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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별책 부록│초·중등생 학습법 大백과

‘아버지가 앞장서는 생활교육’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저자 최효찬이 일러주는

2006. 06. 27

‘아버지가 앞장서는 생활교육’

저녁식사를 하면서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식탁교육’으로 유명한 미국의 케네디 가문이나 자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유대인들의 교육법은 이미 널리 알려진 자녀교육법이다. 그렇다면 5백여 년에 걸쳐 위인들을 배출한 우리나라 조선시대 명문가들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을까.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의 저자 최효찬씨(42)는 우리나라 명문가들의 자녀교육법이 케네디 가문이나 유대인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퇴계 이황의 경우 이미 5백 년 전 요즘 강조되는 ‘인맥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교육을 했는가 하면 영재교육 프로그램도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한 날에는 아내와 이야기 나누느라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몰랐어요. 명문가 사람들에게 들은 자녀교육법을 이야기해주면 아내는 무릎을 치며 공감했죠. 그동안 우리 부모들은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하면서도 정작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자녀교육 방식에 너무 무관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효찬씨는 우리나라 명문가의 자녀교육의 특징을 크게 네 가지로 꼽는다. 첫 번째는 부모의 본보기 교육.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도록 했다고 한다. 8대에 걸친 후손들이 모두 벼슬길에 오른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은 평생 자식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였다. 퇴계 이황이나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자녀들이 자연히 따라하도록 한 것이다.

명문가 자녀교육법 안 뒤 온 가족이 책 읽는 시간 가져
두 번째 특징은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을 제시해 그 원칙을 대대로 실천하게 했다는 점이다. 조상들의 수백년에 걸친 경험과 삶의 지혜에서 우러나온 지침은 자녀가 커가면서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삶의 원칙이나 철학이 없는 집안은 당대에 권력의 정상에 오르거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고도 금세 가문이 쇠락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기 집안만의 확고한 원칙과 철학이 있을 때 후손들이 올곧은 사람으로 자라나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게 되는 거죠.”
세 번째 특징은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 명문가일수록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자녀교육에 참여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 같은 대학자도 자녀교육에 대해서는 바쁜 일과를 제쳐두고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서애 류성룡은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부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공부를 게을리 할 때는 어김없이 엄한 질책과 꾸중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학문뿐만 아니라 철저한 ‘생활교육’을 실천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요즘의 ‘족집게 과외’처럼 과거시험에만 대비하는 공부를 시킨 집안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집안은 명문가의 명성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했다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생활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명문가의 자녀교육법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최효찬씨도 이 책을 쓰면서 두 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책읽기와 존댓말 교육이 그것. 우선 저녁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TV를 끄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책 읽는 시간을 갖는다. 책읽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부모 스스로 본보기가 돼 책을 가까이하는 아이로 키우기 위함이다. 또한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처럼 지내도록 하기 위해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부모에게 반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자칫하면 아이가 부모를 무시하는 일이 종종 생기죠. 존댓말을 쓰게 되면 아이는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또한 모든 게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절제의 미덕도 배울 수 있어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10계명
▼ 평생 책 읽는 아이로 만들어라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은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의 학문 수양을 점검하고 따끔하게 조언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자녀들이 절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친히 편지를 써보내 공부에 매진하도록 독려했다. 류성룡이 자녀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독서. 과거급제를 위한 공부가 아닌 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즉 경전을 탐독하도록 했다. 이 같은 공부방식은 요즘 시대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요령만 익히는 공부 방식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으나 중·고등학교로 진학할수록 폭넓은 독서를 바탕에 두고 정도를 밟으며 공부한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자긍심 있는 아이로 키워라 1910년 온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석주 이상룡 가문은 대대로 며느리에게도 ‘논어’와 ‘맹자’를 읽게 했을 정도로 깬 가문이다. 눈에 띄는 높은 벼슬을 지낸 선조는 없지만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항거한 가문으로 유명한데, 이는 바로 자기 가문에 대한 높은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도만을 걸으며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집안의 가풍이 자녀들을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 때로는 손해 볼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 조선 선조 때 의령 현감을 지낸 운악 이함 종가의 가훈은 ‘지고 밑져라’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훈으로 보이지만, 이는 당장에는 손해를 입더라도 빚졌다는 마음을 상대에게 남겨둠으로써 나중에는 크게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결국 ‘상생의 처세술’로 요즘 흔히 말하는 윈윈(win-win) 전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상대방과 더불어 성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가르침이며 큰 목표를 위해 작은 손해는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스스로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라 소치 허련과 남농 허건 가문이 약 2백 년 동안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해낸 비결은 다름 아닌 부모의 엄격한 대물림에 있다. 이 가문은 자녀의 재능을 냉정하게 판단해 후계자를 정했다고 한다. 무조건 가업을 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발견해 자기 힘으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한 것. 2001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은 소치가의 5대손 허진 역시 법대 지망생이었다가 뒤늦게 화가의 길을 찾아나선 케이스. 그저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하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기다려주는 부모의 태도가 대가를 만든다.

