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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희망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전신마비 장애 딛고 강단 서는

글·김민지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랜덤하우스 제공

2008. 10. 21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를 입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 목 아래로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전동 휠체어와 기계장비에 의존해야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하늘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간다 해도 희망만은 가져갈 수 없음을 보여준 이상묵 교수의 감동 사연.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서울대 자연과학대 3층 연구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노트북과 컴퓨터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에서는 방주인의 학구열이 묻어났다. 이 연구실의 주인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46).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기자를 맞으며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편히 앉으라”고 말했다. 지난 2006년 자동차 전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그는 폐활량이 일반인의 40%밖에 안 돼 틈틈이 물을 마셔야 하고, 말을 할 때도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한다. 목 아랫부분의 신경은 마비됐지만 목 위 신경은 사고 전과 똑같이 살아 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치과 치료라고 한다.
이 교수는 사고 자체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44년 동안 정상인으로 살았으니 나머지 인생을 좀 다르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자 그는 입 앞에 있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병에 입김을 불어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런 장비들 덕분에 그는 지난 봄부터 강단에 복직,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노트북과 연결된 마우스로 프로젝터 스크린을 작동, 강의를 하는 것. 인간의 한계를 딛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그는 종종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비유된다.
“다시 강단에 섰을 때 학생들이 절 배려하는지 강의시간에 질문도 안 하고 너무 조용했어요. 대신 강의에는 잘 집중하는 것 같아 뿌듯했죠(웃음).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사했습니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2006년 미국에서 지질조사차 이동 중 자동차 전복사고 당해

이 교수는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세계 5대양 중 안 가본 곳이 없고, 1년에 3~4개월은 연구를 위해 바다에서 살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21세기를 ‘해양의 시대’로 진단한 앨빈 토플러의 책을 접한 후 바다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서울대 해양학과를 거쳐 MIT에서 해양지질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임용된 그는 2006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공동으로 진행하던 야외지질조사 프로젝트의 마지막 코스로 향하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를 당했다.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라는 사막지역을 연구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어요.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동안 타고 다니던 차가 아닌, 다른 차를 운전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차를 바꿔 탔죠.”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5대의 차량 중 그가 운전하던 차량만 뒤집어졌다. 그는 차량 지붕에 목이 눌려 정신을 잃었다. 사고 후 1시간 만에 도착한 구급 헬기에 실려 병원에 도착한 그는 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4번 척추를 다쳐 사지가 마비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제가 남들보다 특별히 의지가 강한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목 아래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도 이상하게 눈물조차 나지 않았죠.”
대신 그는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화가 났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과학자의 길을 걸어왔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는 곧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사고 후 사경을 헤매면서 세 번 꿈을 꿨어요. 각각 한 편의 영화 같았죠. 어떤 내용인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제가 죽는 것 같다가도 꿈의 끝에선 다시 살아났어요. 마치 제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잘 살라’란 메시지를 주는 듯 했어요.”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사고 한 달 후 그는 LA에 있는 재활 전문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를 비롯한 아내와 가족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재활 훈련을 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는 그곳에서 척수신경이 ‘완전히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직도 어머니는 당신이 죽기 전에 아들이 걷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아내 역시 어떻게든 다른 치료를 받고, 노력하면 제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전 치료나 운동을 통해 나을 수 없어요. 거기에 미련을 갖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게 훨씬 낫죠.”

그는 컴퓨터를 이용한 재활기술센터에서 컴퓨터나 보조기기 등을 이용해 정상인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과 적합한 기기 모델을 찾은 그는 2006년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 사고보다 더 큰 시련이 닥쳤다. 사고 당시 자동차에 함께 탑승했던 제자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제가 다쳤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죠.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앞으로 잘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사라졌어요.”
제자는 이 교수가 가르쳤던 ‘바다의 탐구’라는 수업을 들으며 해양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학부생이던 그는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이 교수의 프로젝트에 가장 먼저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제자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던 그에게 다시 일어설 마음을 갖게 한 이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이건우 교수였다. 이건우 교수는 학술상 상금으로 받은 1억원을 그의 재활치료에 써달라며 쾌척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잘 알지 못하던 이 교수가 나를 위해 거액을 내놓겠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면서 “그 일을 계기로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하늘이 많은 부분을 가져갔지만 아직 남은 능력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지난 일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고 힘들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2007년 1월, 학교로 복귀했다. 그리고 사재를 털고, 학교 측의 도움을 받아 제자를 기리기 위한 장학금을 만들었다.

“막내아들 안아줄 수 없어 가슴 아프지만 세 아이 커가는 모습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적응했지만 가족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아직도 제가 다치기 전 모습만 생각해요. 언제든 제가 다시 예전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저처럼 가족 중 한 명이 갑자기 장애인이 되면 가족들은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중에서도 막내아들에게 가장 미안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여섯 살배기 막내아들을 안아줄 수도, 같이 놀아줄 수도 없어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고3 딸, 중3 아들이 어렸을 때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막내는 제가 움직일 수 없으니 챙겨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아빠 볼에 뽀뽀∼’ 하고 말하면 막내가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서 뽀뽀를 해요. 그러면 저도 양 볼에 뽀뽀 해주고 얼굴을 막 비비죠(웃음).”
그는 처음에는 ‘아이들이 달라진 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장애를 가진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이 배려심과 이해심이 많아 훌륭하게 성장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라도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저를 비롯해 아이들까지 돌보며 늘 웃으면서 꿋꿋하게 지내는 아내가 곁에 있어 더욱 감사해요.”
그는 현재 상황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행복이 배가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에 사는 브루 여사를 소개했다.
“올해 초 인터넷을 하다가 브루씨의 홈페이지를 발견했어요. 홈페이지에는 자신의 병명과 가족 얘기, 장애인들이 컴퓨터 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소개돼 있었죠. 브루씨는 근위축증으로 온몸이 거의 다 굳었지만 뺨에 센서를 부착하고 그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감동받아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죠.”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이상묵 교수는 “인생의 목적지는 여전히 같다. 가는 방법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브루 여사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특히 가족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고. 얼마 뒤 브루 여사에게서 답 메일이 왔다고 한다.
“시간이 약이래요. 제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면 가족들도 언젠간 다 받아들일 거라고 하더군요. 자신도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면서 절 위로해주셨죠.”
“사고 후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보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9월 초 자신의 극적인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 ‘0.1그램의 희망’을 펴낸 이 교수는 아마 다치지 않았다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가족마저 희생시키면서 성공만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기 전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며 활짝 웃는다.
“사고 후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보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매 순간이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고,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미국에서 치료 받을 때 절 도와줬던 한 후배가 말하더군요. ‘우수한 대학을 나오고 대학교수까지 됐으니 형은 이미 이 분야에서 챔피언이야’라고요. 그러면서 ‘챔피언이 주변에 라이벌이 없으면 한 체급을 높이는 것처럼 형도 좀 더 높은 체급에 도전한 거라고 생각해’라며 격려해줬어요.”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비유한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란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샌프란시스코 항에 문제가 생겼으니 LA 항으로 들어가 육로를 이용해 샌프란시스코로 가라는 연락을 받은 상태라는 것. 그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이 바뀌었을 뿐,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치고 난 뒤 제 인생은 오히려 더 여유로워졌어요. 더 잘해야겠단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됐거든요. 가끔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과학에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해요. 엉뚱한 질문이 많아 웃길 때가 많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이 저를 통해 과학을 좀 더 쉽고 재미있는 분야라고 알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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