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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정한 휴머니스트

호스피스 김인선의 아름다운 동행

글·김민지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사단법인 ‘동행’ 제공

2011. 04. 15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막상 생의 끝자락에 놓이면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동안 쌓아온 가치관과 신념도 죽음 앞에 무너지고 만다. 이런 이들의 마음을 보듬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독일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지막 인생길을 함께 걷는 호스피스 김인선씨. 그에게 누군가의 죽음에 동행하는 이유를 들었다.

호스피스 김인선의 아름다운 동행


독일에서 40년째 살고 있는 김인선씨(61). 그에게 받은 명함에서 사단법인 ‘동행’ 대표란 직함이 눈에 띄었다. ‘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라 불리는 ‘동행’은 인생의 반을 간호사로 살았던 그가 6년 전 만든 봉사단체다. 독일에서 유일하게 이민자를 위한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씨에게 제2의 삶을 열어준 호스피스는 얼핏 간호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간호사가 환자의 건강을 되찾게 돕는 사람이라면, 호스피스는 환자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그와 단체에 소속된 1백50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매년 환자 40~50명의 마지막을 지킨다. 호스피스 활동가와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들은 한국인 파독 광부, 간호사를 포함해 동아시아계 이민자가 대부분이지만 독일인도 소수 있다. 김씨는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이들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 중 어렸을 적 사고로 실명한 젊은 독일인이 있었어요. 처음엔 이분이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본인이 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 말기암으로 생명이 몇 달 남지 않은 독일인 환자를 연결해드렸죠. 그런데 환자가 워낙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센 분이라 그는 시각 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하지만 결국 두 분이 만나게 됐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독일인 환자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기업가였다. 그는 시각 장애인인 자원봉사자에게 세상 이야기를 전했다. 자원봉사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삶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환자는 인생의 마지막에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며 편히 눈을 감았다. 김씨가 직접 지은 ‘동행’이란 이름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김씨가 호스피스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베를린에 있는 가톨릭 병원에서 근무할 때였다. 간호사로 일하며 늘 죽음을 가까이했지만 정식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이미 한인 사회에서 파독 광부나 간호사의 외로운 마지막을 목도한 탓이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독일 땅에서 열심히 살았어요. 이제야 제대로 사는가 싶었는데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얘길 듣게 되죠. 죽음이 두렵고 흘러가는 시간도 아까운데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함에서 더 큰 비참함을 느낍니다. 고국에서도, 이곳에서도 자신의 이름 대신 ‘이방인’이라 불리는 현실 앞에서 이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거든요.”
1963년 경제개발 자금이 필요했던 우리나라는 서독과 광부 및 간호사 파견 협정을 맺었다. 이렇게 나라의 발전을 위해 고국을 떠나왔지만 은퇴 후 남은 건 쓸쓸한 죽음뿐이었다. 현재 독일엔 3만5천 명, 베를린에는 7천 명의 한국인이 거주한다. 이 중 반수가 60대 이상이다.
“독일에서 가정을 이뤘지만 여기가 워낙 개인주의사회다 보니 한국인 2세들이 부모를 돌보는 일은 흔치 않아요. 거기다 그들이 한국말도 못하고 부모처럼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보니 부모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국제결혼을 한 경우엔 더 힘들어요. 한국에 살아보지도 않은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배우자를 이해하겠어요. 병들고 아플수록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지고, 이곳에서 편안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됐죠.”

