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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드라마틱한 삶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 재미교포 사업가 이기희 인생 고백

“남이 나를 불행하다고 보는 것이지 이 세상에 불행한 삶은 없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조영철 기자

2005. 01. 03

미국에서 갤러리를 경영하며 성공한 사업가로 주목받고 있는 이기희씨가 최근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을 펴냈다. 지난 12월 잠시 귀국한 그가 들려준 영화 같은 사랑,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공개한다.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 재미교포 사업가 이기희 인생 고백

광개토대왕이 중원을 내달리며 영토 확장에 앞장섰다면 재미교포 이기희씨(52)는 감각 하나로 미국인들의 ‘벽’을 점령한 여장부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윈드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화가인 그는 스스로를 ‘성형수술 팀장’이라고 지칭한다.
“벽을 성형수술하는 큐레이터라고 할까요? 기존 화랑의 개념을 완전 파괴했어요.”
그는 ‘화랑에 앉아 고객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미국인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림을 투기 목적이 아닌 보고 즐기는 생활소품으로 구입하는 미국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고객 유인작전을 쓴 것.
“그림을 당장 사라고 하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요.”
그는 트럭에 그림 30~50점 정도를 싣고 가정집이나 기업체를 방문해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그냥 한 달 동안 걸어두라”고 권유한다. 그런 다음 “만일 경제적인 형편이 안 되면 한 달 후 다 돌려줘도 괜찮다”고 말해 고객이 갖는 부담감을 없애는 동시에 은근히 자존심을 자극한다.
그가 소비자와의 게임에서 이기려면 최대한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의 무기는 바로 ‘성형수술’이다.
“저희가 팔 그림과 그 그림을 걸어둘 벽이 딱 어울릴 수 있도록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여러 가지 손질을 해줍니다. 만일 고객이 갖고 싶어하는 그림의 색채가 집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화가에게 채색을 다시 해달라고 부탁해서 고객의 벽과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대여 받았는데 한 달 후 벽면에서 그것을 떼어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림을 보고 따뜻함, 행복감, 편안함을 느꼈는데 그 ‘정서’까지 반환하고 싶겠어요? 저는 그 점에 착안해 ‘움직이는 갤러리’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윈드 갤러리에는 화랑에 걸려 있는 그림보다 남의 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훨씬 많다고 한다. 이 전략은 특히 병원 마케팅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 미국의 병원은 서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어요. 저도 여기에 발맞춰 병원을 고급 호텔처럼 바꾸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흰색의 차가운 병동이 아니라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으로 화사하게 실내장식을 하는 것이죠.”
그는 현재 미국 대형병원 3곳과 계약을 마치고 각 병원의 응급실, 수술실, 환자 병동 등에 편안한 그림을 걸어 환자들의 통증을 덜어주는 새로운 차원의 의료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인데, 그림과 공간의 조화를 꾀하다보니 자연스레 시공 및 실내장식도 그의 사업 영역으로 떠맡게 됐다.
반미 외치는 운동권 학생일 때 미군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져
“대형병원들이 미국 전역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어서 앞으로 시장성은 무궁무진해요. 그 병원들까지 다 ‘성형수술’ 들어가야죠. 병원 로비에 피아노도 설치하고 그림에 맞는 음향시설도 새로 할 계획이에요.”
사업 이야기를 듣는 도중 경상도 억양이 강하게 배어나는 그의 말투와 단호한 눈빛에서 ‘보스’ 냄새가 풍겼다. 그에게 기질적으로 타고난 여장부 같다고 농을 던졌더니 그가 정색을 한다.
“껍질만 강해 보이지 알고 보면 약한 여자예요. 제 약점을 들켜버린 사람 앞에서는 그냥 무너져버리죠(웃음). 오죽했으면 첫 남편이 ‘너무 귀여워서 키우려고 결혼했다’는 말을 했겠어요?”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 재미교포 사업가 이기희 인생 고백

