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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40대 실직 가장의 애환 담은 에세이 ‘백수의 월요병’ 펴낸 최영록

“백수가 돼서야 진정한 가족사랑 깨달았어요”

2005. 12. 06

40대 후반의 실직 가장이 다시 취직하기까지 10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담은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끈다. 중년 백수 생활의 참담함, 외로움과 함께 뒤늦게 깨달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최영록씨를 만났다.

40대 실직 가장의 애환 담은 에세이 ‘백수의 월요병’ 펴낸 최영록

“아,아내는 돈을 벌러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속이 쓰리다. 식구들 생각에 나 자신의 꼬라지를 되돌아보니 가슴이 떨린다. 갑자기 세상 살 자신이 없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무섭고 전율이 온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골백번도 더 중얼거려 본다. 세상이나 친구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아내가 말했다. 그래, 세상 잘못도, 친구들의 무심함도 탓할 게 없지.”(‘백수의 월요병’ ‘어쨌든, 삶은 축복’ 중에서)
40대 후반에 ‘잘못된 선택’으로 백수가 돼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고 인생을 배웠다’는 남자가 있다.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최영록씨(48)가 그 주인공. 그는 지금이야 옛 직장에 재입사해 재미나게 다니고 있지만, 40대 중반에 그 어려운 직장 옮기기를 ‘겁도 없이’ 세 번이나 하고, 체질에도 안 맞는 사업에까지 손을 댔다고 한다.
2001년 여름, 그는 20년 동안 기자로 일하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신생 기업에서 홍보 일을 맡았다. 그런데 9개월 정도 지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6개월가량 쉬게 됐다. 이것이 그의 첫 백수 생활이었는데, 그때는 세상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가을, 성균관대에서 홍보 일을 하게 되면서 백수에서 탈출했다. 그런데 지난해 3월,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멋모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4개월 만에 손을 들었어요. 체질상 죽어도 못할 일이더라고요. 그러면서 두 번째 백수 생활이 시작됐는데, 지난번과는 달리 죽을 맛이었어요. 박탈감과 공허감, 열패감에 몸부림을 쳤죠.”
10개월 동안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 5월 초 성균관대로 복귀한 그는 “다시 일을 하게 된 요즘 정말 행복하다”고 말한다.
“백수 시절, 솔직히 외로웠어요. 그전까지 저는 혼자 밥이나 술을 먹어본 적도 없고, 늘 옆에 누군가가 있었죠.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있다가 한순간 혼자가 되니까 외롭더라고요. 좋아하는 술이나 책으로도 그 외로움은 풀리지 않았어요. 문득,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면 안 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어요. 세상과 이야기하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세상에다 대고 나 여기 살아 있노라고,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자신의 고등학교 동문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1주일에 두세 번 ‘백수일기’(나중에는 ‘자유인 일기’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수가 된 자신의 처지, 굳이 백수가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40대 후반 남성의 희로애락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그의 표현대로 ‘솔직하다 못해 너무 까발리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속내를 다 드러냈다.

백수도 직장인처럼 월요병을 앓는다
다행히 세상으로부터 메아리가 울렸다. 그는 “두세 편 올렸더니 친구들이 격려도 많이 해주고 좋은 댓글도 남겨주었다”며 “그래서 기분이 좋아 계속 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전에는 친하지도 잘 알지도 못했던 친구들이 그의 곁에 다가왔는가 하면 하루하루 그의 일기를 기다린다는 팬도 생겼다고. 백수일기는 올 4월까지 총 1백8편이 올려졌고, 그중 37편은 최근 에세이 ‘백수의 월요병’으로 엮이게 됐다. 그리고 더 이상 백수가 아닌 그는 요즘 새로이 ‘직딩 일기’를 쓰고 있다.
백수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자, 그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다른 친구들은 모두 명함을 주고받는데, 나는 줄 명함이 없을 때”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보다 가장 죽을 맛일 때는 월요일 아침”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백수에게도 월요병이 있는데 그 병을 한 번 앓고 나면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서 요즘 어쩌다 토요일에도 일을 하러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고 한다.

40대 실직 가장의 애환 담은 에세이 ‘백수의 월요병’ 펴낸 최영록

백수 생활을 통해 포기 아닌 희망을 배웠다고 말하는 최영록씨.


