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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의 도전

‘리니지’ 신화의 주인공 김택진 한국 프로야구에 변화구 던지다

글·정혜연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2011. 05. 17

시가총액 5조원의 게임회사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30대 초반 맨손으로 회사를 차린 지 10여 년 만에 국내 주식 부호 10위권에 진입해 화제를 모았다. 벤처 신화의 주인공인 그가 돌연 프로야구 제9구단 창단을 선언했다. 왜 지금 하필 ‘야구’일까?

‘리니지’ 신화의 주인공 김택진 한국 프로야구에 변화구 던지다


자그마한 체구에 까만 피부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한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긴장된 목소리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야구는 학창 시절 학업에 지친 그에게 활력이었고, 사회인이 된 후 맞닥뜨린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는 용기의 원천이었으며, 지금은 자신이 이끄는 회사의 미래가 됐다고 말한다. 지난 3월 마지막 날, 게임회사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44)는 경남 창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한민국 프로야구 제9구단의 구단주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제게 야구란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영화이자 삶의 지혜서와 같은 존재예요. 투수가 던지는 볼 하나에서 드라마를 느끼고, 긴 레이스 끝에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기도 하죠. 또 감독의 용병술이나 선수들의 팀워크는 삶을 사는 데 지혜를 주기도 해요. 엔씨소프트가 다른 구단주처럼 큰 그룹인 것도 아니고 후발주자로 나서는 터라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철저히 준비해 내실 있는 프로야구팀을 만들어 국민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꿈, 그 하나만으로 지금 저희는 충분히 가슴 벅차고 또 결국 해내리라 믿고 있습니다.”

남과 다른 길 선택하니 ‘대박’ 있더라

‘리니지’ 신화의 주인공 김택진 한국 프로야구에 변화구 던지다


게임회사에서 프로야구단을 창단한다는 게 뜬금없어 보이지만 김택진 대표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는 줄곧 의외의 선택을 해왔기 때문이다.
1985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김 대표는 재학 시절 대학 선배인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등과 함께 문서작성 프로그램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89년 ‘아래아한글’이 탄생했고 세상에 선보인 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발의 주역인 이찬진 사장 등은 ‘한글과 컴퓨터’를 세웠지만 김 대표는 대학에 남았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입사한 그는, 미국 보스턴 R·D센터에 근무하며 미래를 내다볼 기회를 얻었다. 지금은 일반화된 인터넷의 초기 형태를 경험했던 것. 자연스레 네트워크 분야에 눈을 뜬 김 대표는 90년대 초반 미국 벤처기업들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던 중 김 대표는 돌연 사표를 던지고 창업에 나섰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2년 전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회사 동료가 괌으로 출장을 갔다가 사고로 딸을 잃은 후 옛 생각이 나서 도저히 회사를 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같이 그만두고 회사를 만들었는데, 창의성을 발휘하면서도 세계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에 게임을 선택했다”고 한다. 97년 그렇게 엔씨소프트가 세워졌다.
초창기 엔씨소프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회사였다. 게임 개발을 뒷받침해줄 투자자를 찾지 못하자 김 대표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직원들 월급을 주고 서버를 샀다. 사무실에 빗물이 새는 통에 서버가 젖을까 염려한 김 대표는 빗소리만 들려도 회사로 뛰어갔을 정도였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가 왔다. 그 무렵 더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도 없다는 심정으로 총력을 기울인 끝에 98년 ‘리니지’가 탄생했다.
하지만 대박을 터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인터넷게임’이라는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엔씨소프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 초고속통신망이 빠르게 구축되면서 온라인게임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던 PC방이란 새로운 개념의 놀이터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온라인게임이라고는 ‘리니지’와 ‘스타크래프트’가 전부였던 시절, 젊은이들 사이에서 ‘리니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김 대표는 한국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대만·북미·일본 등지로 ‘리니지’ 서비스를 확장해 나갔다. 꾸준히 수익을 올린 끝에 2010년 4분기를 기점으로 ‘리니지’는 누적매출 1조5천억원을 돌파, 벤처·게임업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만화책 보며 변화구 연습하던 아이

‘리니지’ 신화의 주인공 김택진 한국 프로야구에 변화구 던지다

김택진 대표는 2007년 ‘천재소녀’ 윤송이 박사와 비밀리에 재혼해 화제가 됐다.



