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Interview

구족화가 김성애 감동 인생

류마티스관절염으로 인한 전신장애 극복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4. 22

하루 3~4시간씩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란 쉽지 않다. 마비증세가 턱까지 차올라 고개 가누기도 벅차다. 하지만 쉬지 않고 붓을 놀렸고 어느새 하얀 캔버스는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구족화가 김성애 화백의 입가에 웃음꽃이 폈다.

구족화가 김성애 감동 인생


봄바람이 일렁이던 3월 초, 서울 강남 한 화랑에서는 대한류마티스학회가 마련한 ‘여류사랑’전시회가 열렸다. 쉬우쉬익―. 작품을 감상하던 관람객의 시선이 휠체어를 탄 한 여인에게 쏠린다. 캔버스 앞에 선 여인은 주방용 나무젓가락에 연결한 붓을 입에 물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였다. 이윽고 그의 붓끝에서 목련꽃이 서서히 폈다. 그림에 ‘목련이 필 때’라는 제목을 붙인 여인은 “희망차고 화사한 봄을 담고 싶다”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는 구족화가 김성애 화백(62)이다.

일곱 살에 처음 병마 찾아온 뒤 스물일곱에 재발
김 화백을 다시 만난 건 전시회가 끝난 지 일주일 지났을 무렵. 그는 전시장에서 완성하지 못한 ‘목련이 필 때’를 마저 그리고 있었다. 굳은 다리, 엿가락처럼 휜 손가락, 뻣뻣한 목과 턱… 류마티스관절염을 앓은 지 30여 년, 마비증세는 차츰 심해지고 있다.
“누워 지내는 사람은 휠체어 탄 사람이 부럽고, 휠체어 탄 사람은 목발 짚은 사람이 부럽고, 목발 짚은 사람은 멀쩡하게 걷는 사람이 부러운 거 아니겠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행복을 찾는 게 중요하죠. 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입으로도 이렇게 잘 그리는데 손으로 그리면 더 잘 그리겠어요’라고…(웃음). 손으로 휙휙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그림은 손이나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류마티스관절염이 찾아온 건 일곱 살 무렵. 다리가 아파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를 업고 다녔다. 당시에는 류마티스관절염인지도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하는 인사말은 “성애 아직 안 죽었어?”였다. 어머니는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나을지도 모른다며 김 화백을 외가로 보내기도 했고 침, 뜸, 민간요법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런 정성 때문일까, 열세 살 때 기적처럼 병이 잦아들었다.
구족화가 김성애 감동 인생

남편을 모델 삼아 그린 ‘기타 치는 남자’와 그가 아끼는 작품인 ‘목련이 있는 풍경’. 필치가 섬세하다.


“할아버지 댁 마당에 홀로 앉아 그림 그리던 기억이 나요.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중고등학교 땐 여느 아이들처럼 공부하며 활개를 쳤고, 졸업 후엔 한 회사에 취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조금만 무리를 하면 다리가 저리고 손가락이 부었어요.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류마티스관절염이라고 하더라고요. 약이 없다고, 평생 이 병과 동반자로 지내야 한다고….”
그때 나이 스물일곱. “자상한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던 김 화백은 처음엔 의사의 말을 믿지 못했다. 어린 시절 이 병으로 고생했지만 씻은 듯 나았기 때문에 또다시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손가락이 한두 개씩 굽고, 몸이 뻣뻣해지면서 차츰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겨워졌다. 한 알, 두 알씩 먹던 진통제는 어느덧 한 줌, 두 줌이 됐다. 부작용으로 속이 쓰리고 얼굴이 부었지만 이미 진통제에 중독돼 약을 먹지 않으면 팔다리가 떨렸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부터 걷지를 못했어요. 집에서 두문불출했죠. 손님이 와도 제 방문은 절대 못 열게 했어요. 동정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참을 수 없었거든요. 하나님께 ‘죽을 때까지 밥은 제 손으로 먹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엄마가 밥을 떠먹여주고 있더라고요. 그날부로 신을 버렸어요. 오로지 머릿속엔 자살 생각밖에 없었죠.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어요.”
그러나 자살 시도는 늘 실패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동맥에 칼을 댔지만 마음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막상 피를 보니까 죽음이 공포로 다가오더라고요.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 김 화백은 ‘어차피 죽지 못한다면 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아는 분의 소개로 한 중증재활원에 갔어요. 그곳에서 저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됐죠. 3일 동안 재활원에 머무르면서 ‘저들에게 밥 한술 떠먹여줄 수 없는 처지지만 평생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기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신을 다시 찾았고, 집으로 돌아와 무조건 독립하겠다고 했어요. 형제들은 어떻게 나가서 살겠냐고 반대했지만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겠다, 나를 살리려면 이 집에서 내보내달라’고 강경하게 맞섰죠.”

