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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사람의 삶

한국인 최초로 나이지리아에서 부족 지도자로 추대된 김우성

“한때 청부살인 누명 쓰고 법정에 선 적도 있어요”

■ 글·차지완 ■ 사진·박해윤 기자

2003. 10. 02

부족 공동체 의식이 강한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인이 부족 지도자로 추대돼 화제가 되고 있다. 대우건설 김우성 과장이 그 주인공. 18년 전, 비정규 기능공으로 파견된 후 오늘날까지 현지인들과 한가족처럼 지내며 신망을 얻어 지도자로 추대된 사연.

한국인 최초로 나이지리아에서 부족 지도자로 추대된 김우성

나이지리아 포트하커트 에자마의 지도자로 추대된 김우성 부부.


지난 8월13일 오전 10시경(현지시간). 나이지리아의 남부 유전지대인 포트하커트의 에자마 커뮤니티(부족마을). 현지 커뮤니티의 최고지도자인 아그바라의 저택에서 지도자(Chief) 추대식이 열렸다.
추대식 분위기는 매우 엄숙했다. 저택 앞쪽에서 어린아이가 울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를 집 안에 데려다놓은 뒤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모습이 보였다. 행사를 방해할까 두려운 눈치였다.
묵묵히 앉아 있던 커뮤니티 최고 지도자 아그바라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Now, you’re a chief(이제 당신은 지도자입니다)! 한국인 지도자의 탄생으로 에자마 커뮤니티와 한국의 관계는 더욱 좋아질 겁니다.”
아그바라는 지도자만이 입을 수 있는 나이지리아의 전통의상을 한 한국인에게 입혔다. 또 권위를 상징하는 중절모와 지팡이를 건네고 한국인의 손을 치켜들었다. 박수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원로급 지도자들도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한국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앞마당에는 이미 술과 음료수가 놓인 잔칫상이 마련돼 있었다. 한국인이 나이지리아의 마을 지도자로 추대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 정도인 인구 7만명의 에자마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 한국인은 다름아닌 대우건설 포트하커트 캠프의 김우성 과장(45). 그가 나이지리아에 건너온 지 꼭 18년 만의 일이다.
그러니까 김과장이 ‘아무것도 모를 27세의 나이에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모르고’ 나이지리아에 간 게 85년의 일. 당시 나이지리아는 석유 생산으로 올린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도로와 공장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던 때였다. 대우그룹도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나이지리아 공사 수주에 뛰어들었다.
그가 배치된 현장은 나이지리아 와리 지역의 석유화학공장. 그는 해외근무에는 특별 수당이 지급되므로 젊은 나이에 목돈을 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규사원이 아닌 기능공의 신분. 현장 관리직원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데다 현지인 근로자와의 마찰도 심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도 극복하기 힘들었다. 그가 나이지리아에 도착할 무렵만 해도 한국인과 현지인 근로자 사이에는 싸움이 잦았다. 현지인 근로자가 벌이는 파업으로 공사기간이 지연되고 손실을 입을 때도 많았다.

현지인과 회사 갈등 중재 잘해 ‘해결사’ 별명
“처음에는 정말 고생 많이 했죠. 저뿐만 아니라 당시 대우건설 동료들이 다 마찬가지였어요. 어떤 친구는 한국에 돌아갈 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기까지 하더군요.”
그럴 때 김과장이 선택한 전략이 ‘적극적인 현지화’였다. 요즘은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현지화 전략’을 펼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발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우선 나이지리아 친구 사귀기에 주력했다. 어려울 때면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지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구가 하나둘씩 생기면서 현장도 평온을 되찾았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해결됐다. 현지인 친구가 김과장의 편을 들어주고 동료들을 이해시킨 덕분이다. 덕분에 ‘해결사’란 별명도 얻었다. 나이지리아에 일하러 온 지 5년째 되는 해. 그는 회사로부터 이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정사원으로 승격됐다.

한국인 최초로 나이지리아에서 부족 지도자로 추대된 김우성

지도자로 추대되며 상징 지팡이를 받는 김우성씨. 추대식후 주민들과 찍은 기념사진.


