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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명복을 빕니다

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자살 선택한 숨은 이유& 알려지지 않았던 가정사’ 심층 취재

■ 글·이영래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3. 08. 29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지난 8월4일 새벽 서울 중구 계동 현대 본사 사옥 12층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 국내 굴지의 대재벌 현대가의 다섯째 아들로 현대의 적통을 이어 선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이어온 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과연 정회장을 자살로 몰고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8월4일 새벽 5시40분경, 현대 계동 사옥. 사옥 주변을 청소하던 직원이 화단 안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처음 그 직원은 술 취해 쓰러진 취객인 줄 알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새벽 운동을 위해 일찍 출근한 임직원 중 일부도 차를 타고 지나가다 화단 안에 쓰러진 사람을 봤지만 역시 취객이라 생각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누군가 죽은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순간에도 사자(死者)는 신원불명의 인물이었다.
현대그룹 후계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55)이 새벽녘, 다른 곳도 아니고 현대 신화의 상징인 계동 사옥 앞에서 그렇게 발견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누구인지 확인되는 순간, 계동 사옥 앞은 1백여명의 국내외 취재진으로 뒤덮였다. 이날 아침 TV는 ‘현대 아산 정몽헌 회장 자살’이란 굵은 자막으로 긴급사태를 알렸다. 세계 유수 언론들도 정회장의 죽음을 토픽으로 보도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충격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자 신문과 뉴스를 들여다보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도대체 그가 왜 자살했을까’하는 의문. 이날 뉴스 시청률은 평소보다 10% 정도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저기서 자살 동기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게 검찰의 과잉 수사, 가혹행위 의혹이었다. 한 신문보도에 따르면 사건 당일, 계동 사옥으로 달려온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오죽하면, 오죽하면 저 모습이 되셨겠냐구! 검찰의 짓궂은 취조에 너무도 견디기 어려우셨던 거야! 해도해도 너무했던 거야” 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미 주변 측근들은 검찰의 압박조사가 자살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 직감했던 듯하다. 연이어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검찰이 조사 도중 전화번호부 같은 책으로 정회장의 머리를 때렸다”며 가혹행위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검찰은 이런 가혹수사 의혹에 대해 강력히 부인했다. 하지만 가혹수사는 아니더라도 압박수사가 자살의 동기가 된 것은 여러 정황상 분명해 보인다. 정회장은 자살하기 하루 전인 8월2일에도 12시간이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당시 검찰은 한가지 거짓말을 했다. KBS가 “대검 중수부가 박지원씨와 관련된 1백50억원 이외에 별도의 현대 비자금 수사를 벌였고 정몽헌 회장을 추궁해 1백억원대의 비자금을 확인했다”고 보도하자 사실과 다르다며 강하게 부인했던 것. 하지만 이런 부인은 검찰 수사가 정회장의 자살을 초래한 것 아니냐는 의혹과 비난을 차단하기 위한 검찰의 연막이었다. 검찰은 8월11일 권노갑씨를 긴급 체포하면서 이와 관련된 조사를 벌였다고 뒤늦게 시인했다.
현대의 황태자로서, 또 남북 경협의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던 그는 왜 검찰조사를 받다 자살을 선택해야 했을까? 그의 인생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지난 8월8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서 열린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영결식에서 오열하고 있는 세 자녀.


