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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자랑스런 한국인

스파이 혐의로 미국에서 수감생활하고 한국 찾은 로버트 김

“저는 미국을 배신한 게 아니라 한국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글·최호열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5. 12. 06

미국의 군사기밀을 한국에 넘겨준 혐의로 체포돼 10여년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던 로버트 김이 지난 11월 초 한국을 찾았다. 그를 만나 고국을 방문한 소감과 한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 그간 그와 가족이 겪은 마음고생을 들어보았다.

스파이 혐의로 미국에서 수감생활하고 한국 찾은 로버트 김

지난11월6일 오후 6시경, 백발의 노부부가 인천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뜨거운 박수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96년 자신이 취급하는 미 군사기밀을 한국 측 인사에게 건네준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 10월에야 자유의 몸이 된 로버트 김(65·한국명 김채곤)이 부인 장영희씨(62)와 함께 10여년 만에 한국을 찾은 것이다.
김씨를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당시 그로부터 미 군사기밀을 넘겨받았던 백동일 예비역 대령(57). 10여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말을 잊은 채 뜨거운 포옹과 눈물로 미안함과 그리움을 대신했다.
인천의 한 호텔에서 모국에서의 첫밤을 보낸 후 다음 날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전북 익산 원불교 납골당 영묘원을 찾은 로버트 김은 19일 동안 한국에 머물며 조용기 목사,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전 대통령, ‘로버트 김 후원회’ 회원 등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만나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한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다 11월24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김씨 부부를 입국장과 11월8일 진행된 KBS 교양 프로그램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녹화장에서 만났다.
“66년 한국을 떠나 39년 만의 귀향이네요. 물론 몇 차례 방문한 적은 있지만 일정이 너무 짧아 친지와 친구들도 제대로 못 만나고 돌아가곤 했어요. 그나마도 96년 2월에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어요.”
로버트 김의 눈엔 기쁨과 회한이 가득했다. 부인 장씨도 “그동안 한국에 올 때마다 혼자여서 마음이 아팠다. ‘다음엔 꼭 남편이랑 같이 와야지’ 했는데 이번에 그렇게 돼 정말 기쁘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에 건넨 자료들이 미국 안보에 위협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로버트 김은 미국 정부에서 먼저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 미 해군정보국에 정식으로 취직시켜주겠다’고 제안했을 정도로 유능한 컴퓨터 정보분석관이었다.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는 줄곧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들도 오르기 힘든 요직에서 일했다. 그런 그가 왜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 군사기밀 자료를 한국에 넘겨주었던 것일까.
“당시에도 미국 판사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한국과 미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나는 당연히 한국 선수를 응원할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 일을 선뜻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은 미국 법원에서 판결한 것처럼 스파이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한국에서 애국자로 불리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자신은 그저 평화를 사랑하는 보통사람일 뿐이라는 것.
“미국에 충성할 것을 선서한 미국 시민으로서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건넨 자료들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내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미국에 죄를 짓지 않았고, 단지 한국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는 96년 당시 북한이 김일성 주석 사망(94년) 후 지도부가 공백 상태였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를 너무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통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북한 관련 정보를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백동일씨에게 건네주었다는 것.
하지만 미 법원은 그에게 ‘국가기밀취득음모죄’로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형의 실형을 선고했다. 결국 그는 지난 2004년 6월 특별감형으로 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지난 10월 보호관찰 집행정지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10여년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스파이 혐의로 미국에서 수감생활하고 한국 찾은 로버트 김