구족화가 김성애 감동 인생

서울 구로동에 단칸방을 얻은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신장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딸 걱정을 하던 어머니의 병원 침대 밑에는 수면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엄마가 하루는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눈을 감겠니. 함께 한날한시에 죽자’더군요. 기가 막혔죠. 엄마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간호사에게 매일 수면제를 달라고 했대요. 저와 함께 먹으려고 모았던 거죠. 엄마 돌아가셨을 때 제가 그랬어요. ‘아이고, 엄마… 눈 못 감을 것 같다고 하더니 잘 감으셨네. 이젠 내 걱정 말고 편히 쉬세요’라고. 그로부터 며칠 후 엄마가 꿈에 나타나 ‘성애야, 넌 꼭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시더라고요.”
우연히 TV 프로그램에서 본 해외 구족화가의 모습도 그를 자극했다. 불편한 팔로 그림 그리던 그가 입에 붓을 문 것도 그 즈음. 대나무 젓가락에 연필과 붓을 고정시켜 하루 7~8시간씩 연습했다.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났지만 쉬지 않았고, 마침내 지난 96년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에서 등단해 화가가 됐다. 이후 개인전을 몇 차례 열었고, 해마다 독일에 있는 세계구족화가협회에 그림을 보내 소정의 작품지원금을 받고 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봉사자가 입에 붓을 물려주고 간 지 5분도 안 돼 붓을 떨어뜨리면 2~3시간을 멍하니 보낸 적도 많아요. ‘무슨 영광을 얻으려고 이렇게까지 힘들게 사나’ 싶었죠. 그러다가도 중증재활원에 갔던 때가 떠올라 억척같이 붓을 물었어요. 이 병을 인정하기까지 10여 년이 걸렸습니다. 장애를 빨리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난 할 수 없어’ 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해요. ‘할 수 있다, 반드시 해낼 것이다’라고 자기주문을 걸면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고요.”

장애 극복하고 4년 전 행복한 가정 꾸려
지금 김 화백의 삶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그의 그림처럼 봄일 것이다. 그의 옆에는 자원봉사자가 아닌 남편 강제영씨(60)가 있다. 두 사람은 4년 전 교회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 5개월 만에 결혼했다. 30대 중반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운 강씨는 현재 교회, 복지관 등지에서 사람들에게 악기와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몸이 아픈 뒤로 결혼은 꿈도 못 꿨어요. 그런데 남편을 처음 본 순간 ‘이 사람이다’ 싶더라고요. 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어요. 제 행복을 위해 남에게 부담주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거리감을 두면 둘수록 남편이 제게 다가오더군요.”
강씨는 “소개해준 지인이 ‘언니에게 상처주지 마라. 언니는 눈물이 흘러도 제 손으로 닦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 사람에게만큼은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는 김 화백은 몇 줄을 쓰는 데 3~4시간이 꼬박 걸렸지만 행복했다. 강씨는 “나 역시 단점이 많은 사람이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사랑을 하자”며 이메일로 프러포즈를 했고, 기다렸다는 듯 김 화백도 수락했다. 두 사람이 결혼소식을 전했을 때 강씨의 딸은 기뻐했고 처음 두 사람의 교제를 걱정하고 반대했던 김 화백의 가족도 반겼다.
강씨는 “사랑하는 여자가 약간 몸이 불편할 뿐 여느 부부처럼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면서 산다”고 말했다. 김 화백의 주요 작품소재는 나무와 산, 꽃.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강씨는 풍경을 찍어 아내에게 건넨다. 아내가 원하는 물감을 팔레트에 짜는 일도 그의 몫. 그 덕분인지 김 화백의 작품은 눈에 띄게 밝아지고, 다양해졌다.
“통나무 그리는 걸 특히 좋아해요. 통나무와 제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기타치는 남자를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남편의 모습도 자주 남기고 싶은데 ‘아름다운 게 얼마나 많은데 하필 못생긴 남자를 그리려느냐’면서 쑥스러워하더군요. 제게는 남편이 가장 다루기 어렵고 비싼 모델이에요(웃음).”
아내 돌보는 일도 살림하는 일도 만만치 않지만 강씨는 김 화백을 “여왕”이라고 부르며 떠받든다. “미안해하지 마라. 당연한 것이다”라는 남편을 보던 김 화백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남편은 음악이라는, 저는 미술이라는 재주를 가졌으니까 의미 있는 자선행사에 참여하면서 봉사하고 싶어요. 더 이상 류마티스관절염이 진행되지 않으면 좋겠고요.”
2~3시간 그림을 그리고 나면 침대에 쓰러질 만큼 김 화백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다. 하지만 포기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남보다 조금 늦었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개인전도 자주 열고, 장애아동 중에서 미술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