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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신 스틸러 윤제문 영화 같은 반전 인생

“막노동, 공공근로 전전하던 힘든 시절 딛고 명품 배우로 당당히 서다”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2. 04. 18

그의 연기는 때로는 서늘한 칼날 같고 때로는 묵직한 저울추 같다. 주연급 배우들조차도 그와 맞붙는 장면에선 긴장을 하고, 대본에 사인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안방극장에 나타나 미친 존재감으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괴물 같은 배우 윤제문의 정체를 벗겨봤다.

신 스틸러 윤제문 영화 같은 반전 인생


‘아이리스’의 냉철한 첩보원 박상현, ‘마이더스’의 비열한 재벌 2세 유성준, ‘뿌리 깊은 나무’의 밀본 본원 정기준, 윤제문(42)은 단 세 작품으로 가장 주목 받는 신 스틸러(훌륭한 연기력이나 개성을 발휘해 주연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조연)가 됐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3월 말부터 방영되는 ‘더킹투하츠’(이하 더킹)에서 이승기·하지원과 함께 캐스팅됐다. 이승기는 “다른 연기자들에게 윤제문 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맞붙는 장면에서 상대 배우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다”고 말했다.

김희애의 사인 요청, 이승기를 긴장시킨 연기 괴물
사실 윤제문은 외모만 보면 배우의 포스와 거리가 멀다. 결코 작지 않은 얼굴에 관리받지 않은 듯 거친 피부, 보통 체격에 살짝 나온 배까지,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지만 한 가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은 예외다. 그 눈빛은 때로는 그를 순한 양(아이리스)으로 만들기도 하고,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의 캐릭터(마이더스)로 둔갑시키기도 하며, 정체를 숨긴 악당의 괴수(뿌리 깊은 나무)로도 만든다.
‘더킹’에서는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군산복합체 클럽M 회장 김봉구 역을 맡았다. 김봉구는 복수심과 권력욕에 불타지만 ‘허당’ 같은 면모도 있는 이중적인 인물. 연출을 맡은 이재규 PD는 이를 한마디로 ‘글로벌 사이코’라고 정의했다. 김봉구는 유성준, 정기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캐릭터이자 탄탄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배역이다. 윤제문이 이처럼 강한 배역만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실제로 작품 섭외가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 시나리오(강한 배역)만 주시고, 들어오는 족족 다 하니까(웃음). 이번엔 글로벌한 악역이라 영어 대사가 많아서 사양했는데, 감독님이 영어는 짧게 해도 된다고 해서 출연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대본이 많이 수정됐더라고요(웃음).”
윤제문은 영화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우아한 세계’에 잇따라 조폭으로 출연한 뒤 실제 조폭으로부터 “나와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듣자 한동안 조폭 연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조폭 연기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날 선 연기를 보면 캐릭터 연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진다. 윤제문은 “그냥 한다. 대본에 써 있는 대로,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이번에는 정말 ‘미친놈’이라고 해서 그렇게 연기한다”며 웃었다. 당연한 걸 뭘 그렇게 묻느냐는 듯한 반응이다. 하지만 ‘더킹’에서도 연기에 관한 한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전망. ‘글로벌 사이코’라는 캐릭터에 걸맞게 광기 어린 마술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2회에 등장할 장면으로, 클럽M 창립 기념 행사에서 김봉구가 손님들을 위해 깜짝 마술쇼를 선보이는 것. 윤제문은 이 장면을 소화하기 위해 마술사로부터 상자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마술과 사람이 없어지는 마술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말할 때 입을 크게 벌리지 않는다. 웅얼거리는 말투, 말꼬리를 흐리는 습관까지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는 듯한 모습이다. 장황하게 연기관을 늘어놓기보다는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짜내 연기에 몰입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아니 어쩌면 연기는 구구절절하게 말로 풀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윤제문의 인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나이 서른에 선 무대, 빠져나올 수 없어

신 스틸러 윤제문 영화 같은 반전 인생




윤제문은 1995년 스물다섯 살 때 처음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아역 배우는 이름을 날리다 못해 인기가 시들해질 때고, 꽃미남 배우라고 해도 전성기는 지났을 시기다. 자라면서 연기의 ‘연’자도 생각지 않았던 그는 군 복무 시절 친구 따라 문성근·강신일 주연의 ‘칠수와 만수’를 보러 갔다가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이와 관련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제가 방위를 했는데, 일요일에는 방위도 쉬잖아요, 그래서 난생처음 연극이란 걸 보러 갔는데 ‘와, 세상에 저런 게 있구나’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랐어요. 배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들이 울고 웃고 움직이는 게 ‘끝내준다’ 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지나다니면서 연극 포스터가 눈에 띄더라고요. 군 제대 후 형과 천안에서 레코드 도매업을 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어요. ‘이제 뭘 하지’ 생각하다 불현듯 ‘연극이나 해볼까’ 싶었어요.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때 아니면 나중에는 못할 것 같아 뛰어들었죠.”
그는 극단 산울림에 입단해 처음 1년은 스태프로 일하며 무대 작업도 하고, 포스터도 붙이다가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나이 서른에 처음 시작한 일인데 희한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멋도 모르고 무작정 덤볐지만 못한다는 소리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선배들이 ‘어라, 저놈 봐라’ 할 만큼 제법 잘했다. 연기가 점점 더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연희단거리패에서 아내도 만났다.

