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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인연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한국을 말하다

“한국과의 인연으로 달라진 인생, 그 속에서 찾은 맛과 멋 그리고 정”

글·김명희 기자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중앙books 제공|| ■ 참고도서·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중앙books)

2011. 01. 18

캐슬린 스티븐스 미국 대사는 한국 이름을 지닌 첫 외국 대사다. 한국어와 한국 음식을 사랑하고, 그의 유일한 혈육 또한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스티븐스 대사의 지극한 한국사랑 고백.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한국을 말하다


한국의 파란 가을 하늘을 좋아하고, 키우는 삽살개 두 마리에게 ‘여유’와 ‘무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워낭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고, 김치도 담글 준 안다. 이쯤 되면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심은경입니다”라고 했던 첫 도착 성명이 무색치 않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캐슬린 스티븐스(57) 주한 미국 대사 이야기다.
그와 한국의 첫 인연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 그는 충남 예산 예산중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는 외국인이 드물던 시절. 예산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키카 크네’ ‘코가 크네’하며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 낯선 사람들과 어느덧 중년이 된 제자들은 그가 대사 임명을 받고 한국에 도착하던 2008년 9월, 30여 년 전 예산에서 함께 찍은 사진으로 플래카드를 만들어 환영 인사를 나왔다. 그는 “30년 전 찍은 사진이 이렇게 다시 쓰일 줄 알았더라면 머리 스타일을 달리 하거나 좀 더 단정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예전의 나를 기억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심은경이라는 이름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얻은 것이다. 은행 우체국 업무를 보기 위해선 도장이 필요했는데 그 때문에 함께 한국에 온 평화봉사단장이 스티븐스(Stephens)와 발음이 비슷한 ‘심’이라는 성에 ‘은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첫 한국생활 2년은 스티븐스 대사의 인생 항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프레스콧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석사를 받은 그는 한국 체류 중이던 1977년 미국 외교관 시험에 응시, 합격했다. 78년 미국 국무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그는 트리니다드토바고와 중국 등지에서 외교관으로서 경력을 쌓았고 1984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정무담당관으로, 87년부터 3년간은 부산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최근 ‘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집도 발간했다. 그가 책을 통해 고백한 인생 여정과 한국 사랑을 들여다봤다.

KEYWORD 1 도전과 모험 정신의 원천 가족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한국을 말하다

평화봉사단 시절 영어를 가르치던 제자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한 컷!



나는 미국 남서부 지역, 커다란 사막과 산, 그리고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독립심과 개척정신을 몸으로 익히면서 성장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텍사스 웨스턴대(지금의 텍사스주립대)의 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 두 분은 결혼해 2남1녀를 두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두 분 모두 서부에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외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서부개척자 집안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양쪽 가족들은 모두 서부 출신답게 평생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스스로 도전하고 개척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처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교육은 가장 우선시되는 신앙과 같았습니다.
자녀 교육관이나 방식은 사람들마다 다르므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환경, 부모 및 아이 각자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 교육 방법도 달라지고 결과도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의 경우 효심이 강한 멋진 아들이 있어서 그 점은 정말 축복 받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의 양육 방식은 보편적인 미국 사회와 조금 다르긴 했지만 항상 교육에 대한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1970년대 내가 한국에 왔을 때도 교육의 중요성은 늘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1986년 아들이 태어나면서 나 또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들을 기르는 데 전념했습니다. 나의 직업상, 아들이 어떤 학교에 갈 수 있는지, 언제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일을 하는가도 아들의 진로를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또 내 아들은 나를 따라 계속 이사해야 했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는 데 융통성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점을 교육시키려 좀 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상 내 아들에게는 본인의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가 유고슬라비아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그곳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유동적인 환경으로 인해 아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크게 느끼게 됐을 것이고, 앞으로 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 교육에 있어 외교관이기 때문에 장점이 되는 몇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부모가 되기 전에는 미처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한데, 세계를 돌아다닐 때마다 아들은 다른 외교관의 자녀들을 비롯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의 아이들과 사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할 때 서로 돕는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디를 가든 우리 나름의 외교관 공동체가 형성된 셈입니다. 그들은 함께 자라 친구가 되고 그들의 부모는 서로가 서로에게 삼촌이나 이모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 아들에게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됐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가급적 틈날 때마다 집중적으로 아들과 많은 추억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등산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등 외부 활동으로 아들과의 연대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어릴 적, 아들은 바쁜 외교관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이 돼 자신의 삶을 잘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들은 지금 보스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자신의 일과 삶에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한국을 말하다

1 한국박물관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명예홍보대사로 위촉돼 위촉장을 받았다. 2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평화봉사단 시절 영어를 가르쳤던 예산중학교를 가장 먼저 찾았다. 3 스티븐스 대사는 등산과 자전거 마니아다. 하이서울자전거대행진에는 2회 연속 참여했다.



