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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양혜의 그 여자 그 남자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봄을 부르는 SSF 예술감독

기획 · 김지영 기자 | 글 · 진양혜 아나운서

2015. 05. 19

봄이 되면 아름다운 실내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제, ‘서울 스프링 실내악축제(SSF)’가 올해로 10번째 막을 연다. 해마다 주제를 선정해 국내외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연으로, 공연장뿐 아니라 고궁, 박물관, 전시장 같은 다양한 곳에서 적극적으로 청중을 만나길 10년. 이제는 견고한 마니아층이 생겼다. 그동안 SSF에 참가한 외국 연주가들 중에도 서울에서의 감흥을 다시 맛보기 위해 미리 공연 일정을 알아보고 스케줄을 비워놓는 열성파 게스트가 많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에도 좋은 실내악 음악제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벌인 SSF 예술감독,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현의 귀공자’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61) 선생의 사진은 고등학교 시절 한때 내 연습장 표지를 장식했다. 그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국내외 유명 스타들의 사진을 팔았다. 한 장에 5백~2천원 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기가 아주 좋은 상품이었다. 주윤발 · 유덕화 같은 홍콩 배우와 하이틴 트로이카로 불리던 소피 마르소 · 피비 케이츠 · 브룩 실즈, 또 전영록이나 이문세 같은 인기 가수들의 사진이 잘 팔렸다. 그중에서도 나는 강동석 선생과 당시 포항제철 소속 축구 선수였던 이길용의 사진을 구입해 연습장 커버에 넣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뱅 헤어스타일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경력도 멋지지만 부드럽게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덮은 뱅 헤어스타일에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지적이며 동시에 천진했고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말하자면 강동석 선생은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를 석권하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화려한 경력과 더불어 귀공자 같은 외모와 천진한 미소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중적 인기까지 확보한, 요즘으로 말하자면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돌이었다. 커피를 잘 못 마신다는 본인의 말씀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미지가 좋은 톱스타만 모델로 쓴다는 커피 광고에 등장해 부드러운 미소를 화면 가득히 선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강동석 선생은 실내악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환경에서 ‘서울 스프링 실내악축제(SSF)’를 서울을 대표하는 음악제로 키워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SSF가 자리 잡기까지 어려움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지만, “실내악을 듣는 대중의 귀가 좀 더 열리기를 바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마다 SSF를 준비한다”는 그를 만났다.

실내악에 담긴 미덕, 대중에 널리 알리고파

▼ SSF가 열린 지 벌써 10년이 됐네요. 축하드립니다.



어느덧 10년이 됐습니다. 올해는 ‘10(ten)’이라는 주제로 4월 27일부터 5월 9일까지, 지난 10년 동안 연주했던 곡들을 주제별로 다시 들을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 해마다 SSF를 보는데, 주제가 꼭 있더라고요.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주제가 없는 것이 더 편하겠죠. 하지만 SSF는 음악 애호가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서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는 분도 충분히 즐기실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제에 맞는 제목을 붙여 공연에 선명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어요. 실내악의 맛을 제대로 느낄 뿐만 아니라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잘게 썰어 요리하는 요리사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 저도 덕수궁에서 열리는 고궁 음악회 사회를 보며 SSF에 참여했는데, 해가 갈수록 관객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걸 느낍니다. 우연하게 고궁 산책 나왔다가 음악회를 즐기고 다음 해에 다시 오는 경우도 봤고요. 더구나 덕수궁 야외 음악회는 무료로 진행돼서 시민들의 호응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올해는 프로그램에 없어서 섭섭했어요.

저희 음악회는 티켓 수입만으로는 꾸려나갈 수가 없어요. 정부 지원금도 받고 기업 후원금도 받는데, 전보다 지원이 많이 줄었어요. 덕수궁 콘서트가 비용이 많이 들어 못하게 됐지만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경기도에서도 지원을 받아 ‘경기 실내악 축제’도 병행합니다. 실내악을 알리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죠.