신 스틸러 윤제문 영화 같은 반전 인생

배역에 따라 다양한 얼굴로 변신하는 윤제문. 그는 연기 외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천생 배우다.



“아내는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라는 작품에 함께 출연한 동기였어요. 처음에는 연습에 집중하느라 별 신경을 안 썼는데 어느 겨울날 긴 코트를 입고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지갑의 동전을 고르는 모습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림처럼 단아했다고 할까…. 자연스럽게 집에 바래다준다고 하면서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고, 그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가 어떻게 사귀게 됐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사랑을 시작했지만 가난한 연극배우 부부에게 결혼식은 사치였다. 혼인신고부터 하고 함께 살던 두 사람은 1998년 둘째를 낳은 후에야 예식을 올렸다. 그것도 IMF 외환위기 직후 모두가 힘들 때 서울 영등포구청에서 1백만원만 내면 결혼식 일체를 해결해준다고 해서 가까스로 한 것이었다. 이후엔 본가에 얹혀살았다. 결혼 전 윤제문이 쓰던 방에서 아내와 두 딸까지 네 가족이 생활했다. 그의 아내는 ‘힐링캠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시댁에 살아서 굶지는 않았는데 그 외 생활이 아예 없었고 밥만 먹고 살았어요. 남편도 용돈도 없이 차비만 겨우 갖고 나가고 그것도 없으면 걸어다녔어요. 아이에게 분유는 아예 먹이지도 못했고 기저귀도 천 기저귀만 썼는데 외출할 때 편의점에서 두 개짜리 기저귀를 샀던 게 기억이 나네요.”
배우의 꿈도 소중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릴 수 없었다. 윤제문은 건설 현장 막노동, 공공근로, 야간 순찰, 호프집 아르바이트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야간이나 새벽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연극 무대에 섰다.
“힘 빠지는 건, 공연 끝나고 술을 못 먹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바에서 술을 따라주며 홀짝홀짝 마시기도 했죠. 일 끝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가면 차가 끊기고… 그런 일도 많았어요. 그때 제 별명이 하이에나였어요. 돈은 없고 술은 먹고 싶으니까 밤만 되면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찾게 되더라고요. 술자리에 아는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찾아가서 한잔씩 얻어 마시곤 했죠.”

남편으로선 포기했지만 연기자로선 존경한다는 아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생활은 점점 더 바닥을 쳤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영화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그에게 2002년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으로 장편 영화 ‘정글쥬스’에 캐스팅된 것. 출연료로 목돈 5백만원을 받았다. 방바닥에 돈을 툭 던져주며 아내에게 “맘껏 쓰라”고 하던 날, 그의 어깨도 으쓱 올라갔다. 그리고 2004년 ‘남극일기’에 캐스팅되면서 분가도 했다. 비록 18평 임대 아파트였지만 그와 아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연기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영화 ‘비열한 거리’ ‘괴물’ ‘열혈남아’ 등에 잇따라 캐스팅되면서 돈도 벌고 인기도 쌓았다. 드라마 ‘마이더스’ 때는 동생이자 라이벌로 출연했던 김희애가 “연기를 너무 잘하신다”고 극찬하며 대본에 사인을 요청해 당황한 적도 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영화 ‘이웃집 남자’로 부산영평상 남자 우수연기상을, 2011년에는 ‘마이더스’로 SBS 연기대상 특별기획 부문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는 SBS 연기상 수상 후 “집에 들어가면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내와 건강하게 자라주는 딸들, 고맙고 사랑한다”며 모든 공을 가족에게 돌렸다. 그의 아내는 “남편으로선 포기한 부분이 많은데 연기자로선 정말 존경한다. 연기상 받는 걸 보면서 많이 울었다. 아이들도 아빠가 TV에서 이름 말해줬다고 많이 자랑스러워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인터뷰 내내 윤제문은 많이 피곤한 듯 질문을 들을 때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더킹’ 촬영 때문에 피로가 쌓인 것 아니냐고 묻자 “어제는 촬영이 없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최근 몇년 간 잇따라 작품을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운동도 하고 홍삼으로 건강관리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몸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쉬지 않고 달릴 생각이다. 지금껏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자꾸 잘한다고 하니까, 사실은 그렇지 못한데… 부담이 되네요. 지금까지는 연기가 재미있는데, 이걸로 돈을 버니까 책임감도 생기고…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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