온라인게임 ‘리니지’로 신화를 창조한 김택진 대표가 야구단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며 아련한 추억을 꺼내 들려줬다.
“초등학교 때 ‘거인의 별’이라는 만화를 우연히 접했는데 저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만화를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투수로 만들려고 완장을 차고 다니게 하고, 지나가는 기차 안 승객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시력을 키우게 해요. 저도 그렇게 한답시고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채 등교하고, 어떻게 하면 커브볼을 던질까 야구 관련 서적을 보며 연구했죠. 공터의 벽을 상대로 커브볼 연습을 한 끝에 자유자재로 변화구를 던질 수 있게 됐고, 동네 야구시합에서 구원투수로 활약했을 정도였어요(웃음).”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야구는 김 대표에게 희열을 안겨줬다. 장충구장 옆에 위치한 동북중학교를 다닌 터라 방과 후 친구들과 숱하게 야구장을 드나들었고, 폐타이어를 집 앞 전봇대에 달아놓고 방망이를 휘두르며 야구를 즐겼다. 그러던 중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김 대표는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을 프로야구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이종도 선수의 첫 만루 홈런으로 프로야구가 시작됐죠.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MBC 청룡의 팬이 됐지만 저의 우상은 롯데 최동원 선수였어요. 아직도 84년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끝까지 살아남아 4승을 이뤘을 때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가을의 기적’이라 불렸던 롯데의 승리를 보며 최동원 선수가 진정한 영웅이란 생각까지 들었죠.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프로야구는 제 삶의 일부였어요.”
대학 입학 후 컴퓨터에 빠졌고, ‘아래아한글’을 개발한 뒤 엔씨소프트를 창업하기까지 김 대표는 일에 몰두해 살았다. 그러던 중 또 야구에 희망을 얻던 시기가 왔다. 97년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은 좌절과 비탄에 빠졌는데 김 대표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박찬호 선수의 승전보는 모두에게 용기를 줬고, 김 대표 역시 큰 위로를 얻었다고.
“그때 처음으로 야구라는 스포츠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울릴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죠. 이후 또다시 제 심장을 뛰게 한 사건이 벌어졌어요.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과 WBC에서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수차례 이기고 준우승을 한 것이었죠. WBC에선 안타깝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김인식 감독의 굳게 다문 입술과 한국 선수들의 뜨거운 눈물은 지금도 제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어요.”
이후로 김 대표의 머릿속은 야구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한 계기로 한국 야구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바로 프로야구 제9구단의 구단주가 되는 것인데, 이는 허구연 아시아야구연맹 위원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정기적으로 사회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엔씨학당’에 허 위원장이 강연자로 초빙됐고, 강연이 끝난 후 차를 마시던 중 야구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김 대표는 어릴 적 꿈이던 야구를 향한 열정을 드러냈고, 허 위원장은 한국 프로야구에 제9구단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 일을 김 대표가 해주길 권했다.
“저 혼자만의 판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회사 식구들에게 물어봤어요. ‘우리가 야구단을 만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하더라고요. 우리 회사가 그런 일에 도전한다면 끝까지 해보겠다는 직원들의 마음이 한데 모아졌고 의향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죠. 그 과정에서 30년 동안 8개 구단을 이끌어온 다른 구단주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허락을 구했는데,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승낙을 받을 수 있었어요.”

야구로 게임 산업 이미지 바꿔놓을 것

‘리니지’의 성공부터 제9구단의 창단까지 김택진 대표의 인생은 줄곧 상승곡선을 그려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 못할 시련은 있었다.

