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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FE IN HOKKAIDO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 | 황경성(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2012. 02. 03

1월호에서 밝혔듯이 2011년 봄 나는 일본 홋카이도 북쪽 나요로 시 닛싱(日進) 역의 명예역장이 됐다. ‘꽃의 역장(花の驛長)’으로 불리는 명예역장이 되면 역사와 플랫폼을 마음껏 꽃으로 장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시골 무인역을 제라늄으로 장식할 생각에 잔뜩 부풀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2008년 인적조차 드문 북부 소도시 외곽에 ‘카페 닛싱’을 열자마자 내 머릿속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듯 카페와 마주 보고 있는 닛싱 역을 어떻게 꾸밀까 궁리하기에 바빴다. 처음부터 이 무인역을 꽃으로 장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2010년 1년간 영국 런던대학에 객원교수로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카페 닛싱과 무인역에 가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먼저 하루에 세 번 삿포로행 특급열차가 정지하는 큰 역인 나요로 역을 찾아가 역장과 면담을 요청했다. 참고로 일본 철도는 1982년 1백14년의 국영 철도(Japan Railway)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분할 및 민영화를 단행했다. 그 가운데 홋카이도 지역을 담당한 회사가 홋카이도JR이다. 역무원이 없는 닛싱 역은 나요로 역의 미야우치(宮內) 역장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허락을 구했더니 뜻밖에도 일이 쉽게 풀렸다. 이미 철도회사가 ‘꽃의 역장’이라고 불리는 명예역장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꽃의 역장이 되면 역사(역 건물) 주변을 꽃으로 장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물론 이용객이 많고 역무원이 있는 큰 역의 지역 동호회들이 화단을 가꾸거나 화분을 놓는 것이 대부분으로, 닛싱과 같은 무인역에 ‘꽃의 역장’을 임명하는 일은 드물다고 했다. 미야우치씨는 ‘꽃의 역장’ 신청 기간이 끝났지만 일단 가능한지 알아보자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며칠 뒤 미야우치씨는 내게 ‘꽃의 역장’으로 임명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임명장을 들고 카페 닛싱까지 찾아왔다. 그 후 그는 역 주변의 잡초를 베어주는 등 자신의 일처럼 도와줬다.

꽃을 사는 데 써달라고 기부하는 주민들
‘꽃의 역장’이 된 후 어떤 꽃으로 어떻게 장식할지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닛싱 역은 도심에 있는 역들과 달리 들판 한가운데 있어 바람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웬만한 화분을 놓았다가는 강풍에 굴러떨어지거나 깨지기 십상이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철도회사 측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어린 딸이 놀기에도 좁아 보이는 플랫폼에 화분 놓을 적당한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플랫폼의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만든 철제 난간에 화분을 매달면 된다! 당장 철책에 매달 수 있는 꽃바구니를 특별 주문했다.
다음 할 일은 역사를 꾸밀 꽃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시가지 가로등에 걸린 꽃바구니와 가정집 정원, 카페 등에 장식된 꽃을 유심히 보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다. 이 기차역에는 수수한 듯 화려하고 소담스러워서 눈에 잘 띄는 제라늄이 적격이었다. 그런데 나요로 같은 소도시에서 갑자기 많은 양의 제라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라늄은 풍성하게 심어야 아름답고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2시간씩 차를 몰고 주변 도시로 가서 제라늄 화분을 하나둘씩 사들여 철책에 매달았지만 역사는 여전히 휑뎅그렁했다. 문제는 무인역의 배경이었다. 빌딩이 배경이 되는 도심과 달리 플랫폼 뒤가 울창한 산이어서 웬만한 꽃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작은 꽃바구니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긴 사각 화분에 제라늄을 소담하게 심어 플랫폼에 늘어놓기로 했다. 제라늄을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이즈음 내가 무인역의 ‘꽃의 역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대학 동료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고, 우리 카페의 단골손님인 구라모토(倉本)씨가 꽃을 구입하는 데 써달라며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중학교 교사로 정년퇴직을 한 구라모토씨는 한국 마니아여서 카페 닛싱을 자주 찾았다.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1 겨울마다 홋카이도 닛싱 역은 눈으로 뒤덮여 앞뒤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2 미야우치씨(오른쪽)로부터 ‘꽃의 역장’ 임명장을 받는 모습.



해바라기 화단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는 사람들
제라늄 화분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도 서서히 달라졌다. 먼저 무인역 구간을 운행하는 한 칸짜리 기차의 기관사들이 역사와 플랫폼 뒤편 공간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그들은 근무가 없는 날을 이용해 화단을 조성하고 씨를 뿌렸으며 차로 물을 길어와 정성스럽게 꽃밭을 가꿨다. 사람들은 플랫폼 바로 옆 건널목 앞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한번은 도쿄의 중견 광고 대행 업체 직원들이 CF를 촬영할 홋카이도의 기차역을 물색하다 닛싱 역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반나절가량 역 주변을 촬영하더니 이틀 뒤 다시 들러 본사에 3곳의 후보지 가운데 닛싱 역을 첫 번째로 추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한겨울 카페 마당에 허리까지 쌓인 눈을 파내 굴을 만든 뒤 그 안에 초를 켜놓았다.