KEYWORD 2 알수록 더 매력있는 언어 한글
한국어가 참으로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되는 것은, 한글은 아름답고 단순해서 배우기 쉬운 반면 정작 한국어 배우기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국 속담인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를 가끔 떠올리면서 나는 한국어를 공부한 지 35년이 됐는데도 왜 원하는 만큼 잘 안되는지 참 궁금합니다. 그래도 가끔 한국어로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나의 한국어 발음이나 문법적 오류 때문에, 혹은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아서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외국어를 배우는 어느 누구라도 모두 이런 경험을 했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팔을 활짝 펼치고 있는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볼 때마다 ‘심은경 대사! 한국어 공부 더 열심히 하세요’라고 채찍질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오랫동안 공부하고, 심지어 미국에서 산 적이 있어도 영어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는 한국인과 미국인 직원들에게 그래도 계속 외국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며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국어를 계속 사용하려고 다짐하는 것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을 존중하기에 나도 한국어를 배우는 데 똑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어쨌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한국이니까요.
나는 아직도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75년 7월 서울에 왔을 때 날씨가 매우 더웠습니다. 에어컨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목이 너무 말라 거의 탈수 상태였습니다.

“물 주세요.”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문장입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예산으로 발령이 나 이동하기 전까지 청주에서 10주 동안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예산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어가 갖고 있는 음악적인 부분들도 익혔고, 그때의 경험은 내가 외교관이 된 이후에 보다 공식적인 언어 교육을 받았을 때 도움이 됐습니다.
모국어와 너무도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오페라와 같은 고차원적 음악을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페라가 지닌 아름다움과 풍부함에 더욱 매료되듯, 나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킵니다. 한국어가 만들어 내는 소리와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대한 나의 존경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갑니다. 또한 한글은 컴퓨터 시대에도 매우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영어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그리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글로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가 편하다고 하니 한글 문자 메시지 보내기에 도전해 볼까합니다.

KEYWORD 3 너무 좋아 한 가지만 꼽을 수 없는 한식

지난 수년 동안 내가 근무한 곳에서 항상 한국 음식을 찾았습니다. (과거 부임지였던) 아일랜드,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한국 음식을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워싱턴DC와 버지니아주 북쪽 지역은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곳에는 약국, 과자가게, 미장원, 스파뿐 아니라 수백 수천의 한국 식당이나 슈퍼마켓이 있었으며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워싱턴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을 전혀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한식을 대접하는 것을 즐겼으며, 내 친구들은 한식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2009년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 음식에 친숙한 듯했습니다.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주최한 오찬을 통해 한국 음식은 건강식이면서도 맛깔스럽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신선로는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 맛보는 음식이었는데 매우 좋아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나처럼 반찬 하나하나를 다 맛보았는데 그중 다시마튀각의 맛에 반한 것 같았습니다. 백악관으로 다시마튀각을 조금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 1월엔 아들과 해인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했는데 조용한 경내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아들이 말했습니다. “밥, 채소, 두부, 따끈따끈한 국 같은 음식들이 우리 학교에도 매일 나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주말 동안 들은 가장 흐뭇한 이야기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사람을 비롯해 외국인들은 한식 하면 불고기와 갈비를 떠올리는데, 맛있는 육류요리만 한식의 진수가 아닙니다. 70~80년대에 내가 한국에 살 때만 해도 고기를 국에 넣어 아껴 먹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지만, 웰빙에는 나물과 계절음식, 전통 한식이 더 알맞은 듯합니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좋아하는 한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을 늘 받지만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한식이 없을 뿐 아니라, 한식을 잘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한식이 특별한 이유는 어느 한 가지도 단품요리가 아니고 여러 가지 요리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한국을 말하다


70~80년대 한국에 살 때 나는 집에서 먹든 외식을 하든 전체 식사에 어울리는 반찬을 정하는 데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찬과 금방 지은 밥, 맛있는 국, 그리고 마지막에 내오는 뜨끈한 숭늉이 있는 전통 한정식 식당을 찾아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 같은 식사의 핵심에는 늘 신선한 나물이 있었습니다. 내게 한식이란 항상 신선한 채소였습니다. 예컨대 나는 백반과 제철 반찬들을 좋아합니다.
한번은 한식당에 가서 ‘봄비빔밥’을 주문했습니다. 밥 위에 봄철 채소를 올려 나오는 음식이라서 너무 좋았습니다. 평범하고 구하기 쉬운 채소이지만 매우 신선해서 훌륭한 비빔밥이 됐습니다. 도시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계절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화창한 봄날에 여성들이 풀빛 언덕에서 옹기종기 모여 쑥을 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장에서도 훌륭한 지역 농산품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한식 세계화에 있어서도 이 같은 신선함과 제철 음식 유지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음식의 세계화에 있어서나 신선함의 유지가 과제입니다. 하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 건강, 음식의 수준유지에서 한국은 최고 중 하나입니다. 만약 내가 평생 한 종류의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선택하라면 아마도 한식일 것입니다. 다만 내게 좋아하는 한국 요리를 딱 한 가지만 고르라고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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