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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박완서 작가 떠난 지 1년, 맏딸 호원숙이 말하는 위대한 유산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시되 늘 공정한 저울 같았던 어머니, 당신의 따뜻한 품이 그립습니다”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2012. 02. 15

지난해 1월22일 새벽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 “부드러운 흙 속으로 스민” 고(故) 박완서 작가. 문단의 어머니이자 시대의 상처를 보듬는 넉넉한 품을 지녔던 고인의 1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작업을 기획하고 있는 맏딸 호원숙 작가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들었다.

박완서 작가 떠난 지 1년, 맏딸 호원숙이 말하는 위대한 유산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고 박완서 작가에게 빚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인해 상처를 치유받았으며, 세상 사는 도리를 깨쳤고, 가슴이 따뜻해진 기억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가슴이 무거웠던 건 폭설 때문이 아니라 더는 그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됐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1주기를 맞아 데뷔작인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 ‘나목’ 특별판(열화당)이 제작되고, 소설 전집(세계사)이 재발간되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추모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사의 중심에는 네 딸(외아들 호원태씨는 88년 사망) 중 맏딸인 수필가 호원숙씨(58)가 있다.
1월 중순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호원숙씨는 유행이 지난 털 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가 입으시던 것”이라고 했다. 박완서 작가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할 때 원고 심부름을 했던 첫 독자이자 가장 가까운 말벗이었으며, 작가가 가장 의지했던 피붙이 호씨는 지난 1년간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는 “그동안 어머니가 남긴 책과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오래, 더 깊숙이 어머니의 품에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하던 집안의 혁명 같았던 사건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에 ‘나목’ 당선
1월 말 재발간되는 전집 22권(기존 전집에 ‘아주 오래된 농담’‘그 여자네 집’ 추가)의 교정을 고인에게서 이어받아 마무리짓고, ‘나목’ 특별판 별쇄본에 실릴 ‘어머니와 나목’을 쓴 이도 바로 그다. 그는 지금도 박완서 작가가 ‘나목’에 당선돼 여성동아 기자들이 서울 보문동 집으로 방문한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0년, 늦은 여름날이었다.
“예고도 없이 기자 서너 명이 들이닥쳐 당선 소식을 알려주셨는데 어머니는 마치 될 줄 아셨다는 것처럼 담담하셨어요. 나중에 글을 많이 쓰고 유명해지신 후에도 그때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셨어요.”
반면 그의 머릿속은 오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이제는 자신만의 어머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른 (문학의)세계로 멀리 달아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교차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저희 5남매의 너무나 충실한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였어요. 어머니가 문학적으로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가족들 앞에서 항상 화가(박수근)에 대한 글을 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당선은 저희 집에선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죠.”
호원숙씨에 따르면 박완서 작가는 남편이 운영하던 청계천 공장으로 새참을 지어 나르며 2층 공간에서 틈틈이 ‘나목’을 썼던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은 ‘나목’을 쓰는 동안 가족이나 이웃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호씨는 고인의 등단 전 자신의 집을 지상 낙원에 비유했다. 30평 정도 되는 ‘ㄷ자’ 모양 한옥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고, 집 안 곳곳은 어머니가 사랑과 정성으로 빚어낸 온기가 가득했다. 고인은 햇빛이 잘 드는 마당 한가운데에 꽃을 심고, 아이들 옷은 뜨개질을 하거나 직접 시장에서 천을 끊어다 만들어 입혔다. 양재 노트에는 딸들의 사이즈별로 만든 옷본이 가지런히 끼워져 있었으며, 요리책을 보고 별미를 만들어 술을 좋아하던 남편의 반주상에 올렸다.
“어머니는 늘 반복되는 가사일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새롭게 바꾸곤 했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옷도 개성이 있어서 저희 자매들은 좀 특별하다고 느꼈어요. 어머니 속에 잠재해 있던 창조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1931년 북한 개성의 외곽인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 선생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고인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토끼전’이나 ‘박씨부인전’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고인도 자녀들에게 시를 읊어주거나, 소설 속의 한 장면을 들려주며 자연스럽게 문학의 길로 인도했다.
“대학 시절 한시를 줄줄 암송하셨다고 해요. 우리나라 시도 1백여 편 외고 계셨는데, 비가 오는 봄밤에는 저희를 무릎에 누이고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로 시작하는 변영로 시인의 ‘봄비’를 읊어주시곤 하셨죠. 김수영 시인의 시도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또 소설의 내용을 얼마나 재밌게 들려주셨던지, 그 장면이 궁금해서 책을 다시 펴보곤 했죠. 방학 때는 형제들이 저마다 책꽂이에서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책을 꺼내 방에 들어가서 읽곤 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지금껏 살아오는 데 큰 바탕이 되고 있고요.”
집에 회초리가 있긴 했지만 맞아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가끔 동생들이 투정을 부릴 때 “그치지 않으면 저 회초리로 혼내겠다”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실제 매를 들지는 않았다는 것. 대신 그 옛날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자녀들이 착한 일을 하면 하나하나 기록해뒀다가 크리스마스 같은 날 선물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저희들 공부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시험을 보고 오면 어떤 것을 틀렸는지 꼼꼼히 확인하시고, 일본 수학 문제집도 번역해 풀게 하시고…, 세속적인 치맛바람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극성스러운 면도 있으셨죠(웃음). 특히 맏이를 잘 교육시키면 그 밑의 아이들은 저절로 교육이 된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제게 정성을 많이 들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확실히 믿고 맡겨주시는 부분도 있어요. 중학교(경기여중) 때 마음 놓고 놀았더니,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3학년 말에는 거의 꼴찌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성적표에 부모님 도장을 받아가야 하는데 어머니께 보이기가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성적표를 못 보여 드린다. 대신 고등학교 올라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해 성적을 만회하면 보여드리겠다’ 했더니 어머니가 아무 소리 안 하시고 도장을 내주시더라고요. 어머니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물론 만회하는 데 한참 걸리긴 했지만요(웃음).”
자녀들에게는 특정한 덕목을 강조하기보다는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관찰해서 용기가 부족한 아이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잘하고 있는 아이에게는 겸손을 심어줬다. ‘박완서식 맞춤 교육’이다.