이씨는 딸 리사의 투병 기간 동안 고통을 떨치기 위해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미국에서의 결혼생활로 넘어갔다. 첫 번째 남편 제임스 버드월스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그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경북 달성 출생인 그는 경북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다녔다. 고교시절에는 학생회장을, 대학 때는 총학생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의 말로는 “선머슴이 따로 없었다”고 하는데 그는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대학생 시인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주변문학’이라는 동인을 결성,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영화감독 이창동 전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25세에 요절한 소설가 김원도씨(소설가 김원일의 동생)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연히 남학생들의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김원도씨를 비롯해 그를 연모한 남학생들이 줄을 섰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는 대형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대학 4학년이던 해 18세 연상의 미군 보급사령관 제임스 버드월스 육군 대령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반미를 외쳤던 운동권 학생인데다 시까지 쓰던 제가 미군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자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요. 남학생들은 충격이 컸나봐요. 저를 ‘점령군의 여자’라고 부르질 않나 ‘부르주아를 갈망하는 배신자’라고 욕하질 않나….”
그가 첫사랑을 처음 만난 곳은 미국독립기념일 파티장이었다. 당시 그는 계명대 학장의 주선으로 주한 미국 공보관 부인의 한국어 개인교사를 했는데 이 인연을 계기로 파티에 초대됐던 것. 이때 그는 운명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파티장에서 잠깐 만난 것뿐이었는데 제임스가 다음날 학교로 초콜릿을 들고 찾아왔어요. 학교 구경을 시켜달라는 거예요. 함께 학교 구경을 하고 저녁식사를 했죠. 아주 분위기 있는 곳이었는데 제가 먹을 스테이크를 하나하나 썰어주더군요. 늘 남학생하고만 어울려 선머슴 같았던 제가 그 순간 착한 공주로 둔갑하더라고요.”
이들에게 국적이나 나이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낌없이 사랑해 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둘이 데이트를 하며 거리를 걸어다닐 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했어요. 사람들이 제 뒤통수에다 대고 ‘부모가 누군지 모르지만 불쌍하다’ ‘어디 할 일이 없어서 양색시질이야?’ 하면서 온갖 질책을 다 했으니까요.”
그가 하도 수모를 당하니까 급기야 제임스가 “날 만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면 만나지 않아도 좋다”는 말까지 해왔다. 그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그것도 대구에서 미군과의 자유연애는 한계가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어렵게 교사 자리를 얻어 취직했는데 매일 제임스가 학교 앞에 와서 기다리니까 온갖 소문이 다 나고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 들어갔어요. 거의 해임될 지경이었죠. 남의 눈총 때문에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연애를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76년 그는 부임한 지 석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제임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단꿈에 젖어 신혼을 즐기던 무렵 딸 리사 에밀리(29)도 태어났다.
그런데 딸 리사는 다운증후군에 선천성 심장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리사를 살리려면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77년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갔다. 미국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남편과 관계된 미국 상류사회에 적응하는 한편 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냈다.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 재미교포 사업가 이기희 인생 고백

이씨와 그의 가족들. 사진 위 왼쪽부터 남편 우테이씨, 큰딸 리사, 아들 크리스, 딸 크리스티나, 친정어머니.


