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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이종선 ‘수집’에 대한 삼성가의 애착과 집념을 말하다

호암 이병철 vs. 리움 이건희

글 · 정희순 | 사진 · 이상윤, 김영사 제공 | 디자인 · 김영화

2016. 03. 09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인 삼성가는 창업주부터 대대로 전해오는 특별한 취미가 있다. 바로 미술품 컬렉팅이다. 20년간 삼성가의 유물 수집을 보필한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 이종선 씨가 최초로 털어놓은,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에 얽힌 뒷이야기.

손때 묻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노신사가 “60년 넘은 골동품이오”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1976년 삼성문화재단에 특별 채용돼 호암미술관 부관장을 거치며 20년간 삼성가의 유물 수집을 보필해온 이종선(68) 씨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은 일찍부터 유물 및 여러 미술품을 수집하다 지난 1982년 호암미술관을 열어 수집품들을 대중에 공개했다. 이건희 회장 역시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가동해 수집열을 불태우다 2004년 리움미술관을 개관하며 삼성가가 소유한 국보급 유물들을 공개한 국내 대표적인 컬렉터 중 한 사람이다. 국내에서 재벌 기업 총수가 2대째 유물을 수집하고 각각 미술관을 개관한 예는 삼성이 유일하다. 이종선 씨는 지난 1월 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그간 비밀스럽게 여겨졌던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를 풀어냈다. 책에는 수집에 대한 두 회장의 뜨거운 갈망이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 비밀스러운 삼성가 이야기라 꺼내놓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삼성에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부분이 노출될까 봐 걱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생활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병철 · 이건희 부자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무르며 나는 그들의 수집벽을 수집했던 것이다. 내게는 평생을 바친 나의 컬렉션이기도 하다. 2대에 걸쳐 유물을 수집하고 박물관(미술관)을 만든 기업은 삼성이 유일하다. 컬렉션에 대한 삼성가의 애정과 나의 노력을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 삼성가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뭐였나.
1967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입학하며 원래 고고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던 어느 날 고고학계의 원로 김원룡 교수가 느닷없이 내게 삼성행을 권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76년부터 95년까지 약 20년 동안 삼성에 몸담으며 그림자처럼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컬렉팅을 보필했다.   
▼ 두 회장의 첫인상은 어땠나.
이병철 회장을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태평로에 위치한 구 삼성 본관 28층 회장 집무실에서였다. 경상도 사투리에 특유의 남도식 강한 억양, 거기에다 살점 하나 붙지 않은 말들로 턱턱 자르는 화법이 기억에 남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기가 어려운데 그걸 대체로 잘 알아듣는 사람은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건희 회장을 처음 만난 건 그가 중앙일보 이사로 일을 배우던 때였다. 아직 후계 구도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던 때인데, 이미 그때부터 조선 백자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지식 수준은 상당했다. 이건희 회장은 평소 말수가 적었는데,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말없이 상대를 지그시 볼 때면 눈빛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풍겼고, 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껐다.
▼ 재벌이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수집이 꼭 ‘부자만’ ‘부자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이가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는 일도 일종의 수집이고, 청소년들이 브랜드 신발 등을 사들이는 것도 일종의 수집이다.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해서 모두 수집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병철, 이건희 회장에게 수집은 취미였다. 수집을 통해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다. 굳이 왜 미술품을 수집한 거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재테크라고 본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때 그것보다 훨씬 많이 뛰는 것이 미술품 가격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술품은 투자해서 실패할 확률도 적다.
▼ 두 회장은 왜 수집을 시작하게 됐나.
이병철 회장은 내게 대구에서 생활하던 시절 주변 인사들의 권유에 의해 수집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유교적인 가풍과 선비 같은 품성이 취미로 이어진 것 같다. 이병철 회장은 붓글씨를 좋아했고, 집 안을 동양화와 서예로 가득 채우곤 했다. 이건희 회장은 어려서부터 영화 필름을 모으며 영화광으로서의 수집력을 발휘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억지로 시켜서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 그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사이에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가동해 국보급 유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했고, 그 결과 현재 삼성가는 국보급 문화재 1백60여 점을 소유하고 있다. 일단 시작했다 하면 끝을 보는 이건희 회장의 성격이 오늘날의 리움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컬렉팅 방식은 어떻게 달랐나.
이병철 회장은 비싸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까봐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다. 호암 컬렉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품으로 꼽을 만한 유물은 많지 않다. 본인이 판단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을 명품이라 여기고 모으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비해 이건희 회장은 값을 따지지 않고 별로 묻지도 않았다. 작품 한두 점만 좋아도 전체 컬렉션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생각이 강해서, 전문가가 좋다고 하는 명품을 보면 무조건 구입하곤 했다. 미술을 전공하고 역시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홍라희 관장도 나만 보면 “이종선 씨는 너무 많이 사는 게 흠”이라고 할 정도였다.


