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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korea #impeach

여성의 명예 회복시킨 이정미 재판관의 ‘헤어롤’

editor 김지영 기자

2017. 04. 05

3월 13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청사 1층 대강당은 취재 열기로 뜨거웠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의 권한대행(박한철 소장은 1월 31일 퇴임했다)으로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심리를 맡았던 이정미(55·사법연수원 16기) 헌법재판관의 퇴임식이 열려서다. 진한 청색의 단정한 투피스 차림으로 연단에 오른 이 전 재판관은 2011년부터 6년간 몸담은 헌재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헌법재판관이라는 자리는 부족한 제게 참으로 막중하고 무거웠습니다. 고요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그 자리가 실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여성 재판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여성이 기대하는 바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 어떤 판단이 가장 바르고 좋은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저의 그런 고민이 좋은 결정으로 열매 맺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외신도 ‘헤어롤’에 주목





3월 10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문 낭독을 끝으로 재판관으로서의 임무를 공식 마감한 이 전 재판관은 퇴임사에서 헌정 사상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 선고에 관한 나름의 소회도 밝혔다. 먼저 “우리 헌재는 바로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운을 뗀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헌재는 이번 결정을 함에 있어서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절차를 진행하면서 헌법의 정신을 구현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통치 구조의 위기 상황과 사회 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진통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보다 성숙하게 거듭나리라고 확신하고, 이제는 분열과 반목을 떨쳐내고 사랑과 포용으로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전 재판관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재판장으로 심리를 진행한 38일 동안 헌재의 위엄을 지키고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 법률대리인단이 재판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재판관들에게 삿대질과 막말을 서슴지 않을 때는 단호하게 대응했으며, 재판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증인들에겐 ‘송곳 질문’에 능한 강일원 주심 재판관과 함께 ‘그물망 추궁’을 거듭해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 방기선 전 청와대 행정관 등에게서 중요한 증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전 재판관은 탄핵 선고 당일인 3월 10일 아침, 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헌재에 출근해 긴장한 국민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인터넷과 SNS로 접한 이들은 “엄중한 선고를 앞두고 긴장돼 헤어롤을 제거하는 것도 잊고 나온 것 같다”며 “얼마나 판결에 몰두했으면… 인간적인 실수”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네티즌들은 동그란 헤어롤 2개가 탄핵 ‘인용’의 초성인 ‘이응 2개(OO)’와 닮았다거나 ‘헌법재판관 8인의 만장일치’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이날 헌재 안팎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던 많은 외신들은 ‘헤어롤 해프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특히 미국 AP통신은 2014년 세월호 사건 당일 수백 명의 학생 목숨이 걸린 급박한 상황보다 ‘완벽한 머리 손질’에 우선순위를 뒀던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재조명하며 “한국인 여성 재판관이 자기 일에 헌신하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김진애 전 국회의원은 ‘아침에 (이정미 재판관의) 그 사진을 보자마자 찡해졌다’ 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 여성으로서 스스로 헤어롤을 말아 보기를 나는 바란다. 똑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려면 차라리 가발을 쓰라. 5분이면 가발 쓰고 사건의 현장에 나타날 수 있다. 세월호 일곱 시간의 비밀 같은 게 있을 이유도 없고, 파면되어 돌아간 전 대통령의 자택 첫 손님이 전속 미용사일 이유도 없다.(중략) 박근혜는 일하는 여성의 명예를 실추시켰지만, 그 헤어롤 두 개는 일하는 여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고 칼럼을 쓰기도 했다.


보수적 상식적 판결로서 탄핵 '주문'



경남 울산이 고향인 이 전 재판관은 원래 수학 교사를 꿈꿨다. 그의 진로가 바뀐 건 마산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나면서다. 그는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큰 충격을 경험했다.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나가는 길일까 생각하다 1980년 법대에 진학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198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됐다. 서른 살이 넘어 신혁승 숙명여대 교수와 결혼한 뒤에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여러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을 돌면서 판사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2011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됐다. 헌재 역사상 최초의 40대 재판관이자 전효숙 재판관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었다.

그는 소장 권한대행을 2번이나 맡은 최초의 재판관이라는 이력도 남겼다. 이 전 재판관은 2013년 이강국(72·사법시험 8회) 당시 헌재소장이 퇴임한 뒤에도 약 3개월 동안 권한대행을 맡은 바 있다. 헌재에 몸담은 6년 동안 그는 이번 탄핵 심판 사건 외에도 여러 큰 사건을 다뤘다.

주심을 맡았던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사건 때는 찬성 의견을,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당시에는 법외노조가 맞다는 의견을, 간통죄 폐지 사건에 대해서는 간통죄 존치 의견을 낸 바 있다.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판결을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전 재판관의 거취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한창 일할 나이인 만큼 사회 활동을 접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재판관은 헌재에 몸담을 당시 이미 6년 뒤를 내다보며 “헌재를 떠나더라도 공익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특히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아 관련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걸리는 점은 탄핵 선고를 앞두었던 2월 하순부터 이 전 재판관을 향해 지속적으로 테러 협박을 가하고 있는 일부 보수 단체 회원들의 도를 넘어선 행각이다. 이들에 대한 내사를 통해 입건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경찰은 이 전 재판관 퇴임 이튿날인 3월 14일에도 박사모 게시판에 살벌한 협박성 글이 잇따라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이 전 재판관에 대한 경호 수준을 최고 단계로 높여 24시간 경호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헌재는 이 재판관의 후임으로 대법원장이 지명한 이선애(50·사법연수원 21기)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국회 인사 청문회를 마치고 임명될 때까지 당분간 7인 체제로 운영된다. 이 재판관의 퇴임에 따라 공석이 된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김이수 선임 재판관이 맡게 될 예정이다.

사진 박해윤 기자 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신화통신 디자인 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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