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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14년 만에 귀환 패션계 대모 이신우

“부도, 남편의 죽음… 한꺼번에 닥친 시련 속에 디자인으로 다시 서다 ”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2012. 05. 15

1990년대까지 한국 패션계에서 이신우(ICINOO)란 이름은 최고의 아티스트이자 고급 브랜드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함께 회오리처럼 몰아닥친 시련이 그를 쓰러뜨렸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패션이었다. 일흔한 살, 컬렉션 무대에 다시 등장한 이신우.

14년 만에 귀환 패션계 대모 이신우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인근에 위치한 디자이너 숍 박윤정 아뜰리에. 일요일에는 매장 문을 열지 않지만 노장의 디자이너는 일찌감치 나와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의상과 소품들을 정리 중이었다. 젊은 감각의 밀리터리 룩에 동그란 패션 안경을 걸친 이신우(71)의 모습은 여전히 스타일리시하다.
1977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최초 참가, 1990년 도쿄 컬렉션 최초 초청, 1993년 파리 컬렉션 최초 참여 등 한때 이신우는 한국 패션 디자이너의 대표주자였다. 1980~90년대 김혜자, 김자옥, 정영숙 같은 최고 여배우들이 그의 단골이었고, 디자이너 브랜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사로 키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IMF 외환위기 때 회사가 부도를 맞아 ‘이신우’ ‘이신우옴므’ ‘오리지널리’ ‘영우’ ‘쏘시에’ ‘이신우 컬렉션’ 등 6개 브랜드를 채권단에 넘겨주면서 그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단 브랜드가 홈쇼핑에서 팔리고 있지만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박윤정 아뜰리에’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둘째 딸 박윤정 씨가 운영하는 매장으로 이곳에서 이신우는 지난 14년간 눈물로 한땀 한땀 옷을 지었다. 그리고 4월 7일 ‘2012-2013 F/W 서울패션위크’에서 드디어 자신의 새 브랜드 ‘CINU(시누)’를 내걸고 공식 컴백을 알렸다. 무대를 감상하는 이들조차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무대를 마치고 난 뒤 새벽과 아침이 동시에 찾아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제가 만든 옷을 무대 위에 선보였다는 게 감격스러운 한편, 이렇게 쇼를 열었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제가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거예요.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마음가짐은 똑같아요. 힘겨운 상황에서도 새로운 걸 창조해내는 것, 그게 바로 디자이너의 본질이니까요.”

“엄마, 이거 다 못 끝내면 집에 못 가요”

14년 만에 귀환 패션계 대모 이신우


패션쇼 준비는 전적으로 딸 박윤정 씨가 도맡아 했다. 영화·연극 의상을 전문으로 한 박씨는 패션쇼와 같이 시청각이 총동원되는 분야에서 남다른 연출력을 지녔다고 한다. 모델 워킹부터 음악 선정, 조명까지 어느 것 하나 박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다고. 이신우는 “나는 뭔가에 몰두하면 다른 일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못하는데 박윤정(이신우는 자신의 딸을 매번 박윤정이라 칭했다)은 멀티플레이가 잘되더라”며 웃었다.
“디자인도 잘 안 풀리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쇼 날짜는 임박해오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결국 박윤정이 ‘엄마, 오늘까지 이거 못하면 집에 안 보낼 거예요’ 하고 협박하대요(웃음). 어찌나 어이없고 웃음이 나던지, 둘이 한참 동안 배꼽 잡고 웃었어요. 그래도 협박이 통했는지 결국 그날 새벽까지 중요한 일 하나를 끝마쳤어요.”
그는 최근 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SFAA)에도 재가입했다. 지난 1월 SFAA는 총회를 열고 그의 재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1990년 SFAA 창립멤버인 이신우는 1995년까지 SFAA 컬렉션에 11회나 참가했으며 1996년 탈퇴했다가 16년 만에 다시 공식 활동을 하게 됐다.
“SFAA에서 탈퇴할 때는 패션을 위한 더 빠른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교만했던 거죠.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저 자신을 온전히 비우기 위해 노력했고, 저를 다 비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컬렉션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머리를 채우더라고요. 앞으로 의무감에서 참가하는 컬렉션이 아닌, 오랜 생각 끝에 자연스럽게 나온 결론이 패션이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실제로 사업이 망한 뒤 그렇게 힘든 순간에도 결국 그가 찾은 건 패션이었다. 두문불출하며 손뜨개를 했고, 박윤정 아뜰리에 기술고문을 자처하며 끝까지 디자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말한다.
“일생 동안 이뤄놓은 게 0으로 돌아갔으니까요. 제가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박윤정이 그대로 보면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한 번은 ‘엄마 절대로 지하철역으로 다니지 마세요’ 하더라고요. 지하철역에 내려가면 제 이름을 단 물건들이 매대에서 싸구려처럼 팔린다고요. 제가 낳은 자식 같은 브랜드인데, 억장이 무너졌죠. 홈쇼핑을 보면서도 ‘어머, 어머 얘 저것 좀 봐라. 내가 만든 것처럼 물건을 판다’ 하고 수선을 피우면 딸이 또 ‘이제 그만 좀 해요’ 하고 채널을 돌려버렸어요. 하지만 사업이 잘못된 건 전적으로 저희 쪽 잘못이니까, 이제는 현실로 받아들였어요.”



