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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나로호 다음은 달 탐사 도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김승조 원장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3. 02. 27

2013년 1월 30일.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나로호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우리 땅에서의 첫 로켓 발사. 성공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영광의 순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로호의 성공이 있기까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걸어온 그 숨 가쁜 여정을 김승조 원장에게 들었다.

“나로호 다음은 달 탐사 도전”


“이미 3차 발사를 두 번 연기한 상태라 노심초사였죠. 발사 당일에는 나로우주센터에 손님이 많이 와 있어 성공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마냥 정신없기만 했어요. 일주일쯤 지나고 보니까, 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때서야 ‘무슨 생각으로 이걸 하겠다고 나섰을까’ 싶을 만큼 엄청난 일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이 해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 역사적인 일은 2004년 러시아와 ‘우주발사체기술협력’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으로는 인공위성을 띄울 수준의 우주발사체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타국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학계의 반발은 엄청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나라 스스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승조(63) 원장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은 사람 중 하나였다. 기술력을 사오는 데도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두 나라 간 팽팽한 줄다리기와 기나긴 기다림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계속된 실패와 연기로 가슴 졸였던 시간
장고 끝에 2009년 시도한 1차 발사는 페어링(위성 보호 덮개)이 분리되지 않아 위성을 제 고도에 올려놓는 데 실패했다. 2010년에 진행된 2차 발사는 나로호가 나로우주센터를 떠난 지 137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 과정에서 나로호가 싣고 떠났던 카이스트가 만든 ‘과학기술위성-2호’ 두 개를 잃었다.
“나로호 1차 발사를 했을 때 TV 중계 해설을 했고, 발사가 실패한 후 조사위원으로 조사하고 자문위원으로 활동도 했죠. 그때마다 ‘왜 이걸 못하느냐’며 따지기만 했어요. 사실 비싼 돈 주고 발사체를 사왔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게 더 답답했죠.”
김 원장은 2011년 6월 ‘그까짓 것쯤 단번에 해내리라’는 마음으로 항우연 원장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안의 상황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과학자의 시선이 아닌 운영책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발사체 개발’이 단지 ‘기술의 문제’로만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가 밖에서 하던 일과는 규모부터 다른 거예요. 그동안 덩치 큰 연구과제도 맡았고, 국제 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슈퍼컴퓨터도 개발하면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더라고요. 국가 간 협력과 정치적인 문제까지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죠. 저는 이 자리에 앉은 지 1년 반밖에 안 됐지만 10년 동안 이 일을 해온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할 수 있겠더라고요.”
일단 2차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1차 실패가 페어링이라는 단순한 부품의 문제였는 데 반해 2차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더욱 연구원들을 지치게 했던 것은 러시아 사람들의 느긋함이었다고.
“우리의 특징은 스피드잖아요. 부품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주면 그날 밤 비행기로 보낼 수 있는 문제인데, 한 달이나 걸리더라고요.”
호기롭게 3차 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발사를 4시간 앞두고 연료와 헬륨 공급을 위한 발사체와 발사대 연결 부위의 기체 밀봉용 고무 실(seal)이 끊어져 발사가 연기됐다. 그리고 다시 발사대에 오른 나로호는 발사 예정 시간을 불과 16분 앞두고 과전류 문제로 발목이 잡혔다. 김 원장은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나로호 다음은 달 탐사 도전”

1 2 1월 30일 두 번의 실패를 딛고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다. 3 항우연 연구진이 1단·2단 로켓을 결합시키고 있는 모습.