그의 출발은 누구보다 순탄했다. 정몽헌 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서울 보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 집에서의 별명은 ‘샌님’, 보성고와 연세대 시절은 ‘촌색시’나 ‘촌닭’으로 통했다. 어릴 때부터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도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나는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선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런 정회장을 “성격이 찬찬한 아이”라고 표현했다.
연세대 국문과를 문과대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지난 75년 현대중공업 사원으로 입사, 현대건설 등에서 근무하다 79년말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미국 뉴저지의 페얼리디킨슨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가 영어로 유머까지 구사하며 외국 경영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지난 81년 현대상선 사장을 시작으로 최고경영자의 길을 걸어왔다. 최고경영자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특히 전자산업에서 그가 보인 경영자로서의 자질은 놀라운 것이었다. 전자산업에 대해선 어떤 노하우도 갖고 있지 않던 현대는 80년대 중반 전자산업 진출을 꾀하는데, 정회장은 현대전자를 세계 5위권의 반도체 회사로 키워내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 인정을 받았다.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는 사식을 거부하고 꿋꿋하게 견뎌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격려를 들었다. 당시 그에 대해 주변에서는 ‘정 명예회장의 판박이’라고들 했다. 외모로 보면 정 명예회장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 바로 정몽헌 회장이다. 성격은 많이 달랐는데, 정 명예회장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성향이었다면 정회장은 내성적이고 합리적인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격식이나 권위를 따지는 것을 싫어해 공항 티케팅이나 호텔 체크인도 수행원 없이 혼자 처리하곤 했다.

‘왕자의 난’ 이후 재정적 어려움 겪기 시작, 남긴 유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는 정 명예회장의 여덟 아들 중 5남(장남 몽필씨와 4남 몽우씨가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해 몽구, 몽근 회장에 이어 실질적으로는 3남이다)이지만 정 명예회장은 이런 그를 총애해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가 현대가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98년 ‘소떼 방북’ 때였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대북사업에 대해 강한 의욕을 보였는데, 대북사업 창구로 다섯째 아들인 정몽헌 회장을 지목했던 것.
그러나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은 공동회장인 동생 정몽헌 회장이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 현대증권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익치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보내고 대신 자기 사람인 노정익 현대캐피탈 부사장을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하려 했다. 이에 정몽헌 회장측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익치 회장도 인사에 승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귀국한 정몽헌 회장이 아버지를 찾아가 이익치 회장의 원직 복귀는 물론 형의 현대그룹 회장 타이틀마저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정몽구 회장은 다시 여기에 반발하여 아버지의 사인을 들먹이며 공동회장에 복귀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나 결국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나서 “현대경영자협의회 대표는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고 선언, 끝이 났다. 하지만 ‘왕자의 난’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01년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형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그룹을, 동생 정몽준 회장은 중공업그룹을 이끌고 결국 현대를 떠나고 말았다. 형제들 사이의 반목과 분열로 현대그룹은 이때 위기를 맞았다. 주가는 폭락했고, 자금 유동성 문제도 심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룹이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8월4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 부인 현정은 여사가 아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다. 고 정몽헌 회장과 현여사는 지난 76년 결혼,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대는 대북사업에 주력했다. 남북회담 및 경협 대가로 지원된 5억달러(6천억원으로 현물제공 포함)는 모두 현대가 부담한 돈이다. 또 현재 박지원 전 장관에게 제공된 것으로 추측돼 논란이 되고 있는 ‘150억원+α’ 비자금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조사 결과 박지원 전 장관은 2000년 4월 남북 협상중에 정회장에게 정상회담 준비용으로 1백50억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회장은 계열사를 총동원해 마련한 비자금을 박 전 장관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는 총선을 전후한 시기여서 이 돈은 대북 협상용이 아니라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또 정회장은 박지원 전 장관뿐 아니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도 총선 전후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건넸다는 것이 검찰의 조사결과다. 검찰은 이런 혐의를 잡고 정회장을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한 것.
정몽헌 회장으로선 사면초가인 상황이었다. 그가 운명을 걸고 앞장섰던 대북사업이 북핵 위기 등으로 주춤하게 되면서 그의 사업 전반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 금강산 등에 쏟아부은 투자액에 발목이 잡히면서 현대아산, 현대상선의 경영 상태는 극히 악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새 정부는 정회장을 대북 창구로 활용할 의지가 없었다.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 대북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자신이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치부되면서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자 정회장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더욱이 걸핏하면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는 등 변덕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북한 또한 정회장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정회장의 한 측근은 “현대를 공중분해하겠다는 협박 등에 밀려 비자금에 대해 모두 자백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그 자괴감에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검찰은 지난 8월15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구속 수감했다. 대북사업 지원 등을 대가로 현대측으로부터 비자금 2백억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였다. ‘150억원+α’가 ‘150억원+2백억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몽헌 회장은 개인적으로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주주 지위 유지 등 회사 경영을 위해 자신의 자택을 담보로 잡히기까지 했다. 그의 서울 성북동 2층집은 지난해 3월 막내 삼촌인 정상영 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67) 앞으로 근저당권이 설정됐다. 채권 최고액은 20억원인데, 이 집의 시가는 약 25억원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조카인 정회장이 금융회사로부터 빚 상환 압력을 받자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회장은 98년경엔 계열사 유상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보험회사에서 5백억원을 개인 명의로 빌리기도 했다.
정회장이 보유했던 계열사 지분은 모두 담보로 잡혀있거나 완전감자가 예정돼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미망인 현정은 여사(48) 등 유가족이 부채 상속을 꺼려 유산 상속을 포기하지 않겠냐는 전망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자살로 생 마감한 ‘비운의 황태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향후 대북경협 사업이 주체를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는 모두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이중 한 통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그리고 또 한 통은 부인과 자녀들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수신자를 밝히지 않은 채 다만 ‘죄송합니다’라고만 썼다. 다음은 가족에게 남긴 정회장의 유서 내용.




