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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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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법안 만든 서영교 국회의원

글 · 이한경 기자 | 사진 · 박해윤 기자, 서영교 의원 제공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2016. 01. 25

어릴 때부터 ‘너는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소녀는 결국 그 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36세에 정치에 첫발을 내디뎌 48세에 국회의원 배지를 단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야기다.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어머니를 꼽은 서 의원이 지난 4년간 가장 보람 있던 순간과 앞으로의 꿈에 대해 털어놓았다.

1999년 5월 20일,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여섯 살 태완이는 골목길에서 정체 불명의 괴한으로부터 황산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얼굴과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태완이는 49일 만인 같은 해 7월 8일 숨을 거뒀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소시효 만료일이 다가오자 유족과 시민단체들은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며 탄원에 나섰고, 이런 사연은 지난해 3월 한 방송을 통해 전파를 탔다.
“그날 마침 TV를 보게 됐는데, 방송을 보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저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 입장이다 보니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 울고만 있을 게 아니라 관련 법을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고 태완이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죠.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태완이법’을 대표 발의하게 됐고요. 법안 통과가 예정보다 늦어지면서 태완이 사건의 경우는 공소시효가 끝나 정작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게 돼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2000년 8월 이후 발생한 미제 사건의 경우에는 적용을 받게 됐어요.”
미혼부들의 출생신고를 가능하게 한 ‘사랑이법’, 이자제한법 · 불법채권추심방지법 · 대부업법을 골자로 한 ‘피에타 3법’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서영교(52) 의원이 발의한 대표 법안들이다. 스스로를 ‘서민의 딸’로 자처하는 서 의원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 역시 서울의 대표적인 서민 동네인 중랑구 출신이기 때문이다.



뼛속까지 서민인 면목동 토박이

중곡초·면목여중·혜원여고(모두 중랑구 소재)·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그리고 현재는 서울 중랑구갑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서영교 의원의 이력만 보면 중랑구 국회의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준비된 정치인 같다. 현재 그의 사무실이 위치한 곳도 2013년 별세한 친정어머니가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했던 면목시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전혀 아니에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집 근처에 있으니까 그 학교에 가게 됐고, 대학은 원래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사연이 있어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거였어요. 저 자신도 서른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요. 물론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넌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기는 했어요. 결국 그 말이 제게 영향을 미치게 됐고 운명처럼 그렇게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것 같아요.”
경북 상주 출신인 서영교 의원에게 면목동은 제2의 고향이다.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와 면목동에 자리를 잡은 데다 어머니 이영자 씨가 면목시장에서 오랫동안 ‘엄마네 옷집’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서 의원은 5남 1녀 가운데 다섯째 딸이다. 그가 자라던 1970~80년대는 아들 선호 사상이 강하던 시절이지만 그의 집안에서 장남 다음으로 애정을 받던 이는 바로 서 의원이었다.
“어릴 때 몸이 많이 약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심장판막에 염증이 생겨 오랫동안 입원을 하기도 했죠. 그 시기 저와 같은 증세로 입원했던 또래 환자 한 명이 사망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공부에는 관심도 없었고 잘하지도 못했어요. 부모님도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라셨고요. 다행히 그 뒤 건강을 회복하자 어머니가 너는 죽을 고비도 넘긴 사람이라고,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기대가 크셨죠.”
딸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건 그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당시 집에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에게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임신 중인 그의 어머니를 보고 스님은 “남자아이라면 세상을 호령하고, 여자아이라면 최소한 영부인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 말을 듣고 자랐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 부반장을 한 번 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평범한 소녀였던 그가 처음으로 리더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갑자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확 올랐어요. 덕분에 반장이라는 감투도 쓰게 됐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어요. 어찌 보면 이때의 경험이 이후 제 운명을 결정지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시 저희 학교는 총학생회장이 되면 매주 월요일마다 교장선생님에 이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훈시할 시간이 주어졌거든요. 매번 하나의 주제를 정해 많은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대중 앞에 서는 일이 익숙해졌죠. 또 총학생회장이 응원단장까지 겸하는 바람에 더욱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하게 됐고요.”
문제는 성적이 곤두박질을 쳤다는 것이다. 원래 경영학과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성적으로는 희망하던 대학에 갈 수 없게 된 것. 결국 진로를 수정하게 됐고 1983년 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 학생회 경험은 대학에서도 이어졌다. 학과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보니 단과대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장이 됐다.
이 시기 그는 평생을 함께할 운명의 상대도 만났다. 대학교 2학년 때인 1984년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장유식(52) 변호사를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것. 서 의원은 듬직해 보이면서도 때로는 장난기 많고 활달한 그에게 첫눈에 반했고 두 사람은 함께 학생운동을 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나중에 서울공대 학생회장이 된 그와 서 의원은 1986년 수배 대상에 오르게 되고, 서 의원이 치안본부에 잡혀가면서 한동안 이별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졸업 후 두 사람은 시민운동가로, 반핵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너무 바빠 조금 멀어졌다가도 이내 행성처럼 궤도를 벗어나지 않다가 1991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1998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장 변호사는 현재 인권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어머니 생전에 더 잘하는 모습 보이지 못해 아쉬워

1988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면목동에 ‘푸른소나무’ 무료 도서 대여실과 주부대학 문을 열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편 뒷바라지와 두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이 시기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가장 안타까워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2000년 그는 공공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이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잠시 멈추어두었던 자신을 위한 시계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 새천년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비로소 정치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2002년 당 부대변인으로 발탁되며 두각을 나타냈고 2007년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춘추관장을 역임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는 했으나 4년 뒤 당당히 ‘제2의 고향’인 중랑구갑에 출마해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부끄럽지만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막상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도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너라면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며 끈질기게 설득하셨죠. 19대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고도 망설였는데, 당시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셨던 어머니는 ‘내가 이 순간을 위해 40년을 기다렸다. 나 죽고 나면 후회한다’며 포기를 안 하셨어요. 어머니가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살아 계실 때 더 잘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지 못한 게 아쉬워요.”  
이제는 정치가 자신의 운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그는 지난 4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을 때는 불행한 이웃을 보면 같이 우는 일 외엔 해줄 것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보다 나은 삶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4년 지역구를 위해 발 벗고 뛰기도 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지닌 중랑구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중랑둘레길, 워터파크를 만들었고 범죄 예방을 위해 강남보다 많은 CCTV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법 없이도 사는 서민들이 당당하고 행복한 세상도 만들고 싶고, 일자리를 창출해 청년들에게 새로운 길도 만들어주고 싶고, 반값 등록금 시대를 열어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요즘 정치라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분들도 많지만 그럴수록 관심을 갖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셔야 합니다. 국회는 1년에 3백86조원의 예산을 다루는 기관이거든요. 내 세금이 어디로, 어떻게 재분배되는지 지켜보셔야 하잖아요.”
서 의원은 푸근한 인상만큼이나 소박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찾은 면목시장에서 상인들, 주민들과 얼싸안으며 정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런 모습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난해 메르스로 인해 열린 청문회 때는 황교안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정부의 무능을 질책해 ‘사이다 아줌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때로는 푸근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현안들을 처리해가는 그가 앞으로 열어갈 정치 완숙기의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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