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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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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식이 더 필요할까, 김희애

EDITOR 김지영 기자

2019. 12. 03

클래스가 다른 연기로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배우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소소한 행복을 즐기는 워너비 스타 김희애의 이중생활.

나이가 들면 도전을 줄이고 안정적인 길을 가기 마련이지만 배우 김희애(52)의 행보는 다르다. 고등학생이던 1984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연기에 입문해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킨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과감하면서도 도전적인 작품을 선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1월 14일 개봉된 다양성 영화 ‘윤희에게’도 마찬가지. 

‘윤희에게’는 우연히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윤희가 첫사랑의 비밀스러운 기억을 찾아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감성 멜로 영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먼저 공개돼 관객과 평단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특히 이찬진 포티스 대표의 아내이자 두 아들을 둔 엄마인 김희애의 생활 연기가 돋보인다는 평이 자자하다. 영화 속에서 그는 가슴에 돌덩이 같은 비밀을 간직한 채 홀로 딸을 키우는 ‘윤희’ 역을 맡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표정과 눈빛, 숨결에까지 담아낸다.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연애 소설 같은 이 작품의 따스한 여운을 안고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옅은 화장을 하고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그는 윤희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영화 ‘윤희에게’의 한 장면.

여배우로서 영화에서 민낯을 드러내기가 망설여졌을 법한데요.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죠(웃음). 근데 어떡하겠어요. 캐릭터와 같아야 관객들이 제가 누군지 잊어버릴 수 있잖아요. 작품 속에서 김희애라는 사람이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작품을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작년 겨울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뭍에 숨겨진 진주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게 흥행이 될까? 이 작품을 하면 나한테 좋을까?’ 같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요즘 찾기 힘든 깨끗한 감성을 담은 점에 매료됐죠. 



모녀의 로드 무비를 찍은 소감은 어떤가요. 실제로 두 아들을 키울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맛봤을 것 같아요. 

제 딸로 나오는 김소혜 씨가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헷갈릴 정도로 보이시해요. 쿨하고 씩씩하고요. 걸 그룹 ‘아이오아이’ 출신이라는 건 이번 영화를 하면서 처음 알았는데 스무 살 같지 않게 의젓하더라고요. 딸이라기보다 친구 같고 어떤 때는 저보다 더 엄마 같아서 의지가 되는 만남이자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딸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안 갖고 있는 걸 부러워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저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번 영화의 촬영을 앞두고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작품을 봤다고 들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감성이 굳어지나요. 

세상을 많이 알아가니까 어떤 면에서는 감정이 더 풍부해지고, 어떤 면에선 담담해지기도 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고요.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저는 눈이 자꾸 건조해져서 있는 감정도 없어지게 생겼어요(웃음). 

영화 속 윤희와 닮은 점이 있나요. 

거의 없어요. 제가 그동안 연기한 다른 배역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면을 연기할 때 끄집어낸다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카메라 앞에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 자신을 완전히 버리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 캐릭터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엄마와 딸이 담배라는 매개를 통해 교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그 장면이 참 좋았어요. 외형적으로는 일반화된 모습이 아니죠. 그런 상황이 정상적이지도 않고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너무 정상적으로 보이고 가식적이지 않아서 왠지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극 중 담배같이 일상에서 습관처럼 즐기는 ‘소확행’이 있다면요. 

혼자 걷는 걸 좋아해요. 제가 사는 동네를 걸으면서 작은 가게도 발견하고 가서 사 먹어도 보고 그런 재미가 쏠쏠해요. 으스름한 저녁에 걸을 땐 살짝 흥분이 돼요. 하루 종일 제가 해야 할 숙제를 다 마치고 나서 음악을 틀어놓고 음식을 준비한 후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와인 한 잔 마실 때도 너무 행복하고요. 

안주 없이 와인만 마시나요. 

영양도 보충해야 하니까 고기를 구워서 발사믹 식초를 넣은 올리브오일과 채소를 곁들여 먹어요. 제가 요즘 오이에 빠졌어요. 예전에는 영양가도 없는 오이를 왜 먹나 했는데 씻어서 썰어 먹으면 아주 아삭거리고 맛있어요.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해요. 경험을 토대로 중년 여성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면요. 

