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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몸이 걸어오는 말에 귀 기울여주세요~

2007. 01. 16

얼마 전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체온이 39℃까지 올라가 물만 마셔도 토했고 혓바닥은 가뭄에 논 갈라지듯 했다. 몸이 약해지니 비위도 쉽게 상하고 감성도 지나칠 정도로 풍부해져 눈물 또한 많이 흘렸다. 이 사태는 혹사당한 몸이 보내는 경고라는 걸 깨달은 나는 며칠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몸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새해에는 정말 몸에게 잘해주고 몸을 사랑해주겠다고. 몸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몸의 각 기관이 단체 농성만 해도 이렇게 타격을 받는데 파업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연말 정산하듯, 크리스마스에 종합선물 세트를 한꺼번에 받듯 몹시 아팠다. 특별한 병명도 아닌 독감으로 지난 생애를 통틀어 가장 장렬하게 앓았다.
체온이 39℃까지 올라가 물만 마셔도 토했고, 열이 너무 높아지다보니 혓바닥은 가뭄에 논 갈라지듯 쩍쩍 갈라졌다. 미라나 저승사자처럼 눈은 퀭하게 들어가고 다크 서클이 거의 얼굴 전체에 퍼져 남들이 보기에도 ‘`병자’처럼 보였다. 온몸에 얼음이 들어간 듯 오싹오싹했다가 다시 열불이 나서 못 견디겠고 누워 있어도 앉아 있어도 불편했다. 걸을 힘조차 없었다.
평소에 아프다고 끙끙거리면 들은 척도 안 하거나, “나는 더 아파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무슨 엄살이냐”던 무심의 극치인 남편도 마누라가 특수분장을 하지 않고도 미라의 모습을 보이자 조금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했고, 물도 가져다주는 등(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지만 내겐 엄청나게 감동적인 장면) 간호를 하더니 사흘째가 되자 한계에 달한 듯 술 마시고 새벽에 돌아와 내 체온을 더 올렸다.
또 전화를 받기도 힘들 만큼 진이 빠졌지만 억지로 전화를 받아 “제가 너무 아파요”라고 하면 다들 이런 반응을 보여 맥이 더 빠졌다.
“어머, 유인경씨도 아파요? 절대로 아플 사람 같지 않았는데 신기하다.” “만난 지 15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네요. 아프다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신선하네요.”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탈날 줄 알았다고. 그렇게 종종거리고 다니는데 어떻게 탈이 안 나. 오히려 지금 병이 난 게 더 이상한 거지.”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사이보그나 고무로 만든 인간처럼 절대 지치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 같은, 마냥 씩씩한 모습이거나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느라고 몸을 심하게 부리는 사람으로 보였나보다.

지독한 몸살은 내 몸이 참다못해 보낸 경고장
몸의 변화도 그렇지만 감정의 변화도 참 신기했다. 워낙 기진맥진하다보니 아무 생각이 없는데 감각기관은 아주 예민해지고 감성도 엄청나게 풍부해졌다. 냄새에 아주 민감해져 비위가 상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 툭하면 눈물이 났다.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뉴스를 보다가도 울고, ‘도전 골든벨’에 나온 학생이 문제를 잘 맞춰도 “저런, 대견한 것!” 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수시로 콧등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뭉클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독감에 걸렸는데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난단 말인가.
하긴 ‘독감으로 인한 몸살’이란 흔한 이름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이건 나의 몸이 참다 참다못해 보낸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난 48년간 그렇게 심하게 부리고 각종 생체실험을 하고 혹사를 시켰으니 만약 기계였으면 진작 망가져버렸을 것이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방송 출연하고, 방송 후에는 곧바로 신문사로 출근해 일하고, 중간에 여기저기 지방강연을 다니고, 때론 늦은 밤까지 각종 행사나 모임에 참석하고, 텔레비전이나 만화책 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안 잤으니. 그렇다고 평소에 운동을 하거나, 몸에 좋은 건강식품을 먹거나,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 적절히 휴식을 취하지도 럭셔리한 스파에 가서 몸을 호강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며칠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 우선 나는 몸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새해에는 정말 몸에게 잘해주고 몸을 사랑해주겠다고.
그렇게 원고도 쓰지 않고, 방송 출연도 하지 않고, 강의도 하지 않고, 가족이나 병문안 온 친척들 외엔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일주일쯤 보내고 나니 신기하게도 최근 수시로 충혈됐던 눈이 아주 맑아졌고, 다크 서클이 사라지면서 피부도 좋아졌다. 물론 아직 기력을 되찾지 못해 퀭하고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쉬는 동안 내 몸 안의 나쁜 독소들이 빠져나간 것 같다.

혹은 이상하고 심난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탁한 기운들이 감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내 몸을 괴롭히는 독소들 가운데는 유해물질이 가득한 음식물이나 환경오염도 있겠지만 사람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독소들이 더 악영향을 미친 것 같다. 새집에만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독소는 수시로 배출된다.
콘크리트처럼 탁 막힌 생각으로 고집만 피우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나 하려는 기회주의자,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기 하소연만 늘어놓는 철없는 사람들, 허세와 권위로 가득한 이들, 이런 이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리 무공해 청정지역에 있어도 금방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지 않은가.
난 그동안 일을 핑계로 만나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을 만나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각종 궂은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새해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방법으로 독소 성분(?)이 강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거나 자제하기로 했다. ‘모임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지 말 것, 누가 공을 던진다고 맞받아 던지려고 하지 말 것 등등. 내게 기쁨과 위안과 행복을 주는 이들을 만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기쁨과 위안을 주는 사람만 만나기에도 짧은 인생…
건강에 너무 연연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이상한 약을 먹고, 각종 보조제품을 수시로 장복하고, “이게 건강에 좋을까? 이건 건강에 나쁘다는데…” 등등 잔머리 굴리느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미 내 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콩이나 두부, 마늘, 양파 등은 알아서 잘 먹고 이젠 과식이나 야식도 잘 하지 않는다. 운동이 건강에 필수이긴 하지만 나처럼 천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무리한 달리기나 등산 등은 오히려 나쁘다. 그저 자주 걸어주면 되는데 다행히 자가용이 없어 걸을 수밖에 없다.
새해에는 그 누구의 말보다 몸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 그동안은 수시로 쑤시고 열을 내고 뾰루지를 만들고 신호를 보내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했는데 이젠 아니다. 피곤하면 쉬어주고, 뭔가 작은 반응이라도 금방 병원에 가서 제대로 된 원인을 파악하겠다. 지금 몸의 각 기관이 단체 농성 정도만 한 것에도 이렇게 타격을 받는데 잘 협상을 해서 파업만은 막아야 하지 않는가.
일주일간의 투병 끝에 퀭해서 나온 내게 사람들은 이런 덕담을 해주었다.
“아유, 얼굴 살이 빠지니까 훨씬 낫다. 화면발도 잘 받고….”
이 얼굴 유지하려면 계속 아파야 하나. 아니다. ‘모여라 꿈동산’에 나오는 인형 탈 같은 큰 얼굴이면 어떤가. 내 몸과 마음이 평화로워야지….
유인경씨는…
몸이 걸어오는 말에 귀 기울여주세요~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MBC 모닝쇼 ‘생방송 오늘 아침’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연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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