“우리가 제작한 물건들이 너무 오래된 거였어요. 특히 2차 발사 때 우리 쪽 부품이 고장 난 상황이어서 그 뒤로도 여러 번 실험을 거치면서도 나머지 물건들도 무사할지 늘 걱정이었어요. 새로 받은 1단 로켓 또한 두 번의 발사 연기로 액체 산소를 넣다 빼기를 세 번이나 했으니까 혹시 1단 로켓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죠. 연료를 다 넣으면 132t의 압력이 가해지고 온도도 영하 180℃까지 떨어져요. 그때 기계가 늘어났다가 연료를 빼면 다시 줄어들거든요. 발사가 계속 연기되면서 더 이상 기계를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두려웠던 것 같아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나로과학위성’을 실은 나로호는 멋지게 하늘 문을 열고 날아올랐다.
“아마 이 과정에 참여한 엔지니어는 자다가도 일어나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몸에 익었을 거예요. 똑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했으니까요. 마지막에는 아주 능숙하게 예상 시간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마칠 수 있었죠. 이 능력을 앞으로도 멋지게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자력으로 인공위성 쏘아 올린 나라
김 원장은 이제 와 생각하면 자국의 힘으로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느냐, 타국의 기술을 배우느냐는 선택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러시아와 기술 협력을 제휴할 당시 한국도 독자적인 발사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13t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1단 액체 로켓이었다. 일단 발사가 돼 하늘을 날았으니 ‘성공’으로 기록됐지만 연구진들이 기대하던 고도에는 형편없이 미치지 못한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그 로켓 엔진으로는 인공위성의 궤도에 못 미칠뿐더러 대기권 밖으로의 진입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계속 실험을 반복하고 연구에만 매진했다면, 지금쯤 나로호가 가진 170t급 추진력을 단독 기술로 확보했을지, 혹은 그러지 못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은 지금보다 험난했으리라 생각해요. 발사체 개발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추진해야 하는 일인데, 일정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예산 문제에 등 총체적 난국에 부딪힐 수도 있었을 거예요.”
러시아에서 170t의 추진력을 가진 액체 엔진 1단 로켓을 사오고, 우리는 7t급 고체 킥모터 2단 로켓을 만든 것이 지금의 나로호다. 그래서 항간에는 나로호 발사가 일종의 ‘쇼’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는 러시아의 기술로 발사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 원장은 나로호가 하늘을 날았던 1월 30일 저녁 뉴스에서 앵커가 했던 말을 예로 들면서 나로호 발사가 남긴 성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SBS ‘8시 뉴스’의 김성준 앵커는 클로징 멘트로 “외국에서 비싸게 사온 기술로 로켓 쏜 게 뭐 그리 자랑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앞으로 의사, 변호사, 연예인으로 가득한 우리 아이들 장래 희망 목록에 항공우주과학자가 추가될 수만 있어도 나로호 발사는 값어치 있는 성공일 겁니다”라고 했다.
“과학기술자가 되는 것은 참 험한 길이에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도 그래요. 입학생 중 70%가 처음에는 우주공학을 하겠다고 하거든요. 1년 지나면 20%도 안 남죠. 2학년 말쯤 되면 우주고 공학이고 다 귀찮으니 경영대학으로 옮긴다고 해요. 적성에 안 맞아서 그런대요. 그건 핑계고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을 독려할 수 있는 꿈이 필요한 거죠(웃음).”
툭 까놓고 말하면 우리가 로켓의 설계도나 구성 원리를 몰라서 러시아에서 사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똑같이 만들라고 하면 지금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만들 사람도, 만들 공장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란다. 로켓을 만들어도 실험할 수 있는 장소가 없고, 실험을 진행할 기술자도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우주항공기술자들이 IT 기술 분야 등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주과학자로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사온 RD-191 로켓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는 RD-171 모델은 아예 교과서에 나와 있어요(웃음). 그걸 완제품으로 만드는 것은 기술을 안다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엔지니어, 생산 라인, 부품 업체가 있어야 해요. 수많은 하청 업체가 각 부품을 생산해 내고 그것을 결함 없이 조립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그것은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총체적인 인프라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직접 발사체를 연결해 발사하는 과정까지 해본다는 것에도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한국형 우주발사체 개발, 더 나아가 우주 개발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국민적 관심과 합의를 꼽았다. 이미 세계 9개 국가에서 발사체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뒤늦게 발사체 개발에 뛰어든 것도 ‘발사체 사업’이 우리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나라는 발사체 개발이 늦었느냐고들 하던데, 예전에는 다들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그 필요성을 깨닫고 그때야 시작한 거죠. 그 당시에는 로켓 개발에 주력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반면 인공위성은 이제 다른 나라에 완제품을 판매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에 올라섰어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늘 퀀텀 점프(계단식 발전)를 해왔거든요. 이번 나로호 발사를 통해 우리의 발사체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할 것입니다.”

한국형 우주발사체, 한국의 우주 시대를 열다

“나로호 다음은 달 탐사 도전”


현재 대전에 위치한 항우연의 창고 안에는 1년 8개월 전에 완성된 ‘아리랑-5호’가 잠들어 있다. 나로호가 쏘아 올린 나로과학위성이 100kg의 소형 위성이었던 것에 비해 ‘아리랑-5호’는 1.4t의 전천후 지상 관측 위성이다. 이 위성을 띄워줄 발사체를 찾고 있는 중이다. 나로호 이전까지 우리는 타국의 발사체에 위성을 실어 보냈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발사체 기술은 갈 길이 멀다. 2021년을 목표로 나로호를 잇는 한국형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이미 30t급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1단 액체 로켓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발전시켜 75t급의 발사체를 만들고, 이 발사체 4개를 연결해 1.5t급 인공위성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발사체를 완성시킬 계획이다. 김 원장은 2021년이었던 당초 계획을 2018년으로 앞당기고 싶다고 했다.
“75t급 발사체의 설계가 컴퓨터상에서는 모두 끝났어요. 주요 부품 제작도 마무리된 상태고요. 남아 있는 것은 실험이에요.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 설계의 주요 요구 사항들을 하나하나 체크해야 하는 거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 실험 단계를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시험 시설의 확보예요.”
일단 한국형 발사체가 완성되면 달 탐사도 곧 이뤄질 거라고 했다. 굳이 지구에서 달로 직접 갈 필요도 없다. 일단 달 탐사선을 인공위성 궤도에 올려놓은 후 적당한 때와 위치에 맞춰 로켓을 다시 점화해 달을 향해 2차 발사를 시도하면 된다.
그는 항우연에서 이미 한국형 발사체를 넘어 2040계획을 설립했다고 했다. 2028년에는 국민적 합의만 따라준다면 우리가 만든 유인 우주선 달나라에도 갈 수 있다고. 그다음은 말 그대로 우주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는 거다.
“전 세계가 드디어 우주를 상업화하고 있어요. 우주 궤도에 조만간 상업적인 우주 관광이 시작될 거예요. 인공위성이 커지면 우주 정거장이 되고, 사람들이 지낼 만큼 편안한 우주 정거장이 되면 그것이 곧 우주 호텔이 되죠. 일단 우주 시대의 기반을 다지려면 그런 것들을 쏘아 올려야 해요. 그러려면 엄청난 양의 발사체가 필요하겠죠. 미국의 모하비 사막에는 60개가 넘는 우주 산업에 관련된 벤처 회사가 있어요. 상업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우리는 이제 인공위성의 상업화를 넘어 우주발사체의 상업화를 꿈꾼다. 그 금액을 수치로 예상하는 것도 버거울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다. 김승조 원장의 눈은 우리나라가 걸어가야 할 우주 시대의 청사진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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