닛싱 역이 꽃으로 장식되기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나 홋카이도JR로부터 연락이 왔다. NHK(일본국영텔레비전방송)에서 취재 의뢰가 왔다는 것. 이 역을 꽃으로 장식한 이유가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 만큼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로 다음날 NHK 담당자가 전화를 했다. 프로그램과 취재 방향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듣고 인터뷰 날짜를 물으니 불과 나흘 뒤란다.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화분이 더 있어야 하고 제라늄과 조화를 이룰 다른 종류의 꽃도 필요했다. 지금 있는 제라늄도 이웃 도시까지 가서 사온 것인데 당장 그 많은 꽃을 어디서 구할까? 꽃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았다. 구세주는 이웃집 고야(古屋)씨네.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이 노부부는 우리 가족이 나요로에 정착한 후 철마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 가을에 첫 수확한 찹쌀까지 살뜰하게 챙겨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고야씨 부인은 촬영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커다란 밀리온벨 화분 두 개를 통째로 줬다. 붉은색의 밀리온벨은 붉은 작은 꽃이 흘러내리듯 자라 멀리서 보면 마치 파스텔로 칠해놓은 듯 아름답다. 철길 건너에 사는 미즈마(水間)씨도 자신이 키우던 큰 화분 두 개를 흔쾌히 양보해줬다. 그는 해마다 시내 곳곳의 도로변을 장식할 수천 그루의 꽃을 염가에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분들의 도움으로 닛싱 역은 마지막 붓 터치에 확연히 달라진 수채화처럼 산뜻해졌다.
사실 닛싱 역과 ‘꽃의 역장’이 NHK에 소개되기로 하자 가장 분주했던 것은 홋카이도JR이었다. 내가 정비가 필요한 부분을 말하자마자 그들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더위 먹은 엿가락처럼 부러지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던 철책이 순식간에 자로 잰 듯 반듯해졌다. 역 안내판도 다시 도색이 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딱 한 군데. 바로 역사였다. 역무원 없이 여행객들이 잠시 눈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역사의 지붕은 너무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않은 탓에 검붉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바래 피눈물처럼 얼룩져 있었다. 철도회사에 요청했던 건물은 시가 관리하는 거라 보수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해명했다. 나는 그길로 시청 담당 부서를 찾아가 이 무인역이 TV에 방영되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올 테니 보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담당자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이 일에 관한 예산이 책정돼 있지 않아 해줄 수 없다는 것. 철도회사와 시민들이 이렇게 팔을 걷어붙였으니 시까지 나서면 삼위일체가 돼 모양새가 좋지 않으냐고 설득해봤지만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시민은 꽃을 심고, 철도회사는 철책을 고치고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어느 여름 닛싱 역을 찾은 관광객들의 한가로운 모습.



시청을 다녀온 날 밤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일한우호협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마침 부시장을 만났다. 부시장과는 예전 대학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지나가는 푸념으로 페인트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페인트는 사서 줄 테니 작업할 인부는 알아서 하라는 내용이었다. 옆집 고야 할아버지는 주민들이 공동 모금을 해서 칠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마무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자비로 인부를 고용해 역사 지붕을 칠했다. 방송 촬영 이틀 전에 이 모든 일이 진행됐다.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닛싱 역의 모습이 방송을 통해 널리 전파됐고, 재방송을 봤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 뒤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고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도 종종 방송 내용을 화제 삼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꽃의 역장’으로서 확신과 용기가 생겼다. 다음 구상은 런던에서 눈여겨봐둔 가로등형 폴에 꽃바구니를 걸어 플랫폼 양끝에 세우는 것이었다. 철도회사에 이런 제안을 했더니 금세 플랫폼 앞뒤 쪽에 두 개의 폴을 세워줬다.
1월 홋카이도에는 웬만한 어른 허리 높이까지 눈이 내렸다. 온통 하얀 동토의 세상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미 봄이 왔다. 폴 위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머릿결처럼 흘러내리는 꽃을 떠올리는 동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무인역을 지역 활성화의 모델로 활용하는 방안이다. 홋카이도의 연구 조성금 지원 기관에서 지역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어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연구 계획서 작성에 착수했다. 이 연구비를 받는다면 닛싱 역을 더 많은 꽃으로 꾸미는 등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안식처인 카페 닛싱에서 시작된 변화는 인적 드문 시골 무인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다음 호에는 카페 닛싱과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꽃의 역장’ 첫 번째 미션 제라늄을 찾아라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는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 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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