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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STORY

카네기홀에 선 ‘흙수저’ 국회의원 김장실

글 · 김명희 기자 | 사진 · 조영철 기자, 김장실 의원 제공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2016. 01. 14

11월 초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한국의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무대에 선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장실 의원. 가난한 시골 소년이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훑는 한편의 영화 같은 그의 삶에서 노래는 희로애락을 함께한 든든한 친구였다.

미국 뉴욕시 57번가에 위치한 카네기홀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1891년 지은 세계적인 공연장이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석재로만 짓는 대신 벽체를 두껍게 만든 덕분에 음향이 뛰어나, 음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다. 공연장 앞을 지나던 행인이 한 음악가에게 “카네기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음악가가 “연습 또 연습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1백25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 무대에 오른 한국 가수는 조용필, 패티김, 이선희, 인순이 등 손에 꼽을 정도. 그런데 지난 11월 4일, 새누리당 비례대표 김장실(60) 의원이 ‘대중가요로 본 한국의 발전상(Lyrics in Kore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토크 콘서트를 통해 이 무대에 올랐다. 이날 2백70여 석을 채운 이들은 주로 교포 1, 2세대였는데, 공연 내내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가는 봄 오는 봄’,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같은 노래를 부를 땐 청중들도 함께 불렀다. 무대에 선 이도, 객석에서 따라 부르는 이들도, 고단한 세월을 돌아보고 한을 달랠 수 있었던 가슴 뭉클한 무대였다.
“처음에는 긴장한 데다 조명도 있고 해서 잘 몰랐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객석이 눈에 들어오는데, 다들 안경을 벗고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시더군요. 나중엔 저도 울컥해서 같이 울었습니다. 청중들이 다 같이 노래 부르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죠, 그날 카네기홀은 한국의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 문화부 차관, 예술의전당 사장 등을 지낸 문화통인 김장실 의원은 웬만한 대중가요의 발표연도와 가수는 물론 작곡가, 작사가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가요에 비친 한국의 시대상’이라는 주제로 종종 강연도 한다. 무엇보다 가수 저리가라 싶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고 또 좋아한다. 간드러지게 트로트를 불러젖힐 땐 듣는 사람도 같이 숨이 넘어간다. 한때 지방에서 교사를 하던 아내와 주말 부부로 지낸 적이 있는데, 아내가 그의 노래를 녹음해 테이프를 갖고 다니며 들었을 정도다. 카네기홀 공연 역시 지난여름 부산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즉석에서 성사된 것이다.
“그날 ‘부산과 대중가요’라는 주제로 토크를 하면서 노래를 7곡 불렀는데, 담당 PD가 그걸로 끝내기엔 너무 아깝다며 지인인 카네기홀 공연 기획자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이메일을 보내더라고요. 마침 한 달 후 공연기획자가 한국에 와 즉석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해 무대에 서게 됐죠.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기획사에 서툰 영어로 티켓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이민 1세대 가운데는 영어를 배울 틈도 없이 힘들게 사신 분들도 많으니까요. 수십 년을 그곳에서 고생스럽게 살면서도 가슴속에는 한국을 떠날 때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신 점도 놀랐습니다.”