박완서 작가 떠난 지 1년, 맏딸 호원숙이 말하는 위대한 유산

1 신혼 시절의 박완서. 오른쪽은 시어머니. 2 맏딸 호원숙씨를 안고 있는 박완서. 3 남편 호영진씨와 결혼을 약속한 후 함께 찍은 사진. 4 칠순 잔치에서 딸, 손녀들과 함께. 5 구리 자택에서 햇살 좋은 오후 호원숙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6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된 후 남편과 함께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머니 되고 싶어 해”
“어머니는 높은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셨고,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대하는 법이 없으셨어요. 모든 생명은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고 여기셨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외손주가 여섯인데,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달씩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서 정성껏 산구완도 해주시고 아이들도 돌봐주셨죠. 생명을 맞이하는 어머니만의 통과 의례였던 셈이죠. 돌아가시기 1년 전 설날에 세배를 받은 후 아이들을 앉혀놓고, ‘할머니도 너희들에게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손주들이 되기 위해 노력해주면 좋겠다’고 덕담을 해주셨어요. 저희 어머니가 평소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셨어요. ‘할머니도 가끔은 막 살고 싶은데, 너희들 때문에 참는다’고(웃음)….”
이런 박완서 작가의 교육 덕분에 그의 남매들은 반듯하게 잘 자랐다. 하지만 1988년 잇따라 큰 시련이 닥쳤다. 남편이 폐암으로 사망한 데 이어 석 달 후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였던 막내아들 호원태씨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나중에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한 말씀만 하소서’ 등 자전적 소설과 일기에서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심정을 풀어놓았지만, 호씨는 그때 어머니가 받았던 고통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옆에서 지켜보기조차 힘들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 일이 있은 후 부산에 있던 맏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전까지는 어머니가 저희 집에 와서 하루 넘게 묵은 적이 없었는데 그때 부산으로 함께 가자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마’ 하셔서 저도 놀랐어요. 한 달 정도 저희 집에 계시다가 이해인 수녀가 계시는 성베네딕토 수녀원으로 옮기셨어요.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아픔이었을 텐데, 겉으론 내색을 안 하셨어요. 가족 모두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아시니까. 그땐 어머니가 다시 글을 쓴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살아 계신 것만으로 감사했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머니께 글을 쓰는 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는 어머니도 그 운명을 원망하셨을 테지만 결국은 그것이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암 진단받고도 담담했던 어머니, 마지막 말씀 “매사 감사하다”

박완서 작가 떠난 지 1년, 맏딸 호원숙이 말하는 위대한 유산


고인은 1998년부터 경기도 구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글을 쓰며 산수유 백일홍 같은 나무를 키우고 마당을 가꿨다. 누구보다 성실한 작가였던 그는 글을 쓰거나 밭을 매거나 잠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고,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조화를 이루려고 애썼다.
고인이 담낭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건 2010년 가을 정기검진을 통해서였다. 암 선고를 받고도 고인은 “암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유별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고 담담해했다. 정밀 진단 결과에 따라 곧바로 수술을 받고 담낭과 간의 일부를 제거했다. 수술 경과는 좋았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회복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 전날까지 말씀도 많이 하시고, 제가 목욕을 시켜드렸더니 좋아하셨는데…,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어요.”
호씨는 고인과의 마지막 시간을 떠올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이별이었기에 유언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고인은 투병 중 딸들에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일기에도 “매사 감사하다”고 썼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내가 많이 회복돼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죠. ‘봄에 꽃피면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시기도 했어요. 아마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셨을 거예요.”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작품을 정리하느라 책에 파묻혀 살고 있는 호씨는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 생각하며 숨은 그림 찾듯이 책을 읽었더니,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처럼 어머니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야기들이 진실하고 그 소설 속 엄마의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처럼 자신이 지나온 시대를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쓴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어머니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인물과 초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개성 상인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 자본의 형성을 다룬 ‘미망’은 어머니 윗대 분들의 손을 잡아 그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 작품이고요. 또 어머니 소설엔 재미있는 언어와 놀라운 비유들이 많아요. 그러한 것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갈고 닦고 빚어진 것이라서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신선하죠.”
호씨에게 어머니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였다. 평소 더없이 다정했지만, 문학 앞에선 가족에게도 틈을 내주지 않을 만큼 차갑고 고독했다. 고인이 평생 작품에서, 그리고 삶에서 보여준 세상과 사물에 대한 균형 감각은 그 철저한 고독에서 기인한 것이다.
“세상에 대해 바른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 계셨으면 할 때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져요. 어머니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늘 공정하셨어요. 어떤 때는 그래도 ‘내 편 좀 들어주지’ 하는 날이 있었는데 절대 안 그러셨어요(웃음). 그래서 어머니가 어떤 말씀을 해주시면 오히려 불안했던 일도 안심이 되고, 판단력이 생기곤 했는데…. 누구 편도 들지 않아 고독하셨지만 그 덕분에 지금처럼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참고도서 |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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