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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남자의 ‘하이힐’ 격인 넥타이에 승부수 던졌죠”

넥타이와 셔츠로 ‘강소기업’ 일군 윤종현 지엠아이 대표

글·김지영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2015. 02. 17

최근 대한민국 중소기업대상 고객감동기업대상을 수상한 지엠아이는 문어발식 사세 확장보다 전문성과 내실 다지기에 힘써온 패션업계의 강소기업이다. 1979년 창업 후 넥타이에 집중하며 남성 셔츠와 잡화 시장을 선도해온 이 회사의 중심에는 맨손으로 상경해 불굴의 도전 정신과 소통 리더십을 발휘해온 창업주 윤종현 대표가 있다.

“남자의 ‘하이힐’ 격인 넥타이에 승부수 던졌죠”
“메주콩과 쥐눈이콩을 반씩 섞어 만든 두유를 마셔보세요. 여기에 한두 통의 구운 마늘과 꿀을 넣고 매일 갈아 마시면 효과가 더 좋아지죠.”

손발이 차고 몸이 냉할 때가 많다는 기자의 말에 즉각 이런 반응을 보인 이는 의사도, 영양사도 아니다. 1월 16일 2015 대한민국 중소기업대상 시상식에서 패션 부문의 고객감동기업대상을 받은 지엠아이 윤종현(63) 대표다. 윤 대표는 건강두유 제조법을 한참 설명한 끝에 “건강 체질이 아니어서 건강에 관심이 많다. 내 건강 비결을 주위에 전파하는 것을 즐긴다. 좋은 걸 나누는 즐거움이 크더라”고 덧붙였다. 이런 정서를 지닌 오너가 이끄는 회사는 뭐가 다른지, 윤 대표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회사를 키워왔는지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독특한 염색 기법, OEM으로 회사 키워

패션업계에서 윤 대표는 뚝심 있는 기업가로 정평이 나 있다. 패션 사업을 시작한 1979년부터 지금까지 남성을 대표하는 두 아이템 넥타이와 셔츠 생산에 주력하며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지엠아이는 현재 레노마를 비롯한 5개 브랜드로 남성 셔츠와 잡화 시장을 이끌고 있다. 윤 대표는 그 가운데서도 레노마와 밴브루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레노마는 우리 회사에 없어선 안 될, 돈을 만들어주는 기술제휴 브랜드예요. 밴브루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뜬, 우리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갈 토종 브랜드고요. 두 브랜드의 공통점은 주력 상품이 와이셔츠와 넥타이라는 거예요. 자체 브랜드인 포체와 까빠넬로는 남성 토털 패션을 지향해 와이셔츠와 넥타이 외에도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어요. 발렌티노는 직수입 브랜드라서 구색 맞추는 용도로 넥타이만 들여와요.”



지금은 이들 브랜드를 통해 전국에 60여 곳의 매장을 갖춘 패션 그룹의 총수지만 원래 그의 꿈은 의사였다. 하지만 아픈 모친이 세상을 뜨면서 명의가 돼 어머니를 낫게 하겠다는 꿈을 접고 사업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성인이 된 후 막상 사업을 하려니 밑천이 필요했다. 20대 초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상경한 그는 원단 회사에 들어갔다. 낮에는 원단을 팔러 돌아다니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 모은 돈이 1백만원이 됐을 때 그는 일본 사람을 상대로 넥타이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돈으로 뭘 할까를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사업이 많지 않더라고요. 배운 게 원단 파는 재주밖에 없어서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넥타이 사업이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선 승산이 없겠더라고요. 뭔가 독특하고 기발한 경쟁력이 필요할 때 ‘십오리’라고 부르는 홀치기를 적용해 새로운 원단 염색법을 개발했죠. 홀치기는 원단을 실로 감아 그 부분을 뺀 나머지만 염색되게 하는 건데, 그걸 일본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일본에는 예로부터 ‘실로 옷을 1천 번 감으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얘기가 전해지거든요.”