병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응원해준 남편
사업이 부도나고 6년 뒤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국회의원 3선을 지낸 남편 박주천 씨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 1년 반 수감 생활 중 폐병을 얻은 남편은 결국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그의 마음은 또 한 번 크게 무너져 내렸다. 세상에 대한 원망도 컸다고 한다.
“이미 한 차례 큰 돌로 가슴을 얻어맞았는데, 조금 나으려고 할 때 더 큰 일을 당한 거죠. 평생 남편을 많이 의지하고 믿어서 상실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남편 역시 디자이너로서 제 삶을 전적으로 지지해줬던 사람이에요. 2006년 일회성에 그치긴 했지만 박윤정의 노력으로 패션쇼를 한 번 연 적이 있는데, 그때 남편은 투병 중이었어요. 병실에 들어서면 남편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손으로 허공에 ‘일’ 하고 쓰고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가서 패션쇼 준비를 하라며 재촉했어요. 결국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온 날 종이에 ‘당신, 이제부터 불같이 일어날 거야’ 하고 메모를 하더군요.”

14년 만에 귀환 패션계 대모 이신우

남은 인생을 오로지 디자인을 위해 한 발씩 뚜벅뚜벅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이신우.



남편은 이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잠시 상념에 젖은 이신우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는 작업대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남편의 사진과 십자가, 성경책을 가리키며 “그동안 숱하게 이사를 다닐 때마다 가장 먼저 챙긴 물건이 이 세 가지”라고 말했다.
그에게 남편은 더없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이자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이신우’ 브랜드가 급속도로 번창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남다른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이신우는 “남편은 패션 비즈니스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박주천과 이신우는 각각 서울대 공대, 이대 미대 재학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두 사람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물어보자 이신우의 얼굴에 금세 홍조가 돌았다.
“남편은 ‘미팅의 창시자’예요. 대학교 2학년 때 YMCA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쌍쌍파티를 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남편은 소규모로 건전한 만남의 장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처음 주선한 미팅이 서울대 화공과와 이대 불문과 학생들의 만남이었어요. 당시 남편과 제 친구가 짝이 됐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신우야, 드디어 너의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를 알아냈어’ 하면서 남편 얘기를 하더라고요(웃음). 프랑스 시인처럼 지적이고 분위기 있는 남자를 좋아했거든요. 실제로 봤더니 남편은 정말 제 이상형이었어요. 갸름한 얼굴에 눈도 크고 정말 잘생겼더라고요(웃음). 당시 저는 학교에서 멋쟁이로 꼽힐 만큼 멋 내는 걸 좋아하고, 늘 스케치북을 품고 다니며 그림만 그렸는데, 남편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처럼 아는 것도 많고 학교 신문 편집위원까지 맡고 있어서 사회비판적인 발언도 잘했어요. 그 모습에 완전히 매료됐죠.”

14년 만에 귀환 패션계 대모 이신우

4월 7일 ‘2012-2013 F/W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해 14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디자이너로 일어선 이신우. 절친 탤런트 김혜자가 축하 차 패션쇼장을 찾았다.



딸에 이어 손녀까지, 백년기업을 향한 열정
결국 이신우는 대학교 3학년 때 결혼을 하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둘째를 낳고 남편이 충남 청양에 있는 금광에 현장감독으로 취직해 내려가면서 이신우는 하루아침에 시골 아낙 신세가 됐다. 당시 유부녀임에도 아가씨 못지않은 패션 감각을 지녔던 그는 어느 날 모처럼 서울로 올라왔다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다고 부렸지만 서울에서 생활할 때와 달리 촌스러운 아줌마로 변해 있었던 것. 그 길로 그는 당장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
“아이도 셋이나 낳았고, 드디어 제 뜻을 펼칠 시기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바로 밑에 여동생이 이대 불문과를 나와 다시 패션 디자인을 배운 뒤 의상실을 하고 있었는데, 그 밑에 들어가서 디자인을 시작했어요. 저도 대학 때부터 순수예술보다는 상업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디자이너의 인생이 시작됐어요.”
1968년 ‘오리지널리’라는 브랜드를 세운 이신우는 남편이 사표를 내고 사업에 합류하면서 승승장구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만들어내며 빌딩도 지어 올렸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영원하지 못했다. 사업 실패와 남편의 사망, 모든 시련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그는 우울증과 불면증, 대인기피증 등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는 운동과 신앙으로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잡념을 잊으려고 걷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먼저 가고 한 1년 정도 지났을 즈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작정 걸었어요. 밤 12시 넘어서까지 한남대교를 걷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조금씩 몸이 좋아지고, 마음도 천천히 치유되더라고요. 탤런트 김혜자와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동창이라 친한데, 부도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어느 날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저녁을 맛있게 차려주더라고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집을 나섰는데, 혜자가 갑자기 저를 부르더니 ‘신우야, 돌지 마’ 하더군요(웃음). 그때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어찌 보면 혜자 말대로 돌아버리지 않은 게 기적 같기도 해요. 이번에 패션쇼 할 때도 혜자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응원해줬어요.”
비록 불투명한 미래지만 이신우에게는 ‘백년기업’을 이어가리라는 새로운 목표가 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의상 디자인을 부전공한 손녀딸 또한 할머니,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의류업체 디자인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외국의 명품 브랜드를 보더라도 몇백 년 역사를 이어가는 곳이 많잖아요. 장인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CINU’라는 브랜드를 백 년이 흐른 뒤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사후에도 가슴 뿌듯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기 위해 남은 인생 동안 서두르지 않고 그저 뚜벅뚜벅 한 발자국씩 전진해나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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