공부조차 사치였던 가난한 소년

객석의 청중들이 노래로 하나가 돼 떠나온 고국을 그리는 동안 턱시도 차림의 김장실 의원 역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천막극장에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1964)를 보며 주제가를 따라 부르던 어린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다.
그의 고향은 경남 남해의 작은 마을이다. 어린 시절 그는 이성복 시인의 시 ‘남해금산’의 배경이 된, 주인집 딸을 사랑한 남자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상사바위가 있는 금산을 뒷동산처럼 오르곤 했다. 집 앞을 지나는 여객선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그에게 살아 있는 음악 교과서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부모가 끼니 걱정을 하던 끝에 자식들에게 해초라도 배불리 먹이고자 바닷가 마을에 둥지를 튼 줄은.
“어떻게 보면 저희 집안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와 궤적을 함께한다고 할 수 있어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몰락했으니까요. 조부가 살아 계실 때는 아주 잘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재산이 다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요. 결국 아버지는 스무 살에 빈털터리로 일본에 건너가 어머니와 사진결혼을 하고 형과 누나들을 낳았습니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20년 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역시 무일푼이었죠. 불행은 끝나지 않아 한국에 정착하고 난 뒤에는 3년간 대기근이 발생해 위로 누나 둘이 아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형편이 조금 풀려 고구마라도 먹게 된 시절에 제가 태어났죠.”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봤자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형제들은 소년 티를 채 벗기도 전에 배를 타거나 남의 집 머슴을 살아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 역시 자신의 삶이 형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마침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성실한 그를 눈여겨본 이웃집 세탁소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장실이가 초등학교만 마치면 데려다가 세탁 기술을 가르쳐주겠노라’고 약조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6학년 여름 어느 날, 그는 그만 공부 바람이 들고 말았다.
“방학이라 아침에 풀 좀 베고 바다에 나가 해수욕 좀 하다가 우연히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외지로 중학교에 진학할 친구들을 모아놓고 보충수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창밖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더니, 선생님이 ‘장실아, 이리 들어오니라, 니도 같이 들어라’ 하시는데,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길로 집에 돌아와 뒷동산으로 소 먹이러 가는데 그만 나도 중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확 들더군요. 그때부터 부모님을 조르기 시작해, 절대 고등학교는 안 간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겨우 중학교에 갔습니다.”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가슴속엔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금지된 욕망이 피어올랐다. 실질적인 가장이던 큰형에게 사정했지만 돌아온 건 주먹질. 갓 시집온 큰형수가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보내주자”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큰형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가기 전날, 술 한 자락 걸치고 돌아온 큰형에게 밤새 얻어맞고 퉁퉁 부은 얼굴로 새벽에 버스를 타러 나서면서 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만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엔 다들 못살았지만 저희 집은 특히 더 가난했습니다. 도저히 공부할 형편이 안 되는데 고집을 피우니 큰형님 마음도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고등학교(경남공고)에 붙어 부산에서 자취하고 있을 때 큰형님이 찾아와 ‘기왕 이리 됐으니 하고 싶은 공부 맘껏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제게 본인의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보름 후에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동중국해에서 그물에 휩쓸려 실종돼 시신도 못 찾았습니다. 끝내 형님과 이런저런 속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만, 큰형님이 그날 자취집에 찾아온 건 그간 미안했던 마음이 커서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형이 소원했던 대로 조카들도 잘 성장해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고통의 바다에 동반자가 돼줬던 노래

고등학교에 진학해 자취하는 동안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김장실 의원은 요즘으로 치면 흙수저 중에서도 흙수저인 자신이 학업을 마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남의 집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해주었던 작은형, 연탄을 넣어준 친구 아버지, 끼니를 챙겨주었던 이웃들, 참고서를 빌려준 선배들 모두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들이다. 영남대 행정학과를 거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방을 얻을 돈조차 없어 경기도 성남에 있는 친구 누나 부부의 단칸방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곳 역시 재개발로 철거당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가난한 판자촌이었다. 행정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동네 주민들이 소주 한 병, 막걸리 한 주전자씩 들고 친구 누나의 집에 모여 밤새 잔치를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출세해도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김 의원은 평생 그 일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1979년 12월 8일. 날짜도 잊지 못한다.
“사회에 나온 이후 받은 걸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보니 성실하고 청렴하게 공직 생활을 하는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고시 합격 후 당시 부산 사하구에 있던 경남도청에서 수습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적성에 잘 맞고 일이 재미있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문화공보부에서 시작해 대통령 비서실, 문화부, 국무총리실,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을 거치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음에도 변함없이 공직자로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건 이런 열정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받은 덕분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예술의전당 사장을 역임하며 3년 연속 70점대로 ‘미흡’ 수준이던 공기업 고객만족 평가를 90점대 ‘우수’로 끌어올렸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98점으로 최고점을 얻기도 했다. CJ그룹 · IBK 기업은행 · 신세계그룹 등 기업의 후원을 받아 토월극장, 체임버홀, 야외극장을 설립한 이도 김장실 의원이다.
“공직 생활을 돌아보면 1993년부터 1년 남짓 했던 문화체육부 어문국장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영어 일색이던 컴퓨터 용어 한글화를 추진했고, 한글 컴퓨터 서체를 다양화하기 위해 서체 경진대회를 열었고, 한국어 교재를 만들어 외국에 보급했죠. 공부든, 일이든, 남이 시키는 것을 억지로 하면 재미도 없고 인정도 못 받습니다. 어릴 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했던 것처럼, 일도 하고 싶어서 하니까 신이 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보이더군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는 문화기본법을 만들어 국민들이 좀 더 쉽게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각종 문화 행사를 펼치고 국공립 전시 관람 시설과 미술관, 공연장 등 일반 문화 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문화기본법에 근거를 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잠깐의 기쁨을 위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베토벤에게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고통’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고해를 건너는 데 가족 외에 가장 좋은 동반자는 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는 게 덧없을 때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로 시작하는 최희준의 ‘하숙생’이란 노래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에 와 닿고 위로가 됩니까. 제가 대중가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한 것도 돌아보면 힘들게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을 어루만지고 ‘이만하면 잘살아왔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그런 의미입니다.”
곧 국회 생활을 마감하는 김장실 의원은 수습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던 부산에서 제2의 정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마침 이곳은 그의 애창곡 ‘동백아가씨’의 영화 촬영 무대이기도 하다. 그가 지어갈 정치 인생의 새로운 매듭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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