홀치기로 만든 넥타이는 일본인 고객이 많은 호텔과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홀치기 작업을 일일이 할 수 없어 하청을 주기 시작했다. 윤 대표는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아내 이석희 씨를 만나 3년 교제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사업은 갈수록 번창했다. 윤 대표는 “아내가 의약신문사에서 비서로 일할 때 처음 만났는데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며 “결혼 후 아내는 디자인을 맡고(첫아이 출산 후 일본 유학을 떠난 그의 아내는 도쿄패션스쿨에서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고 현지 넥타이 회사에서 실무 경험까지 쌓았다) 난 영업을 했는데 물건을 아무리 만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잘 팔렸다”고 회고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그때는 대한민국이 살 길은 수출뿐이라서 정부에서 수출하는 기업을 적극 도와줬어요. 그 덕분에 수출이 엄청나게 잘돼서 우리나라 30개 그룹을 세계일류화기업으로 지정할 때 우리 회사도 그 안에 들어갔죠.”

그때 회사 이름은 ‘지엠(GM)’이었다. 젠틀맨(Gentleman)에서 따다 붙인 이름이었다. 윤 대표는 일본 백화점과 할인점 등으로 수출하는 넥타이를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제작해 납품하고 국내 시장에는 GM이라는 브랜드를 걸고 팔았다. 하지만 수출 호황기가 계속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국내 기반이 약한 것도 문제였다. 윤 대표는 삼성물산, 제일모직, 코오롱, LG패션 등 양복을 만드는 국내 기업에 OEM으로 넥타이를 납품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 덕에 매출이 급증하고 국내 기반도 튼실해졌지만 그의 불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OEM에만 의존한 넥타이 납품 방식은 경쟁사가 나타났을 때 버틸 힘이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 못해

자사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윤 대표는 OEM을 원하는 국내 패션업체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83년부터 발렌티노 루디, 폴로 랄프로렌, 란체티 등 해외 브랜드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기술 제휴로 생산된 넥타이를 국내 백화점에 납품했다. 인지도가 높은 글로벌 브랜드의 상표를 단 넥타이는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시장을 선점해나갔다. 그러나 해외 브랜드와의 라이선스 계약도 지속 가능한 안전띠는 아니었다. 윤 대표는 “외국 본사의 경영 악화로 주인이 바뀌면 재계약이 거의 불가능하다”며 “미리 대안을 찾아두지 않았으면 손해가 막심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폴로 랄프로렌과 계약이 만료된 뒤에는 지방시를 들여와 재미를 봤어요. 워낙 유명한 브랜드여서 반응이 좋았죠. 지방시 이전에 계약한 아쿠아스큐텀도 16~17년간 매출 상승에 기여한 효자 브랜드예요. 두 브랜드에서 손을 뗀 뒤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계약해둔 레노마 넥타이로 승부수를 띄웠어요. 2010년 봄에는 레노마 와이셔츠도 가져왔어요. 옷 만드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넥타이 판로를 잘 개척해둔 덕을 좀 봤죠.”

“남자의 ‘하이힐’ 격인 넥타이에 승부수 던졌죠”
30년간 넥타이 생산에 주력하던 그가 갑자기 셔츠 사업에 눈을 돌린 이유는 2000년대 들어 확산된 ‘쿨비즈’ 캠페인에 있다. 여름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도록 권유하는 이 캠페인의 영향으로 매출이 날로 줄어들자 그 나름의 타개책이 필요했던 것. 윤 대표는 “넥타이를 못 매게 하니 넥타이 없이 입어도 무방한 와이셔츠를 만들면 되겠다 싶어 셔츠 생산에 나섰다”면서도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넥타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남성에게 넥타이는 여성의 힐 같은 존재예요. 남성 패션을 완성시키는 아이템이니까요. 진짜 멋쟁이는 넥타이를 풀지 않아요. 제가 지금까지 넥타이 생산을 고집하는 이유죠.”

레노마 와이셔츠는 현재 국내 남성 셔츠 시장에서 매출 신장률 1위, 판매 실적 2위를 달린다. 그럼에도 윤 대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2010년 포체, 2013년 밴드루, 2014년 까빠넬로 등 자체 브랜드의 셔츠 라인을 줄줄이 론칭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여성 셔츠 브랜드인 ‘레노마 W’를 론칭해 그가 꿈꾸는 토털 패션 왕국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다.

“유럽의 멋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우리 와이셔츠 브랜드를 만들자, 디자인이 특이하거나 감도가 높아서 아무나 입을 수 없겠지만 그걸 소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팔자는 생각에서 탄생한 게 밴브루와 포체라면, 레노마 W를 통해서는 여성의 사회 활동에 걸맞게 바지나 치마 모두에 어울리는 셔츠를 만들 거예요. 이미 유럽과 일본에선 여성 셔츠가 크게 유행하고 있죠. 이를 발전시켜 남성 의류와 아기 옷까지 만들어볼까 해요.”