“리사가 심장판막천공이라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십이지장도 막혀 있어서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리사가 계속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어요. 열두 시간씩 젖병을 물려도 우유 반병을 채 못 먹었거든요. 심장수술도 빨리 해야 하는데 체중 미달이라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리사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서 그의 ‘아메리칸 드림’은 여지없이 깨졌다. 말도 통하지 않아 늘 답답하고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식도암으로 전남편 잃고 귀국 무렵 두번째 남편 프러포즈 받아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 리사를 돌보면서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유명 화가의 워크숍에도 참가했어요. 또 중국인 화가한테 동양화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미술 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지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어요.”
남편 제임스는 대학생 아내를 아침에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저녁에는 데리러 왔다. 그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대신 리사를 돌봐주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영어가 부족한 그이기에 리포트 작성도 제임스의 몫이었다고 한다.
미술 공부에 재미를 붙여갈 무렵 리사는 체중이 점점 늘어났고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리사가 심장수술을 안 하면 평생 식물인간처럼 누워 지내야 한다고 했지만 수술을 한다고 해도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만일 수술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아이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 입으려고 검은색 드레스를 챙겨 텍사스에 있는 병원으로 갔어요.”
그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리사도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마음 놓고 예술학 석사 과정 공부를 하면서 반지하 작업실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그림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남편이 식도암 말기로 3개월밖에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결국 남편은 3개월 남짓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제임스가 죽으니까 미국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더라고요. 영구 귀국을 결심하고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했어요. 부동산에 집도 내놓고 차도 팔았죠. 한국에 집을 얻어놓고 내부 수리도 하고 비행기표까지 다 예약해놓았어요.”
그런데 귀국 날짜를 딱 7일 남겨놓은 어느 날, 영화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우체국에 일 보러 갔다가 배가 고파서 근처 중국음식점에 들어갔어요. 평소 중국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한 끼 때울 생각이었죠. 그곳에서 두 번째 남편을 만날 줄 누가 알았나요.”
그가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식당 주인 우테이씨(64·중국계 미국인)가 그에게 다가왔다. 우씨가 그에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시동생이 중국에서 가져온 그림 팔아주다 사업가로 성장
“키도 작고 얼굴도 까무잡잡해 무시했는데 이틀 뒤에 정장 차림을 하고 황금색 벤츠까지 타고 나타났어요. 첫 데이트를 하는데 레스토랑에서 2백50달러짜리 와인을 시키더군요. 그날 저에게 ‘당신은 반드시 나와 결혼할 겁니다’ 그러는데 정말 기가 막혔어요.”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 재미교포 사업가 이기희 인생 고백

60세가 되면 새로운 학문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이기희씨.


‘우서방’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지금의 남편 우테이씨는 홍콩에서 영화 배급 일을 했던 사람이다. 집에서 살기가 귀찮아 12년 동안 호텔 생활을 했을 정도로 수십억대 재산가였다. 그런데 맏형이 그의 명의로 증권투자를 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홍콩에 남아 있다간 쇠고랑 찰 판이어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졸지에 중국식당 주인이 되었던 것.
“남편이 키도 작고 중국 사람이고 하니까 ‘네가 뭘 어쩌려고?’하는 마음으로 깔보다가 넘어갔어요.”
그는 한국행을 취소하고 우테이씨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두 번째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주변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악담을 퍼부었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제가 정신병에 걸린 줄 알고 안수기도까지 했잖아요. ‘외로워서 그냥 엎어진 것 아니냐?’ ‘도둑놈 만나서 유산 뺏기는 것 아니냐?’는 등 별별 소릴 다 들었어요. 창피하다고 구박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제임스가 교과서형이라면 우테이씨는 홍길동과 돈키호테의 중간쯤 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는 우테이씨와의 사이에 크리스티나(19), 크리스(16)를 두고 있다. 한때 그는 남편과 함께 제이드 가든 레스토랑 체인점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98년 혼자 힘으로 윈드 갤러리를 세웠다.
그가 화가가 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한 사람이 첫 번째 남편 제임스라면 그가 윈드 갤러리를 세우고 사업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시동생이다.
“시동생이 그림 도매업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중국에서 동양화를 잔뜩 사왔어요. 그런데 그림이 하나도 안 팔렸어요. 그때 엄청난 손해를 봤죠. 아는 사람들한테 그림을 거저 나눠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림을 보관할 데가 마땅치 않은 거예요. 그림 보관 방법을 찾다가 아주 우연히 화랑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는 윈드 갤러리가 지금처럼 커질 줄 알았나요. ‘기왕 시작한 일 실패하면 창피하니까 열심히 하자’는 각오로 덤비다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최근 그는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을 펴내고 한국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는데 “인생은 앞이 보이지 않는 지도 같았지만 그래도 축복이었다”는 생각에 책 낼 결심을 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불행했다는 기억이 없어요. 남이 나를 불행하다고 보는 것이지, 이 세상에 불행한 삶은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앞으로 60살이 되면 윈드 갤러리에서 손을 떼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시도 그림도 아닌 전혀 새로운 공부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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