▼ 공부에 뜻이 있는 아이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라 퇴계 이황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자녀와 제자들에게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고 한다. 아들, 손자, 제자들을 각별하게 챙기면서 똑똑한 아이들끼리 서로 소개시켜주어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고. 실력 있는 아이들끼리 함께 공부했을 때 얻게 되는 시너지 효과는, 굳이 영재학교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퇴계는 우월의식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겸손한 몸가짐과 자기수양을 함께 강조했다고 한다.

▼ 세심하게 점검해 질책하고 조언하라 고산 윤선도는 함경도의 유배지에서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큰아들에게 편지를 써 과거 볼 때 답안지 작성요령을 꼼꼼하게 일러주고 과거에 낙방한 일까지 위로하는 등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또한 윤선도는 가문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덕목과 재산관리 방법, 근검정신, 자선 등 생활교육 전반에 걸쳐 조언과 질책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의 등록금과 학원비를 대주고 그것으로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단절될 수 있다. 아이는 부모가 챙기는 만큼 성장하지만, 정작 부모가 챙겨야 할 것은 아이의 성적이나 좋은 학원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과 생활태도다.

▼ 아버지가 자녀교육의 ‘매니저’로 직접 나서라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두 아들의 교육 챙기기에 열성이었다고 한다. 땅끝 해남에 떨어져 지내면서도 아버지이자 인생의 선배로 자녀들의 삶에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벼슬길에 오르지 못해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등의 지침을 두 아들에게 강조했다고. 그는 귀양살이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아들들을 유배지로 불러와 직접 학문을 지도하고 술버릇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학자를 배출한 마을은 경북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 있는 주실마을. 이곳은 가구수가 50∼70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청록파 시인 조지훈, 한국의 인문학 3걸로 꼽히는 조동걸 국민대 교수, 조동일 전 서울대 교수, 조동원 성균관대 교수 등을 배출했다. 주실마을의 남다른 교육열은 개화기 때 이 마을의 대표적인 선각자였던 조선 말기의 문신 조병희의 영향이 크다. 조병희의 가르침에 따라 온 마을 사람들이 자녀교육에 힘써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부모가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어 자녀에게 최상의 교육 기회를 제공한 것. 무조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에서 통할 수 있는 전문가로 키우기 위한 안목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주실마을 교육의 핵심이다.

▼ 자녀의 ‘멘토’가 돼라 조선시대 백의정승의 상징인 명재 윤증 가문은 조선 최초로 가문학교인 종학원을 세워 자녀교육에 앞장섰다. 종학원은 학문은 물론 수신제가와 같은 엄격한 생활교육, 이재와 재산관리도 가르쳤다. 이러한 종학원의 가르침은 시대가 바뀐 요즘도 부모가 자녀의 멘토 역할을 맡으면서 이어지고 있다. 부모가 학습지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서 수시로 상담까지 하는 것이다.

▼ 원칙을 정하고 끝까지 실천하라 지난 3백 년 동안 ‘존경받는 부자’로 살아온 경주 최부잣집은 엄격한 가훈과 제가 철학으로 그 명성을 유지해왔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만 섬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등 6가지 가훈을 반드시 실천하게 했다. 최부잣집의 마지막 후손인 최준은 고택을 포함한 전 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헌납함으로써 만석꾼의 지위를 포기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흔들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원칙에 따라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전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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