‘리니지’ 신화의 주인공 김택진 한국 프로야구에 변화구 던지다

엔씨소프트 대표 김택진은 게임에서 이룬 영광을 야구에서 재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개인적으로 김 대표는 2004년 전 부인 정모씨와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그는 이혼에 따른 양육비와 위자료 등 재산분할로 엔씨소프트 주식 35만여 주(당시 시가 3백억원)를 정씨에게 양도해 화제를 모았다. 그의 이혼 사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사업적으로 가정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업계의 추론이다. 이후 그는 2007년 11월 ‘천재소녀’로 불리던 윤송이씨(36)와 비밀리에 재혼해 주목을 받았다. 윤씨는 93년 서울 과학고 조기졸업, 96년 카이스트 수석·조기졸업 이후 2000년 ‘24년 2개월’이란 나이에 미국 MIT 대학원 미디어랩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 졸업 후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매킨지에서 일하다 SK그룹 계열사인 와이더댄닷컴을 거쳐 2004년 28세 나이로 SK텔레콤 최연소 임원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 대표와 윤씨가 처음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4년 윤씨가 SK텔레콤 상무로 재직할 당시 김 대표가 그를 엔씨소프트의 사외이사로 선임했던 것. 당시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분위기가 감돌아 업계에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소문 외에도 김 대표는 재혼하기 전까지 윤씨 집안의 반대라는 암초에 걸려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력 끝에 결국 두 사람은 2007년 웨딩마치를 울릴 수 있었고, 이듬해 아들까지 얻었다. 윤씨는 출산 후 곧바로 엔씨소프트 최고전략책임자(CSO) 자리에 올라 현재까지 김 대표와 함께 엔씨소프트를 이끌고 있다.
사업에서도 어려움은 있었다. ‘리니지’가 선풍적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 선보인 작품들은 대중의 외면을 받은 것. 2005년 ‘길드 워’, 2006년 ‘오토어썰트’가 판매 부진을 겪은 데 이어 2007년 북미시장을 겨냥해 수백억원을 들여 만든 ‘타뷸라라사’도 실패했다. 다행히 4년여 개발기간을 거친 끝에 2008년 출시된 ‘아이온’이 게임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중국·일본·대만·북미·유럽 등 전 세계 60여 개국에 서비스되면서 게임 마니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한편 게임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할수록 엔씨소프트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졌다. 스스로 제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게임에 빠져 사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인기 게임 프로그램을 서비스하는 엔씨소프트가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김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중독은 온라인 게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폭력성이나 선정성이라고 하면 길거리에 붙은 광고지가 인터넷보다 더 심하다. 아이들도 게임을 오래하면 나쁘다는 걸 알고 있고 부모가 지도를 하는 게 중요하다”며 게임은 관리가 되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엔씨소프트라는 기업의 목적에 대해 고민했으며, 결국 프로야구 구단주라는 선택을 했다.
“게임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었어요. 기업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자는 기업의 목적이 이윤 창조에 있다고 말하지만 제 생각에 이윤 창조는 기업이 사는 필요 조건일 뿐이에요. 기업의 진짜 목적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죠. 제9구단 창단을 준비하면서 또 하나의 소명이 생겼는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거예요. 야구단 창단을 열성적으로 지지해준 창원시에 도움이 되는 일도 꼭 하고 싶습니다.”
김 대표가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가시화되려면 적어도 2년은 필요하다는 것이 야구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감독 선임부터 선수 영입, 전력 확보까지 해결할 일이 산 같이 쌓여 있다. 아직까지 구단 이름조차 짓지 못한 상태. 그래도 김 대표는 야구에서 희망을 본다.
“제9구단을 통해 게임 산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요. 기업을 운영하면서 저는 항상 ‘산업보국’이란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어요. 어떤 산업이든 궁극적으로 나라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게임 산업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시작해 수출 규모 면에서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는 산업으로 자리 잡았어요. 일각에서 게임의 폐해에 대해 비판도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예요. 지금 저희 엔씨소프트 제9구단의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조만간 프로야구에서 선전해 게임 산업에 대한 인식 변화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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