호스피스 김인선의 아름다운 동행


김씨는 ‘소통의 단절’이 이런 문제를 극대화시켰다고 본다. 오랜 시간 서로 대화하며 마음을 나눴다면 이렇게까지 외로운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 일들을 단순히 독일에 있는 한국인만의 비극으로 보지 않는다. 다른 소수 민족이나 독일인들도 충분히 이런 상황을 겪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동행’을 만들면서 평범한 호스피스 봉사단체가 아닌 다문화 속에서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의 소망대로 ‘동행’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여러 사람이 교감하는 작은 떨림을 이뤄냈다. 지금껏 9기 호스피스 교육생을 배출했고, 통역사 교육 및 봉사활동 외에도 노래교실·수지침·기체조·패치워크 등 다양한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는 ‘동아시아 죽음의 문화행사’를 열어 한국, 일본, 인도, 베트남의 장례 문화를 조명해 호스피스 활동의 방법도 모색했다.
김씨의 이런 열정은 독일과 한국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독일에선 2008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감사패를 수여했고, 지난해 베를린 주 정부는 ‘베를린의 얼굴 204인’에 그를 선정했다. 한국에선 지난해 삼성문화재단의 비추미 여성대상 특별상과 외교통상부장관상, 올해 3월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독일은 이민자를 받아들인 지 60년이 됐고 한국은 20년이 됐죠. 벌써 한국에 있는 이민자가 20만 명이 넘는다니 한국도 다문화 사회예요. 지금 한국에 사는 다문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에만 연연하고 있지만 앞으로 이들에게도 노후와 죽음이 다가올 거예요. 그 전에 ‘동행’처럼 이들이 함께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민자 소통의 장 ‘동행’, 한국에도 필요
‘동행’에서 호스피스로 활동하기 위해선 정식 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렇게 자원봉사자로서 자격을 인정받으면 1주일에 2번 정도 봉사단체를 찾아가 환자와 함께한다. 그곳에서 서류작업을 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대신 봉사자들은 2년 활동하면 1년 쉬는 게 원칙이다. 늘 죽음만 접하다 보면 그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죠. 하지만 봉사를 마치는 그 시간 이후부터 그분들에 대한 걱정은 그만하라고 말해요. 환자와 봉사자는 철로의 평행선과 같은 관계거든요. 대신 환자들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 늘 ‘인생 서랍을 정리하라’는 말을 해주고 있어요.”
인생의 어렵고 힘든 순간을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하듯 미리 이야기하다 보면 좀 더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의 인생 서랍을 항상 정리해오고 있었다. 김씨는 자신의 남다른 가족사도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그가 ‘동행’을 만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제 어머니는 그 시절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어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아름다운 처녀였죠.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그 결과 제가 태어났어요.”
김씨의 어머니는 미혼의 몸으로 그를 낳았다. 집안에선 난리가 났고 김씨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외할머니 손에 맡긴 채 일본 유학을 떠났다. 몇 년 뒤 한국에 돌아온 김씨의 어머니는 기자와 교사로 활동하다 UN에서 일하는 독일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외로웠다.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를 여러 번 전학했기에 친구도 없었다. 외할머니만이 유일한 말동무였다. 하지만 할머니마저 그가 열다섯 살 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학교도 가지 않고 3개월간 외할머니를 극진히 돌봤고, 임종을 지켰다. 김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그것이 호스피스 활동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호스피스 김인선의 아름다운 동행

김인선씨는 현재 1백50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환자를 돕는 일을 비롯해 독일인들과 이민자들이 소통하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이끌어가고 있다.



호스피스 김인선의 아름다운 동행


“할머니께서 만성폐질환인 해수병을 앓으셨어요. 3개월 만에 그렇게 돌아가실 줄 몰랐죠. 대소변을 받아내며 하루 종일 보살폈지만 병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죠. 결국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온몸을 닦아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과 빨리 헤어지게 만드는 것, 그게 죽음이라는 걸 처음 알았죠.”
김씨는 “지금도 외할머니의 죽음이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72년, 스물두 살이 돼서야 독일인과 결혼한 어머니를 찾아 독일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혼자였다. UN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어머니는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간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쉽게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방황하는 그를 붙잡은 건 그곳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었다. 그 수녀님이 어떤 것도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그에게 준 것. 그때부터 그는 간호학을 열심히 공부해 간호사가 될 수 있었고, 한국인 남자와 결혼도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 7년 만에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결국 또 혼자가 됐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열심히 살았거든요. 신학을 공부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요.”

어머니의 임종 지키며 평생 앙금 털어내
그런 그에게 ‘동행’을 세울 수 있는 한마디를 던진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던 그에게 그 한마디는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힘든 시간들은 누군가를 돕기 위해 겪어온 세월이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김씨는 6년간 모아뒀던 생명보험금을 털어 7명의 자원봉사자들과 ‘동행’을 만들었다.
그렇게 ‘동행’을 3년째 이끌던 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폐암 말기를 선고받은 어머니를 베를린으로 모시고 와 그가 직접 돌보게 됐다.
“‘동행’의 비공식적인 스폰서로 어머니께서 자금을 지원해주시긴 했지만 그동안 어머니와 저는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에 동행하면서 그간 서로에게 힘들었던 일들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죠. 정말 감사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다른 이들의 죽음은 배웅하면서 정작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러던 2009년 어느 날 그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유방암이었다.
“악성이라 빨리 수술은 했지만 항암치료는 진짜 고통스러웠어요. 죽음을 앞둔 분들과 동행하면서 전 예외라고 생각했는데, 죽음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죠. 이렇게 죽음 앞에 서보니 호스피스 활동가로서는 최고의 경험을 얻었어요. 죽어가는 사람이 열이면 여덟이 살고자 몸부림치는데, 죽음은 그렇다고 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정리해둬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죠.”
다시 얻게 된 삶, 그는 더 열심히 ‘동행’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희망은 항상 절망의 언저리에 있다”는 말을 꺼내며 앞으로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임종을 앞둔 분들이나 노인들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쉼터를 베를린에 만들고 싶어요.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동행마을’이라고 할까요. 이런 곳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겐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인들에겐 인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김씨와 인사를 나눴다. 마주한 손에서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 동행했지만 삶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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