그는 제품의 경쟁력은 품질과 디자인에서 나온다는 신념으로 디자이너연구소에 15명의 디자이너를 두고 이들이 마음껏 창작 활동을 벌일 수 있게 지원한다. 디자이너들에게 평소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작지만 위대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상품을 판다는 마음을 먹지 말고 행복을 판다는 생각을 가져라. 그럼 우리 회사가 일류가 될 것이다.”

인생의 좌우명을 묻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내놨다.

“사람은 누구나 시도를 해야 합니다. 시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이 없고, 실패를 하지 않은 사람도 성공이 없어요. 저 는 사업을 하면서 실패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근데 그 돈을 벌어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1990년대 말 외환 위기가 닥칠 무렵에도 핸드백 브랜드 편집숍을 갤러리아 백화점에 오픈했다가 막심한 손해를 본 적이 있어요. 물건을 수입할 땐 1달러 환율이 8백원이었는데 대금을 지불할 땐 2천원이었거든요. 게다가 백화점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서 판매 금액도 회수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그 사업을 접었어요. 돈을 왕창 날렸지만 덕분에 넥타이 사업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었지요. 멀리 보면 기업이 가는 길에 도움이 됐으니 돈을 번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행복을 가져다준 셈이지요.”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흔들리지 않는 열정과 뚝심으로 외환 위기 한파마저 슬기롭게 넘긴 그에게도 아내와의 갑작스런 이별은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었다. 평생 친구이자 연인, 시인이었던 그의 아내 이석희 씨는 2013년 5월 지병으로 수술을 받은 지 4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윤 대표는 17~18년간 지엠아이에서 디자인실장으로 일하던 아내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던 날의 발언과 생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내는 자신이 디자인실장으로 계속 앉아 있으면 회사 발전에 한계가 있다며 감사직으로 물러났어요. 그러더니 자기 일을 하고 싶다며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을 5집까지 냈어요. 저한테도 ‘곰탱이 할 말 있어’로 시작하는 편지를 곧잘 보냈는데, 글 쓰는 재주가 남달랐어요. 하지만 아내가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은 저도 아내가 가고 나서 알았어요. 2013년 7월경 ‘조선일보’에 ‘누가 그랬나’라는 아내의 시 전문이 실렸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 무렵 말실수 파문으로 힘들어하던 기성용 선수가 페이스북을 폐쇄하며 그 시로 자신의 심경을 대신했더라고요.”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아내와 단둘이 살았던 윤 대표는 “집에 들어가면 책상에 앉아 늘 글을 쓰는 아내에게 심심하니 나랑 좀 놀자고 투정부린 적도 있다”며 그리움이 가득한 눈길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내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굉장히 맑고 반듯했죠. 그래서 시를 쓸 수 있었을 거예요. 집사람은 내게 영원히 보고픈 사람이에요. 저희 둘은 다시 태어나도 부부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아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제가 편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랬고요.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견디기 힘들 땐 ‘나도 따라갈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딸, 사위와 함께 살고 있어서 전보다 외로움은 한결 덜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리움을 떨칠 순 없을 거예요.”

“남자의 ‘하이힐’ 격인 넥타이에 승부수 던졌죠”
아내는 영원히 보고픈 사람

회사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아내 이씨의 든든한 내조와 더불어 중요한 성공 포인트가 있었다.

“사람을 귀히 여긴 게 여기까지 온 비결이에요. 기업은 사람이 움직이는 거예요. 시설만 좋으면, 기계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니에요. 기계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 사람이니까요. 저희 회사엔 창립 초기부터 30년 넘게 동고동락해온 직원이 많아요. 엄청난 스펙보다 성실한 자세와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죠. 그분들은 애사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도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꺼리지 않아요. 워낙 오래된 사이라 저와도 허물없이 지내고요. 평소 직원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사장과 직원의 차이는 직급과 책임지는 범위 정도가 다를 뿐이지 갑과 을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수평 관계를 중시해서 보고할 때도 앉아서 같은 눈높이에서 눈 맞추며 이야기하죠.”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패션 왕국의 미래를 봤다.

“요즘 기업 하는 사람들이 정말 못해먹겠다는 말을 많이 해요. 다 접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근데 제 생각은 달라요. 기업은 제가 없더라도 임직원이 먹고사는 터전이 돼야 하니까요. 미래의 일꾼들이 회사를 계속 키워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놓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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