“백수들도 토요일, 일요일을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왜냐? 그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쉬는 날이니까 백수인지 아닌지 모르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가장 죽을 맛은 월요일 아침이다. 어디 갈 데가 없지 않은가. (중략) 일요일 오후를 넘어 어스름이 슬금슬금 나를 감싸오면 다가오는 월요일이 얼마나 겁이 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백수의 월요병’ ‘백수의 월요병’ 중에서)
백수 생활 6개월이 지나갈 무렵, 그는 “하루빨리 취직을 해야 한다”는 현실의 압박에 몸도 마음도 다 지쳐버렸다고 한다. 그즈음 막역한 후배가 “형은 백수가 아니고 자유인이야. 처음으로 인생을 성찰할 기회가 생긴 거야. 그러니 힘을 내. 형 뒤에 나도 있다”며 격려 겸 위로를 해주었다고.
“그 말이 눈물나게 고맙더라고요. 역시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후배 말대로 ‘힘을 내자’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아무리 힘을 내봐도 순간순간 찾아드는 백수의 서글픔은 어쩔 수 없었다며, 그는 돼지저금통을 털었을 때의 서글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드는 결제일을 막지 못해 기어이 부도가 나고, 아들에게 준 용돈마저도 회수해 다 썼을 때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잡혔어요. 그런데 술을 마시다 보면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야 할 텐데, 수중에 돈이 없는 거예요.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돼지저금통이었죠. 그나마 동전이 눈에 띄기만 하면 가족들 모르게 저금통에 넣어둔 게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저금통을 터는데, 기분 정말 안좋데요.”
돼지저금통을 터니 5백원짜리 동전이 26개, 1백원짜리 동전이 1백50개, 합해서 모두 2만8천원이 되었다고 한다. 동전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은행에 가는데, 그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더라고. ‘백주 대낮에 은행에서 저금통을 턴 동전을 바꾸는 후줄근한 40대 후반의 이 남자, 구멍가게 주인인가, 좀스런 바늘도둑인가’ 하고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아 자괴감과 서글픔이 느껴졌다고 한다.
백수 시절, 그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쁜 아내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주부들의 고초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28평 작은 아파트 살림이 왜 그렇게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티도 안 나는지, “에잇, 이 놈의 주부 노릇도 못해먹겠다”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주부들의 심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열심히 장을 봐서 모처럼 네 식구가 저녁을 맛있게 먹어보자고 없는 솜씨를 발휘해 이것저것 만들어 정성스레 상을 차렸어요. 그런데 2시간을 기다려도 아내는 오지 않고, 전화도 없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시 전화를 해봤더니, 아내는 회의가 있어 늦는다고 아침에 얘기하지 않았냐는 거예요. 아차, 싶었죠. 그리고 아하, 했죠. 반찬 새것 몇 가지 해놓고 전화도 없는 남편 기다리다 찌개 몇 번씩 데우는 아내들의 기분을 알겠더라고요.”

가족들의 사랑으로 힘든 백수 시절 무사히 통과
캄캄하기만 하던 백수 시절, 그는 “가족은 나에게 빛이요, 희망이 돼 주었다”고 말한다. 언젠가 너무 괴롭고 힘든 나머지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가족들은 그런 그를 무능하다고, 연약하다고 책망하지 않고 조용히 위로를 해줬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는 아내의 말에 속으로 찔려서 움찔했어요. 아빠를 사랑한다며 부디 그런 말은 하지 말아달라는 큰아이의 간절한 눈빛에 속울음을 삼키기도 했죠. 그때 가족의 사랑이 진정으로 살갑게 와 닿았어요. 그동안 친구와 술에 빠져 가족들과 소원하게 지낸 날들이 얼마나 후회됐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그는 전에는 “가족을 몰랐다”고, “가족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사람 좋아하는 그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실하기 위해 정작 그의 가족에게는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하고는 결혼 22년 동안 천 번도 더 싸웠을 거예요. 성격이나 체질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백수로 생활하는 지난 10개월 동안에는 두세 번 정도밖에 안 싸웠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바가지도 안 긁고 힘든 시기를 참고 기다려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40대 실직 가장의 애환 담은 에세이 ‘백수의 월요병’ 펴낸 최영록

최영록씨는 백수 시절 힘들 때 용기와 격려를 해준 아이들이 고맙다고 한다.


아내는 물론이고, 그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한다. 한번은 아내가 그를 ‘백수’라고 놀리자, 큰아들이 정색을 하며 “엄마, 앞으론 절대 그런 말 하지마” 하더라고. 어느 비 오는 날, 혼자 술을 마시다가 아들에게 ‘보고 싶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아들은 득달같이 달려와 술동무가 돼주었다고 한다. 백수의 못난 아빠라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아들들이 있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에 삶을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는 그는, 앞으로 평생 두고두고 가족에게 사랑을 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시작일까. 그는 매일 아침, 아침잠이 많은 아내를 위해 대신 아침밥을 차린다고 한다. 그리고 재수하는 큰아들의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싼다고 수줍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세상 살기 참 힘들다”고 말한다. “백수 생활을 통해 포기가 아닌 희망을 배웠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평생 살아가다 보면 어찌 항상 햇볕 쨍쨍 내리쬐는 날만 있겠느냐”고,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것이고 햇빛은 다시 우리를 비춘다”고. 그리고 그 햇빛 비치는 “미래를 위해 준비하자”고 덧붙인다.
“앞으로 적어도 20~30년은 더 살게 될 테고 그중 한 20년은 사회생활을 해야 할 텐데, 또다시 백수가 되지 않으란 법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자격증을 따고 대학원에도 다니려고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약속을 잡는다. “바람이 불어 술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백수 시절 술 사주던 친구들에게 ‘웬수’를 갚기 위해서”라며 사람 좋아 보이는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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