[지이 엄마 모든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짐만 남기는군요. 지이, 영이, 영선, 이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아빠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은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지이야, 오늘 보니 더 이뻐졌더군. 나 때문에 너의 생활이…. 사랑해.영이, 너를 볼 때마다 어른이 되가는 것을 느끼는데 너는 굳건히 잘 살 것이야.영선아, 너 하고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구나.지이, 영이, 영선 엄마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라.]


정회장은 유가족으로 부인 현정은 여사와 1남2녀를 두었다. 큰딸(26)은 유학 준비중이고 작은딸과 아들은 각각 대학생, 고등학생이다. 부인인 현정은 여사와는 군 복무 시절 만나 지난 76년 결혼했다. 대학 졸업 무렵 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 정 명예회장에게 이끌려 선을 봤는데 그 상대가 바로 현정은 여사다. 현여사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낸 현영원씨(76)의 둘째딸로 75년 울산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명명식에 아버지 현회장을 따라 참석했다가 정 명예회장의 눈에 들어 며느리가 됐다.
정회장은 특별히 바쁠 때가 아니면 한달에 한번씩은 부인 현 여사와 함께 극장에 갈 정도로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현여사는 재벌가에서도 내조 잘하기로 유명한 인물. 정회장은 선친인 정 명예회장을 닮아 찌개 한 가지도 집에서 정성스레 끓인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밥상만은 늘 부인 현 여사가 직접 챙겼고, 유명 요리 강사에게 20년 넘게 요리를 배우러 다니면서 남편의 입맛을 보살피는 내조를 했다.
장녀에게 남긴 ‘나 때문에 너의 생활이…’란 유언을 두고 세간에서 혹 장녀가 이번 사태로 생활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한 측근에 따르면 장녀 지이양은 외할머니인 김문희씨(75)의 소개로 정계 실력자의 자제와 교제중이었으나, 최근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측근은 “젊은 남녀가 흔히 겪는 일인데 정회장이 ‘혹 내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그런 것이 아니냐’며 자책했다”고 전했다.
한편 그는 일주일에 한번은 꼭 어머니 변중석 여사(82)를 찾아 서울아산병원에 들렀다고 한다(정회장의 빈소 또한 이곳에 차려졌다). 변여사는 협심증으로 18층 특별병실에서 외부인의 접촉이 차단된 채 1990년부터 투병중이다. 정회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 변여사가 구멍난 양말에 전구를 끼워 꿰매던 모습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 정 명예회장에게 아무리 얘기해도 용돈을 주지 않아 궁할 때는 으레 어머니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대학 시절 그 돈은 대부분 친구들과 막걸리 사 마시는 데 들어갔다.
변여사는 와병중에도 아들의 죽음을 알고 있는 듯 정회장이 자살한 8월4일 공교롭게 식사를 거른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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