▼ 두 사람이 사랑한 대표적인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나.
이병철 선대회장은 고려 불화와 고려청자, 금관 등 화려한 양식의 유물들을 좋아했다. 수집을 처음 시작하는 컬렉터들은 대부분 화려한 것들을 좋아한다. ‘청자상감운학모란국화문매병’(보물 제558호)과 ‘가야금관’(국보 제138호), ‘청자진사주전자’(국보 제133호), ‘아미타삼존도’(국보 제218호)가 대표적이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어떤 색도 가미되지 않은 고고한 빛깔의 백자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자달항아리’(국보 제309호)는 품격이 느껴진다며 최고로 꼽았다.  
▼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안목을 평가한다면 어떤가.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안목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둘이 살던 시대는 너무도 다르지 않나. 조선시대 학자와 오늘날의 학자를 비교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객관적인 부분으로만 비교하자면, 이병철 회장은 일본 문화에 가까웠고 이건희 회장은 미국 문화에 가까웠다. 요즘 사람들은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하다 보니 아무래도 이건희 회장이 컬렉팅한 작품들을 더 친숙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 회장과의 일화 중 아찔했던 순간은 없었나.
이병철 회장의 ‘가야금관’ 사랑은 다른 수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금관의 소재부터 확인할 만큼 ‘가야금관’에 집착했다. 누군가가 이병철 회장에게 “이 금관이 최초의 금관”이라고 치켜세워 말한 뒤 이병철 회장의 금관 사랑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실제 그 금관은 이병철 회장이 믿는 연대보다 수백 년 뒤인 5~6세기경 유물이었다. 모두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 하나 금관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한번은 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며칠 동안 눈 흘김을 당했고, 그 뒤로는 구태여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과의 일화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다. 한번은 이건희 회장이 기획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전시장을 쓱 둘러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휙  나가버리는 거다. 그때 이 회장이 내게 “이 실장, 내가 좋은 물건 그렇게 많이 사줬는데 쇼케이스가 저게 뭔가?” 하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쇼케이스를 특급으로 바꿔야 한다”고 줄곧 의견을 전했던 터라 솔직히 억울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이건희 회장의 출근길을 막아서며 ‘백자달항아리’의 결제를 처리해달라고 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했다. 당시 이걸 얻기 위해 아파트 여러 채 값을 치렀고, 후에 리움 컬렉션의 백미가 됐다. ‘백자달항아리’는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보물로 지정됐는데, 이것이 ‘국보급’이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보물 지정 소식에 오히려 허탈했었다. 세월이 흐르고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국보의 자리를 찾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2대에 걸쳐 2개의 미술관을 세운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병철 회장은 노년에 들어서면서 유물들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수집한 미술품들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우짜노, 우짜노”하다가 용인에 자신의 호를 딴 미술관 건립을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 호암미술관은 조각 공원을 구상하고 만든 것이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힐링하기 좋은 공간이지만, 그만큼 접근성이 떨어져 관객들이 유물을 관람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술관 설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터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리움미술관을 설립한 건 늘어나는 소장품을 보관할 장소가 또 필요했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해 서울에 제2의 박물관을 세우겠다고 가닥을 잡았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04년 개관한 ‘리움미술관’이다. ‘리움(Leeum)’은 이씨 일가를 뜻하는 ‘리(Lee)’와 박물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을 결합한 말이다. 도심에 위치해 있어 시민들이 평일 날 쉽게 관람이 가능하고 시설이나 건축, 운영 측면에서도 호암보다 훨씬 뛰어나다.


▼ 리움미술관이 아쉬운 점은 없나.
철저하게 관람객 입장에서 생각해 짓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호암미술관에 비해 접근성은 좋지만 지하철역에서 500m 이상 떨어져 있어 한여름에는 미술관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 또 전시 방식이나 입장료 책정 등에 있어서도 대중의 마음과 괴리감이 있다. 리움의 터를 다지면서 그 부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쉽다. 시민들과 문화를 향유한다는 철학을 우선시한다면 철저하게 관람객을 배려한 복합 문화 시설로 진화해야 한다.
▼ 호암미술관 설립 이전에 삼성가는 미술품을 어떻게 관리했나.
생전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살던 장충동 집에 창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삼성가의 영빈관으로 통하는 한남동 승지원에도 미술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하지만 미술품을 관리하는 공간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미술품을 잘 보관하려면 ‘클린룸’같은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24시간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진동까지도 관리해야 한다. 삼성이 호암미술관을 건립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술품 보유량은 점점 늘어나는데 이를 제대로 보관할 만한 공간이 없었던 거다. 미술관 건립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박물관의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는 전시품 덩치의 20~30배에 달한다. 때문에 미술품 수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나온 거다. 특히 유물 같은 경우에는 발굴 당시 환경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제대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거다.
▼ 책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컬렉팅과 관련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이 컬렉팅하는 것들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아서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고지도’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을 봤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이력이 이 부회장의 취향에 한몫 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고지도’는 여러 수집 분야 중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한다. 흐름을 짚기 위해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동국전도’까지 망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고지도 수집가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 삼성가 3대의 ‘수집’은 어떻게 발전할 거라고 보나.
1대에서 창업, 2대에서 수성을 이루었으면 3대째는 ‘개화’가 키워드가 돼야 한다. 삼성가 3대는 이전 세대보다 세계를 보는 눈이 높아졌다. 이부진 사장이 이끄는 호텔신라나 이서현 사장이 이끄는 삼성물산은 미적 안목이 중요한 분야가 아닌가. 최근 호텔신라가 한옥 호텔을 짓겠다고 하는데, 이 공간 안에 삼성이 그동안 공들여 일구어온 우리나라의 미적 가치를 십분 담아낼 수 있으리라 본다.  
▼ 호암, 리움에 버금가는 새로운 미술관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새로운 부지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더 짓는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한남동 리움 부지를 확장해 건물을 증축하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것 역시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구어낸 메디치가와  삼성가를 비교해도 될까.
누가 뭐래도 삼성은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82년 호암미술관을 개관했을 때, 이는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박물관을 만드는 신호탄이 됐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 반출된 우리 유물을 찾아오는 데도 삼성의 역할은 지대했다. 처음엔 단순히 오너의 취미로 시작했을지라도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건 미술품의 가치를 사회와 나누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가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메디치가만큼의 명성을 누리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수집한 유물을 보여주는 단순 창구 역할을 넘어,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삼성가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만큼 우리나라의 문화도 활짝 꽃피울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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