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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충격 사건

남편 살해한 주부 이씨의 안타까운 사연

‘결혼기간 내내 이어진 가정폭력의 비극적 결말…’

글·강지남 기자 / 사진ㆍ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6. 01. 04

지난해 11월 아이들 먹일 돼지고기를 술로 바꿔 마신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주부 이씨가 경찰에 검거됐다. 이씨는 결혼 후 20년 가까이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의 폭력을 참아내며 세 아이를 키워온 가정폭력의 피해자. 사실 이씨와 같은 여성 살인범들의 대다수가 남편을 살해했으며, 심각한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이씨 사건의 전말과 함께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의 사연을 취재했다.

남편 살해한 주부 이씨의 안타까운 사연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면회 온 변호사를 만나면 억울함을 호소하느라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변호사를 놔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된 가정주부 이선영씨(가명·36)는 달랐다. 자신의 사건을 맡은 변호사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이씨 사건을 맡은 전순덕 변호사(39)는 “서너 차례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하자 그때서야 울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첫마디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생각이 잘 안 나요’라는 말이었어요. 남편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상황 설명을 듣고 나니 혹시 ‘폭력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검찰 조서를 받아보고 나서 구체적인 변론 계획을 세울 생각입니다.”
이선영씨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1월15일 이씨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었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 김모씨(48)는 이미 새벽부터 마신 술로 취한 상태였다.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14)은 등교했고 작은아들(12)은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에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다. 술이 다 떨어지자 김씨는 외상으로 소주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로 갔지만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남편은 이씨에게 술값을 달라고 소리 지르며 행패를 부렸고, 이씨는 남편을 피하기 위해 작은아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피신했다. 작은아들은 “그날 아빠가 두어 번 돈 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엄마를 때렸다”고 말했다.
이선영씨 가족은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으로 간신히 연명했는데, 이날은 김과 김치로만 끼니를 때운 지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이씨는 반찬투정 부리는 아이들에게 불고기를 해줄 생각에 숨겨둔 비상금으로 돼지고기 세 근을 사왔다. 그런데 김씨가 이 돼지고기를 부인 몰래 가져다가 소주와 바꿔 마셨다.
“이씨는 남편이 밖에서 소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집안으로 들어와 부엌에 쓰러졌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무척 화가 났었다고 합니다. 줄넘기 줄로 남편 목을 감아 방안으로 끌고 들어왔대요. 그런데 갑자기 남편 상태가 이상해지니까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해요.”
이씨가 뛰쳐나간 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아빠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만 사망했고 이씨는 경찰에 붙잡혔다.
남편 살해 여성들… 대부분 가정폭력 피해자

이선영씨처럼 남편을 살해하는 여성들 중 상당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2004년 법무부 용역보고서 ‘여성 범죄자의 특성, 범죄이유, 그리고 재활가능성’에 따르면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된 여성 살인범 2백49명 중 남편(혹은 애인)을 살해한 비율은 53.4%나 되는데, 이들 대다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즉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의 폭력에 대응하는 한 방편으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 사람들이다. 사실상 ‘남편 살인사건’의 가장 흔한 유형은 술에 취해 폭행을 휘두르다 잠든 남편을 살해하는 것.