▼ 섭외가 잘되지 않는 까다로운 연주자로 정평이 나 있는데, 유독 SSF를 위해서는 거리 연주도 하시고 모차르트가 썼던 은색 가발(파루크)을 쓰기도 하셨어요. 그 모습이 할머니 같다는 반응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하하. 실내악에 정성을 쏟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지휘자나 협연자가 이끌어가는 음악들과는 달리, 실내악은 소수의 연주자가 함께 창조하는 평등한 형태의 연주죠. 가장 큰 미덕은 음악적 우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외롭게 혼자 연습하던 연주자들이 실내악으로 교류할 수 있어서 즐겁죠. 서로 개성을 살리면서도 양보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가니까요. 팀 스포츠랑 비슷해요. 팀워크가 중요하죠. 실내악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인생을 배우는 음악입니다.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실내악의 경우 한 번 들으면 좋아지고 자꾸 듣고 싶어지는데, 잘 모르니까 공연장에 안 오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 견뎌낸 ‘음악의 신동’

▼ 독주 연주가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음악에 가치를 두고 헌신한다고 들었어요. 프로그램도 직접 다 기획하고, 50명 이상 되는 연주자들 일정도 챙기고 행정적인 일도 직접 보시잖아요.

그래서 힘듭니다. 하하. 주위에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노벨상 감’이라는 농담도 듣죠. 지난 9년 동안 축제에서 5백여 곡을 연주했는데, 모두 직접 선곡하고 모르는 곡들은 일일이 다 들어봤습니다. 사실 이렇게 준비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가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죠.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차이가 참 소중하고 의미 있습니다. 공연을 함께한 외국 유명 연주자들이 음악적으로 만족했다고 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은 다른 나라에도 이런 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 외로움을 많이 느끼시는 편인가요.

10대 시절부터 국제 콩쿠르 나가고 외국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죠.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 호텔방에서 TV 틀어놓고 연습했어요. 사람 소리가 들리면 좀 덜 서글프죠. 어릴 때는 김일 선수 레슬링 중계 방송을 좋아했어요. 저는 마이크에만 대고 녹음하는 음반 작업을 좋아하지 않아요. 무대에서 관객들하고 호흡하고 소통하는 게 즐거워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그는 지금도 외국에서 연주를 하는 경우 호텔방에 있기 싫어서 파리의 집에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현재 파리에는 역시 음악을 하는 프랑스인 아내(Martine Kang)와 딸이 있고, 서울에는 아들이 산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타지에서 느꼈던 감정적 경험이 예민하고 섬세한 성품과 만나 그의 음악적 색깔을 선명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연주를 사랑하는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그의 연주가 깊은 슬픔에 도달해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감정적인 동화를 불러일으킨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한창 때의 그의 연주에 대해 관능적이고 섹시하단 평이 꽤 눈에 띈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 연주자가 쉽게 들을 수 없는 평이다. 그는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그의 하얀 피부와 수려한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 어렸을 때부터 ‘음악의 신동’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세계적인 연주자 반열에 올라 화려하게 독주 연주자로서의 생활을 하셨지만-영국과 프랑스에서 발간한 유명 음악 사전에도 이미 이름이 올랐다-반면 외롭고 힘든 과정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신동은요, 무슨(웃음). 모차르트 정도는 돼야지요. 어린 사람이 재능을 보이면 신동이라고 쉽게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10년, 20년 이후에도 예술가로서 자기 음악을 하는 거죠. 신동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어릴 때부터 개인기를 익혀야 합니다. 음악적 에너지를 잘 관리해서 신선하고 열정적인 연주를 오래오래 해야죠.