교도소 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그는 “아들뻘 되는 간수에게 욕설을 들을 때, 이유 없이 몸 수색과 방 수색을 당할 때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에선 교도소에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도소 안의 교도소라 불리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너무 끔찍해요. 저는 처음에 치과보조원으로 일을 했는데 도난사고가 발생해 그곳에 갇히기도 했어요.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기도 하고, 목공소에서 일하기도 했죠. 영어를 모르는 재소자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도 하고, 플라스틱 화분과 컨테이너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어요. 그 일은 너무 힘들어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였어요.”
그보다 더 고생한 사람은 부인 장씨였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하던 장씨는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다 무리가 와서 다리수술을 받기도 했다.
“처음엔 갑자기 수입이 끊겨 힘들었죠. 카드사에서 독촉전화가 오고…, 앞이 캄캄했어요. 전업주부였다가 뒤늦게 일을 하려니 힘들었고요. 하지만 한국에서 남편 돕는 후원회가 생기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장씨는 남편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주말이면 새벽에 일어나 아픈 다리를 끌고 왕복 8시간을 꼬박 운전해 남편 면회를 갔다고 한다. 힘들지 않았냐고 하자 “그게 내 직업이니까요” 하며 웃었다.
“저는 자유의 몸이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하잖아요. 남편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보람이 컸어요.”
장씨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육체적인 아픔보다도 시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혼자 한국에 왔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했다. 로버트 김의 아버지는 김씨가 교도소에 있던 지난해 2월, 어머니는 교도소를 갓 출감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을 때인 지난해 6월 잇따라 작고했다. 로버트 김으로서는 부모님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물여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번도 장남 노릇을 하질 못했어요. 정년퇴직을 하면 꼭 모시고 살면서 못다 한 효도를 하려 했는데…. 2003년경 아버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면회를 오셨어요. 제 어깨를 두드리며 ‘채곤아 기다릴게. 용기 잃지 마라’고 격려해주셨는데,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어요.”
그의 자녀들도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특히 장남 월터씨는 관공서와 연계돼 국가정보를 취급하는 일을 했었는데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죄를 지은 아버지를 둔 까닭에 펜타곤(미 국방부) 등 주요 관공서에 들어갈 수 있는 패스를 압수당하고 비밀취급 접촉불가 처분을 당했다. 정보를 취급하는 일을 하는데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면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결국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제가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은 셈이죠. 부모라면 그 막막한 심정을 잘 아실 겁니다.”

“처음에는 저를 외면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섭섭함 있었지만 이미 다 잊었어요”
그는 ‘한국을 사랑한 죄’로 미국으로부터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한국 정부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섭섭하지 않냐고 묻자 “다 잊었다”고 한다.
“억울하지 않다고 하면 위선일 겁니다.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국민들의 사랑이 그 섭섭함을 덮었어요. 한국은 한때 나를 외면했지만, 한국 국민들은 10년 동안 저를 기억하고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교도소로 보내온 위문편지,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용돈을 아껴가며 성금을 보내준 국민들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자신의 술값을 아껴 보낸다는 대학생의 편지에 뜨거운 동포애를 느꼈다고.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식사를 다 책임지겠다는 식당주인도 계시고, 자신의 오피스텔을 무료로 쓰라는 분도 계셨어요.”

스파이 혐의로 미국에서 수감생활하고 한국 찾은 로버트 김

로버트 김은 앞으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저를 도와준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 겁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 저의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곳에서 힘닿는 대로 일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우선은 청소년들에게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조국이 무엇인지 등을 들려주고 싶어요. 그 방법은 다양할 겁니다. 강연을 할 수도 있고, 이메일 상담을 할 수도 있고요. 우선 제 후원회 웹사이트(www.robertkim.or.kr)에서 신청을 받아 이메일 편지를 주고받으려고 합니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미국 시민이지만 외국에 머물며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저도 미국 시민권을 버리지 않고 여기서 사는 방법도 생각해 보고 있어요.”
옆에 있던 김씨의 동생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이 “오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형님의 자식들과 손자들이 지금 미국에 터를 잡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형님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 다시 미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간첩죄’를 지었던 것이기 때문에 입국을 거절당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형님은 다시는 아이들을 못 만나는 것이죠. 그래서 시민권을 포기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로버트 김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국적’이나 ‘소속’ 같은 2차적 사회집단보다는 뜨거운 핏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바람직한 한미관계를 묻는 질문에도 “형제 같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상하관계가 아니라 대등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혈연관계이길 바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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