이처럼 남편 살해 여성들이 사실은 가정폭력의 피해자임에도 그동안 한국 법정은 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무거운 형벌을 내려왔다. 하지만 미국 법정은 오랜 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여성들이 나타내는 심리적 이상 상태인 피학대여성증후군(Battered Women Syndrome)을 인정해 피학대여성증후군에 대한 전문가 증언을 채택해 판결에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여성단체들이 남편 살해 여성들에 대한 지원운동을 가시화하면서 이들이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점, 심리적 이상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 참작되어 점차 형량이 낮아지는 추세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자신과 아이들을 마구 폭행하고 중학생인 딸을 성추행한 남편을 살해한 뒤 자수한 한 여성은 지난해 5월 항소심에서 피학대여성증후군을 인정받아 원심보다 형량이 1년 낮춰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로서 남편 살해 여성들을 돕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서울여성의전화는 현재 이선영씨의 후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후원계좌 국민은행 347-801-04-006935·예금주(사)서울여성의전화) 남편 살해 여성들이 재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호사 선임이 가장 중요한데 서울여성의전화는 변호사 선임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도 상시적으로 펼치고 있다.(후원계좌 국민은행 347-25-0003-404·예금주(사) 서울여성의전화)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 느끼는 아이들
경북 문경 출신인 이선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12세 연상인 노총각 김씨를 만나 결혼했다. 김씨는 공사장에서 미장(美匠)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결혼 초부터 술만 마시면 이씨를 폭행했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해진 것은 결혼 3~4년 후부터. 알코올 중독이 심해질수록 폭력 또한 심해졌고 더 이상 일하러 나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혼 초까지만 해도 집안 청소검사를 할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었던 남편은 점점 집안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이씨는 큰딸과 아들 둘을 위해 남편 대신 돈벌이에 나섰다. 방문판매사원과 보험설계사뿐만 아니라 각종 허드렛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다. 남편이 미장 일을 했기 때문에 집안에 망치, 칼 등의 공구가 있었는데, 술에 취하면 공구들을 휘둘러 아이들이 공구들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내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자신의 딸(15)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딸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방도시의 한 애육원에서 지내고 있다.
전순덕 변호사는 “이선영씨는 결혼기간 내내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2004년과 2005년 두 번의 자궁암 수술을 받은 뒤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지내던 중 심신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지른 것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씨는 수술 후 더 이상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우울증을 앓아왔으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남편이 행패를 부리면 장롱 속에 숨어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이씨가 구속된 후 두 아들은 경북 문경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서울여성의전화 송란희 간사는 “아이들 또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큰 상태”라고 전했다. 전문기관에 의뢰해 심리검사를 했는데, 두 아이 모두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하고 감정이 억압된 심리상태를 보였다는 것. 아이들을 직접 만나본 전순덕 변호사는 “아이들은 사건 당일에 있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으면서도 죽은 아빠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면서 “오히려 평화를 되찾았다는 마음인 것 같았다”고 전했다. 전 변호사는 “이씨의 딸 또한 더 이상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애육원에서 만난 이선영씨의 딸이 인터넷을 뒤져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엄마를 봤다면서 자기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또 엄마를 위해 증인을 설 테니 재판이 열리면 자기를 불러달라고요. 그리고 엄마 입술이 많이 텄다고 입술에 바르는 연고를 꼭 사다주라고요.”

가정폭력 근절 대책, 무엇이 있을까?

한국여성상담센터 현혜순 소장이 추천하는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

남편 살해한 주부 이씨의 안타까운 사연
때로는 ‘남편 살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을 낳는 가정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책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한국여성상담센터(www.iffeminist.or.kr)의 현혜순 소장(51)은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남편을 변화시키고 부부관계를 개선시킴으로써 가정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이란 가정폭력을 일으키는 남편을 심리상담 전문가가 제공하는 개인상담 및 집단상담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태도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Q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으로 어느 정도의 가정폭력 근절 효과를 거뒀는지요?
A 2001∼2005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4%의 가정에서 가정폭력이 근절된 것으로 나타났어요. 가정폭력이 재발한 26%의 가정에서도 과거처럼 심각한 수준의 가정폭력이 아니라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뺨을 한 대 때리는 경미한 수준이었지요. 미국 등지의 연구결과를 보면 가정폭력 재발률이 보통 25∼50%에 달합니다. 때문에 우리 센터의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이 가정폭력 근절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Q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한국여성상담센터는 서울가정법원 상담수탁기관으로 법원 명령으로 이 프로그램에 강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직접 상담을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 의사를 밝히면 됩니다.

Q 얼마나 오랫동안 상담이 진행되나요?
A 상담은 개인상담·집단상담·부부상담으로 이뤄지는데, 보통 일반상담과 부부상담은 각각 8회, 집단상담은 10회 정도 받게 됩니다. 보통 집단상담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또한 센터에서는 프로그램을 수료한 부부들을 대상으로 연간 한두 차례 부부캠프를 엽니다. 다시 한번 가정폭력과 부부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요.

Q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남편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가정폭력 부부들은 남편의 가부장적 사고, 부부간 평등한 의사소통 의식 부재, 분노 조절의 기술 미비 등으로 인한 갈등이 큽니다. 때문에 건강한 부부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남편에게 폭력의 심각성과 그로 인한 아내의 상처를 이해시키고 충동적인 분노를 조절하는 훈련을 받게 합니다. 남편과 부인의 의사소통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부대화법 훈련도 진행됩니다.

Q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남편을 설득하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나요?
A 많은 여성들이 ‘공권력 개입’이 남편을 상담 프로그램으로 인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차마 경찰 신고까지 못하겠다면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으면 별거(혹은 이혼)하겠다’며 남편에게 단호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센터에서는 심리 치료로 접근하면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부부관계를 좋아지게 하기 위한 치료이며, 무엇보다 성공한 사례가 많다’며 남성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Q 중도 탈락하는 남편들도 많나요?
A 물론 중도 탈락하는 남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남편이 대화훈련이나 집단상담만큼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화훈련을 통해 배운 기술들은 부부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속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집단상담은 참가자들끼리 결속감도 생기고, 다른 부부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도 얻기 때문에 호응도가 매우 높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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