김과장의 나이지리아 친구 중에는 군인이 유난히 많다. 잦은 쿠데타로 군부 세력의 입김이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미리 사귄 덕분이다. 또 건설현장 주변에서 군인과 맞닥뜨릴 때가 많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접촉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 때 소령, 중령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장, 중장이 됐어요. 요구하는 게 많아서 귀찮을 때도 있지만 한국인과 관련해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니까 고맙죠.”
현지인이 요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인사청탁. 대우건설 공사현장에 자신의 친인척을 근로자로 써달라는 부탁이다. 급여 수준이 다른 사업장보다 높아 한 사람만 벌더라도 10여명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게 현지 대우건설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김과장은 지금까지 세 차례 인사청탁을 받아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그가 내세운 조건은 “한국 직원만큼 일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접사나 배관사는 나이지리아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직업인데도 생산성이나 품질은 한국 근로자의 4분의 1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집중적으로 훈련시킨 결과 요즘은 한국인 못지않게 일을 잘합니다.”
김과장이 결혼을 시킨 직원도 있다. 현지에서는 남자가 결혼할 때 처가에 지참금을 보내는 것이 관례. 김과장의 직원은 사랑하는 여인은 있었으나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과장은 자비를 털어 지참금으로 보태주었고 결혼식 날 케이크까지 선물로 보냈다. 그 직원은 13년째 김과장과 함께 일하고 있다.
“억울한 경험도 무척 많아요. 한번은 청부살인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도 있었죠.”
김과장에 따르면 포트하커트 캠프는 건설 자재와 장비가 많아 현지 도둑에게는 ‘공략 대상 1호’. 이 때문에 현지 군 장교 출신을 스카우트해 경비대장으로 앉히는 사례가 많다.
문제의 발단은 김과장이 데리고 있었던 나이지리아 직원이 업무시간에 건설 자재를 훔쳐 달아나다가 잡히면서 시작됐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김과장은 현지인 경비대장에게 넘겨 경찰서에 데리고 갈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이 경찰서에 데려가는 대신 다리미로 고문을 하다가 직원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던 것. 결국 경비대장과 김과장은 근로자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비대장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김과장의 지시에 따라 고문을 했다”며 허위 진술을 해 청부살인 혐의를 받게 됐다.
“경비대장 역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다 한쪽 눈을 실명했더군요.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죠. 너무 화가 나서 적당히 지나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김과장은 법정에 변호사 5명을 대동하고 출두하겠다고 밝혔다. 경비대장은 줄행랑을 쳤고 다친 근로자에게는 약간의 위로금을 주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산유국인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도 부국으로 꼽혔어요. 하지만 지금은 석유를 수입해 쓸 정도로 자원 관리가 엉성해요.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면 믿겠어요?”
군부 쿠데타와 강성 노조, 빈번한 파업,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패 등이 겹쳐 나이지리아 경제는 지금 현재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대부분이 10여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그후 보수공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로 나이지리아에서 부족 지도자로 추대된 김우성

추석을 맞아 한국에 온 김씨가 아내와 현지사진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왼쪽). 나이지리아에서 살 때의 가족사진(오른쪽).


“이곳 사람들은 충격에 둔감해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피해의식도 크죠.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모두 순진하고 착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생활고가 심해 도둑질을 하더라도 죄의식은 별로 느끼지 않아요.”
지역 커뮤니티의 횡포가 심해진 것은 90년대 중반. 외국계 기업이 속속 진출하고 석유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커뮤니티의 입김도 점점 강해졌다. 특히 공사현장 주변의 커뮤니티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돈을 벌어간다는 이유로 뒷돈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해외공사 성패의 절반은 주변 커뮤니티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과장은 나이지리아에서는 ‘홀아비’ 신세지만 한국에 부인과 딸, 아들이 있는 어엿한 가장이다. 그가 부인 김영숙씨(42)를 만난 것은 나이지리아로 출발하기 전. 연애를 하다 결혼을 앞두고 해외근무를 떠나는 생이별을 경험했다. 우여곡절 끝에 해외근무 4년째인 해에 한국에 들어와 결혼을 했다.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자 괴로움이죠. 생각해보면 포트하커트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93년 그는 부인과 딸을 나이지리아로 불러들였다. 캠프 안에 마련된 사원용 주택에서 6년 동안 함께 살았던 것. 당시 여섯살이었던 딸 카랑이(15)는 지금 중학생, 현지에서 난 아들 경태(9)는 초등학생이 됐다.
“처음에는 갈까말까 망설였어요. 방송 화면 등으로 보았던 아프리카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두려움이 컸죠.”
김영숙씨는 남편 덕분에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돼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다고 말했다.
“신문을 보고 남편이 지도자(chief)로 추대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베푼 만큼 받는 거겠죠. 제가 나이지리아에 있을 때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현지인을 가족처럼 아끼는 것을 보고 사실 저도 감탄할 때가 많았어요.”
남편에 대한 칭찬이 끝이 없다.
“이곳에서 지도자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지만 인구가 1억5천만명에 이르는 데다 종족과 종교에 따라 분쟁이 심해 커뮤니티 단위에서는 지도자위원회가 실질적인 통치자이기 때문이죠.”
이제 포트하커트에서 김과장은 ‘Chief WS Kim’으로 통한다. 회사 일뿐만 아니라 커뮤니티의 현안을 챙기는 일까지 더해져 더욱 바빠졌다.
하지만 요즘 김과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그의 나이가 공교롭게도 올해 45세인 것. 자연 인터넷 뉴스를 통해 들었던 ‘사오정(사십오세 정년)’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어머니(83)의 건강도 걱정이다. 평소 관절이 좋지 않은 데다 최근에는 엉치뼈 수술까지 받았기 때문.
그래도 보람은 있다. 나이지리아의 대우건설 공사현장에서 주변 커뮤니티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해 직간접적으로 회사의 이익 창출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은 남다르다.
“이젠 한국으로 돌아와야죠.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얻은 지팡이가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 가족의 화목한 삶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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