연주보다 후학 양성이 더 어렵고 보람 있어

▼ 대학(연세대 관현악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신 지도 10년이 넘었네요. 교육과 연주는 많이 다르지 않나요.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교육이 연주와는 정말 다른 분야라는 걸 느낍니다. 연주를 잘한다고 잘 가르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연주보다 더 큰 책임감이 따릅니다. 교육은 정말 중요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죠. 가르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하고 생각도 더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음악적으로 발전하는 걸 보는 것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도 없을 거예요. 요즘 제자들 중에 차세대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몇 있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 부인도 음악을 하셨죠? SSF 때마다 뵀는데, 부인이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셨다면서요? 프랑스인임에도 한국인처럼 내조하는 스타일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아내는 피아노를 전공했어요. 현재는 프랑스 파리 근교 음악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요. 5년 연애하다 결혼했는데, 한국인 남편을 위해 고추장도 식탁에 올리고 된장찌개도 끓입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외국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하는 저를 잘 이해합니다. 저는 술을 못하지만 아내는 아주 좋아해서 저 대신 술자리에 참여해 스태프들을 챙기기도 합니다. 스태프들이 아내와 동행하면 더 편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좀 까다롭기는 한 모양이에요.

▼ 음악가로서 꼭 이루고픈 소망이 있나요.

SSF를 10년 지속한 것은 우리 문화계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근에 재정 지원이 현저히 줄어 안타깝습니다. 연주자들에 대한 보수뿐만이 아니라 운영 자체가 힘든 형편이 됐습니다. 안정적으로 기획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재원이 확보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음악을 사랑하는 연주자들, 관계자들이 자원봉사 수준의 보수를 받으면서도 유지해온 면이 없지 않습니다. 실내악 무대에 함께 오르는 연주자들 중 유명하다고 특별히 보수를 더 준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의 재정적 지원으로 저희 SSF가 안정적으로 열리고, 이를 통해 실내악을 즐기는 저변이 확대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궁극적으론 음악이 생활의 일부가 되는 데 기여하는 거죠.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강동석 선생의 왼쪽 목에는 까만 동그라미 점 같은 멍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선명한 증표다. 강동석 선생은 “멍의 색깔이 옅어지면 연습을 너무 게을리했구나 싶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파리 지하철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거리의 연주자는 그 멍을 보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연주자로서의 동질감을 반갑게 표했다고 한다.



◇ Epilogue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작은 목소리와 옅은 미소로 나누는 그와의 대화는 늘 유머와 여유가 흐른다. 하지만 예술감독으로서 기획을 할 때는 완고하게 타협 없이 밀고 나가는 뚝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단다. 강동석 선생과의 인연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었다. 그동안 헤어스타일은 변한 적이 없지만 미용실 가기 귀찮아 아내에게 대강 맡긴다는 말씀에 나의 연습장 표지의 위용은 사라졌고, 선생님을 자유롭고 멋져 보이게 하는 재킷은 몇 년째 눈에 익다 못해 이제는 낡았다 싶은 시점이 됐다. 하지만 음악 외에도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적 분야에 깊은 관심이 있는 그이기에, 해발 1800m인 알프스 중턱에서 매년 한 달간 열리는 프랑스의 대표적 음악 축제인 ‘뮤직 알프’를 키워내 15년째 지속하고 있고, 환우들을 위한 음악회 ‘희망 콘서트’도 10년 이상 꾸준히 열었다. 개인의 음악적 세계를 넘어 끊임없이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자 노력해온 그의 음악적 열정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되길 바란다. 그의 바람처럼 아름다운 도시 서울에서 세계 각국 음악가들의 음악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많은 관객이 그 음악을 부담 없이 향유해 우리 삶이 좀 더 여유롭고 풍부하며 다양한 감정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클래식 음악 연주회의 입장료는 비싸다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 비싼 경우가 많지만, SSF는 2만~6만원 선이며 공연 기간 중 무료 음악회도 열린다. 확언하건대 무엇보다 콘텐츠가 양질이다. 문득 삶이 무료하고 건조하게 느껴진다면, ‘기대 없이 우연히 찾은 어느 공연장에서 그동안 잊고 있던 봄밤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을 것’이란 나의 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사진 · 홍중식 기자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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