사실 어떤 운동이든, 어떤 미용법이든 실천하면 좋아요. 문제는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 데 있어요. 힘들어도 견뎌내면서 꾸준히 해야 해요. 하다못해 오이 팩이나 마스크팩이라도요. 요즘은 하루에 몇 분만 투자하면 되는 홈 케어 마사지 기기도 많더라고요. 저는 주로 집에서 자전거를 탄다든지 하는 식으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지중해식 식사를 즐겨요. 해산물을 익히기만 하면 되거든요. 조리 과정이 긴 건 할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아깝고 칼로리도 높아져요. 만들기 힘든 음식은 사 먹는 게 나아요(웃음). 


장을 자주 보는 편인가요.

한 번 장볼 때 1주일치를 사요. 신선한 재료를 사다 바로 먹는 것이 가장 좋지만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으니까 저장하기 전 구워 먹을 것과 데쳐 먹을 것, 날로 먹을 것을 분류해요. 그것들을 적정 저장 온도에 맞게 냉동실과 냉장실에 보관해뒀다가 먹는 것도 삶의 큰 즐거움이에요. 의류 쇼핑만 쇼핑이 아니에요. 슈퍼마켓 쇼핑도 재미있어요. 장보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힐링이 돼요. 배우가 대본만 본다고 좋은 연기가 나오나요? 사람으로 일상을 살아내야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동네를 걸을 때 ‘변장’하나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이 못 알아보도록 싸매고 다닐 때도 있어요. 제 소확행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평상시에는 화장을 거의 안 해요. 피부도 휴식이 필요하고, 내추럴한 걸 좋아하거든요. 여자는 정말 꾸미기에 달렸어요. 저도 집에 있을 때는 가관이에요(웃음).

남의 시선을 잘 의식하지 않는 편인가요.

의식하죠. 근데 의식해서 좋을 게 요만큼도 없으니까 뭐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원래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에요. 누군가가 사인을 청하면 제 손으로 제 이름을 쓰는 게 쑥스러워 민망해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내숭 떤다고 오해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저희 어머니가 저더러 “내숭 좀 떨라”고 하실 정도로 그쪽에 소질이 없어요. 이제는 수줍음도 많이 없어졌어요. 이 나이에 뭐가 그렇게 부끄럽겠어요(웃음).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20대 때와는 달라졌을 것 같아요. 

어릴 땐 철도 없었고 일하기도 싫어했어요. 대본 외우기도 싫고 밤만 되면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고 그랬어요. 경치가 좋은 데서 촬영을 하면 그런 생각이 더 났고요. 그런데 지금은 밤만 되면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고 멋진 곳에 가면 ‘여기서 촬영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지던가요. 

어릴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고, 지금은 제가 재미를 느끼는 작품을 선호해요. 그리고 전작과 비슷한 역할은 가급적 피해요. 기시감이 들면 보는 분들이 재미없잖아요. ‘내 남자의 여자’(2007)라는 드라마를 하고 나서 한동안 팜 파탈 같은 역만 들어와서 한참 쉬었어요. 본의 아니게 강제 휴식을 한 셈이죠. 

배우 생활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젊을 때부터 이 일을 오래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늘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직장 다니던 여성이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처럼 저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어요. 실제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 7년 동안 연기 공백기를 갖기도 했고요. 그 후에는 강한 캐릭터를 많이 하면서 ‘이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실컷 했는데 지금 관둔들 무슨 여한이 있겠나’ 싶었어요. 그래도 배우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 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계속 들어와요. 

30년 넘게 연기 외길을 걸어왔어요. 본인의 삶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의 모든 것이죠. 제 존재의 이유인 것도 같고요. 배우가 아닌 김희애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자연인 김희애로서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해요. 저를 지탱하던 것이 무너지거나 없어지면 너무 힘들잖아요. 

앞으로 작업을 함께하고 싶은 감독이나 배우가 있나요. 

너무 많죠. 근데 저는 지금 함께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항상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요. 남의 밥그릇을 왜 부러워해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세 번 먹으면 질려요. 지금 내 밥상에 있는 내 된장찌개, 내 밥이 최고의 보약이죠. 그래서 이번 영화의 임대형 감독도, 현재 찍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PD도 세계 최고라 여겨요. 이번 드라마에서 박해준 씨와 호흡을 맞추는데 연기가 되게 신선해요. 야구로 치면 변화구 같다고 할까요. 대충 성의 없이 연기하는 것 같은데 묘한 매력이 있어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뭔가요. 

자주 생각하는 말은 ‘감사하자’예요.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아진 것도, 이제는 밤을 새우지 않고 촬영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해요. 예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지금의 현실이 기적 같고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요. 이번 영화를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도 감사한 일이에요.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재미있으면 장르에 상관없이 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품이 다양성 영화에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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