바람도 반갑네요. 하하하. 

영화에서 “처음이라 잘하고 싶다”는 한 배심원의 말이 큰 울림을 주더군요. 문소리 씨도 서툴지만 잘하고 싶었던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의 첫 대본 리딩 때 감독님이 ‘처음이라 잘하고 싶어요’라는 문구를 화면에 띄워놓고 인사 멘트를 하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박하사탕’을 촬영할 때가 떠올랐어요. 지금도 그 영화를 찍던 매 순간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성균관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며 연극반 활동을 했더군요. 원래 꿈이 배우였나요. 

배우는 꿈도 안 꿔봤어요. 어릴 땐 굉장히 소극적이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였어요. 고등학교 때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요. 부모님이 원하는 사범대에 진학한 후에도 문학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 연극반 활동이 주업이 됐죠. 그러다 도전해보지 않으면 한이 될 것 같아 ‘박하사탕’ 오디션을 봤고, 그 영화를 촬영할 때도 한번 경험해보는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어요. 근데 막상 개봉되니까 이왕 시작했으니 제대로 알고 싶더라고요. ‘적당히’가 잘 안 되는 성격이거든요. 

배우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나 후회가 든 적도 있을 법해요. 

후회한 적은 없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회자될 때는 힘들죠. 기분이 제일 좋을 때는 아침이나 새벽에 현장에 갈 때예요.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하면서 즐거움을 안기거든요. 어떤 순간보다 그때 이 직업이 좋아요.

작품 속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지만 집에서는 그도 여느 가정의 주부처럼 엄마이자 아내로 일상을 보낸다. 2006년 영화감독 장준환과 결혼한 그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딸 연두를 두고 있다.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카리스마 지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요. 굉장히 엄격한 엄마일 것 같아 보이거든요. 

가족 중 딸아이에게 엄격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긴 해요. 그렇지만 아이가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진 않아요. 아이의 일기를 봤거든요. 매일 다른 질문에 답을 쓰게 하는 다이어리 형식의 ‘Q&A’라는 책이 있어요. 어른용은 5년 치, 아이용은 3년 치를 기록할 수 있죠. 아이의 속마음을 알고 싶고 제가 항상 같이 있지는 못하니까 매일 써보라고 그 책을 선물했어요. 거기에 적힌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이라는 물음에 고맙게도 ‘엄마’라고 썼더라고요.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은?’이라는 질문엔 ‘핸드폰’이라고 답하고요(웃음). 

휴대전화를 안 사주는 나름의 이유가 있나요. 

연두랑 같은 반 아이들은 대부분 갖고 있대요. 딸아이는 아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하며 휴대전화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는데 아직은 사주는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어요. 지금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30분만 제 휴대전화를 쓰게 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20분으로 제한했는데 올해 2학년이 되면서 10분을 늘렸어요. 

남편과 같은 분야에서 일해 서로 도움을 주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장준환 감독이 평소 작품에 대한 조언을 잘해주는 편인가요. 

영화 이야기는 서로 많이 하는데, 제가 하는 영화나 연기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은 거의 안 해요. 둘 다 자신의 고민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는 주의거든요. 

배우가 안 됐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연극을 하거나 다른 창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5월 19일부터 방송되는 MBC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에 할머니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출연한다고 들었어요. 리얼 예능은 처음인데. 

예능 자체는 낯선 영역이지만 할머니들은 낯설지 않았어요. 남 같지 않았다고 할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생전에 같이 살았고요. 그래서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도 재미있게 봤고, 교생 실습 때 모의 수업을 한 적도 있어 데뷔 후 처음으로 리얼 예능에 도전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흐뭇한 경험이었어요. 

제 시그니처 질문입니다.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뭔가요. 

마음에 남아 있는 말들이 그때그때 달라요. 지금은 ‘부유불거(夫唯不居) 시이불거(是以不去)’라는 말이 제 삶의 나침반이에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귀인데, 액면 그대로는 ‘오로지 머무르지 않으니 이로써 밀려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일이 이루어지려면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완성된 것에서 떠나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죠. 자신이 이룬 것을 계속 누리려고 버티면 집착하게 되고 고통도 생기고 냄새도 나고 그러잖아요. 내가 발전하고 더 나아가고 잘 흘러가면 밀려날 걱정도 없고요. 그 말이 제게 ‘여기서 떨어지면 어쩌지? 밀려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기 전에 스스로 어디론가 나아가면 된다’는 깨달음을 줬어요.(그는 그 말을 적어놓은 일기장을 가방에서 찾아내 어떤 이의 사인도 보여주었다. “좋아하는 가수 한영애 씨에게 직접 받은 친필 사인”이라고 수줍게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스크린을 압도하는 여배우이기보다 소녀에 가까웠다.) 

문소리 씨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는 중인가요. 

영화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탐험 중이에요. 가을에는 연극하는 친구들과 무대에서 재미있는 여행을 할 것 같아요. ‘러브스 엔드’라는 2인극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2016년 ‘빛의 제국’이라는 연극으로 만났던 프랑스 연출가와 다시 작업을 하게 됐어요. 9월에 이 작품으로 다시 만나자고요(웃음).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씨제스엔터테인먼트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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