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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책을 펴는 즐거움

남녀의 성 역할 뒤바꾼 ‘여성학 교과서’ ‘이갈리아의 딸들’

기획·김동희 / 글·민지일‘문화 에세이스트’ / 일러스트·이민경

2005. 12. 14

노르웨이의 여성운동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풍자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뒤바꿈으로써 평소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생활 태도나 문화적 관습에 숨겨진 성차별적인 요소를 날카롭게, 때로는 유쾌하게 짚어낸다.

남녀의 성 역할 뒤바꾼 ‘여성학 교과서’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에서 이갈리아(Egalia)란 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유토피아(Utopia·이상향)의 합성어다. 남녀 양성의 완전 평등이 실현된 곳? 물론 그런 곳은‘아직까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든 모권제 사회든 인류 역사상 남녀의 역할이나 입장, 행위와 관계 어느 부분에서든 완전한 평등이 이뤄진 적은 없다. 사실 평등이란 말 자체가 정치적·사회적 지향점일 뿐 실제로 구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르웨이의 여성운동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성 평등사회가 아닌 모권 사회, 여성이 권력을 쥐고 지배하는 사회로 그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역할을 여성이 하며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는 남성의 아픔이 적나라하게 부각된다. 우리가 전혀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생활 태도나 문화적 관습이 사실은 심각한 성차별 요소를 안고 출발한 것임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발하며 때론 가슴을 치는 작가의 상상력이 독자의 혼을 뺏는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여성 우위 사회
남녀의 성 역할 뒤바꾼 ‘여성학 교과서’ ‘이갈리아의 딸들’

작가는 우선 언어의 남성 중심주의부터 깨고 나간다. 가령 이갈리아에서 여성은 움(wom), 남성은 맨움(manwom)이다. 움은 일반적 인간을 지칭한다. 인류라고 할 때는 보통명사 움카인드(womkind) 또는 휴움(huwom)을 쓰고 영웅(hero)은 쉬로(shero)라고 쓴다. 사람들은 놀라면 ‘하느님 어머니’를 찾고 하느님의 딸 도나 제시카가 종교의 기반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맨(man)과 우먼(woman)의 쓰임새를 완벽하게 도치시킨 것이다. 주인공 소년 페트로니우스가 전통적으로 움이 해온 뱃사람이 되겠다고 하자 엄마는 “맨움은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게 일이며 그런 맨움이 뱃사람이 될 수는 없다”며 아들을 만류한다. 이 사회에서 소녀들은 역도와 포환던지기, 크로스 컨트리를 하는 데 반해 소년들은 우아하게 걷는 방법과 화장을 배우고 바느질을 하거나 수다를 떨며 인생을 시작한다.
움은 거칠고 힘든 일을 한다. 윗옷을 벗어던져 젖통을 드러내는 건 움이 멋진 여성미를 자랑하는 행위다. 하지만 맨움은 밋밋한 가슴을 타고난 걸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 수치의 상징인 페니스를 덮개로 감추고 다녀야만 한다. 뿐인가. 소년들은 매년 한 번씩 열리는 무도회에 나가서야 움들의 선택을 받고 겨우 섹스를 경험한다. 물론 그 주도권은 움이 쥐기 때문에 삽입, 사정에 이르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움들은 임신하려 맘먹지 않는 한 대체로 맨움의 손이나 페니스를 당겨 음핵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자기만의 절정에 오른다. 이쯤 되니 작가가 얼마나 완벽하게 남녀 역할과 입장을 바꿔 얘기를 전개해나가는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린 이갈리아의 생활상을 좀 더 들여다보자.
보통의 맨움은 움에게 강간당할까봐 항상 전전긍긍한다. 실제 그런 일이 생겨도 가족들에게 고백도 하지 못한다. 반면 움은 살아가며 겪는 하나하나의 성징이 다 축복이요 하느님 어머니의 선물이다. 페트로니우스의 여동생이 처음 월경을 시작한 날 그녀는 가족에게는 물론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며 축하를 받는다.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는 셋째 아이를 낳을 때 ‘탄생궁전’으로 친척, 친지를 초청해 출산의 전 장면을 자랑스레 보여준다. 산부가 출산대에 오르면 오르간은 ‘탄생 서곡 칸타타’를 연주하고 진통이 시작되면 성가대가 ‘거룩한 진통 찬송가’, 양수가 터지면 ‘양수찬가’를 부른다. 아이가 나오면 ‘탄생 캐럴’이 울려 퍼진다. 아이가 딸이면 후주곡은 장조로, 아들일 때는 단조로 연주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고 돌봐줄 아빠의 팔에 안기면 ‘부성의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출산 의식은 모두 끝난다. 산부는 곧바로 하객들을 집으로 초청해 사흘 밤낮을 진탕 퍼마시며 성공적인 출산을 자축한다. 맨움들은 음식준비 등 뒷바라지를 하며 부엌에 둘러앉아 “우린 그저 주방용 기구처럼 집에 있을 뿐이지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푸념이나 늘어놓는다.


여성학의 여러 쟁점을 흥미롭고 의미 있게 짚어낸 작품
이갈리아 사회가 이처럼 철저한 모권 사회다 보니 억압받고 차별받는 맨움들이 정체성에 눈뜨지 않을 리 없다. 두 파트로 나뉜 소설의 제 2부는 페트로니우스 등 맨움들이 ‘맨움 해방운동’을 벌여나가는 얘기다. 그들은 처음엔 은밀히, 나중엔 공개적으로 맨움 해방주의자 센터를 만든다. 남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상징물과 포스터를 내건다. 왜 움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맨움은 종속물로 남았는지, 또 왜 정자는 수치의 근원인데 월경은 힘의 원천이 되었는지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고 행동지침을 세워나간다.

“성적 정체성은 계급 정체성보다 훨씬 더 중요해. 사실 우리는 맨움에 대해서보다 노동자 계급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우리가 듣고 있는 억압받는 계급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 움들로 이루어져 있지. 그들이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이야. … 노동자 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보다 맨움이 억압받는다고 밝히는 게 훨씬 극단적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마 성적 억압이 계급 억압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극심하기 때문일 거야.”

물론 맨움들의 이런 해방운동이 역풍을 만나지 않을 리 없다. 움들은 “자연의 불공평함은 맨움이 아이를 갖는 특권을 갖지 못하는 데 있다. 때문에 움의 종속적 기능을 하는 것”이라며 “자연이 맨움에게 생명의 임무를 주지 않은 것은 생물학적 결정이며 후회한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공박한다. 특히 이갈리아의 장관인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는 맨움 해방운동에 대한 논쟁에 움을 대표해 결정타를 날린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라니! 맨움이 계획을 세우고 사회를 통치한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돼 있지 않아.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이 없어.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 만일 맨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맨움이 배제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 … ”

‘오슬로 여성의 집’과 ‘매맞는 아내들을 위한 쉼터’에서 일하고 있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 이 소설을 발표하자 세상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양성을 도치시켜 여성학의 여러 문제를 흥미롭고 의미 있게 짚어낸 이 책은 가히 여성학의 한 전범으로 자리 잡았다. 황금가지 펴냄. 여성학을 전공한 노옥재·엄연수·윤자영·이현정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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