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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마흔의 반란

2002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자 이해경의 늦깎이 등단 이야기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2003. 02. 07

“소설 쓰기 위해 회사에 사표 낸 남편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은희경, 전경린 등 스타 소설가를 배출해온 문학동네 소설상이 올해도 대형 신인을 발굴해냈다. 주인공은 이해경씨. 그의 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는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소설 쓰기에 나선 한 사내의 ‘소설 찾기’가 테마다. 실제로 아내의 부추김이 등단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고 말하는 마흔살 사내의 뒤늦은 문학 입문기.

2002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자 이해경의 늦깎이 등단 이야기

“저,여보세요. 김해경씨 댁이죠?”
“혹시 이해경을 찾는 거 아니신가요?”
이크. 이름이 씌어진 소설책을 바로 앞에 두고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죄송하다”는 기자의 당황한 목소리에 이해경씨(40)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왕왕 있다”는 말에 생각을 잠시 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소설가 이상의 본명이 바로 김해경. 착각할 만했다. 이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해경은 필명이다. 본명은 이승호. 제8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이씨와의 만남은 이처럼 만나기도 전에 ‘소설적’이었다.
그에게 수상의 기쁨을 안겨준 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는 직장을 그만둔 ‘그’가 아내의 강권에 못이겨 소설을 쓰게 되는 이야기를 풀어나간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이다. 고교시절, 동명이인이 교지에 발표한 소설을 남편이 썼다고 굳게 믿는 아내는 그에게 ‘팔자에도 없는 소설가’의 길을 걸으라고 강요한다. 도서관을 오가던 그는 마침내 진짜 소설을 쓰는 ‘그녀’를 만나는데…. ‘그’가 머릿속으로 쓰다 만 소설, ‘그녀’가 쓰는 소설, 그리고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녀가 쓰려고는 하나 씌어지지 않는 소설들이 서로 교차하는 이 소설의 구조는 복잡하지만, 그래도 무겁지 않게 잘 읽힌다. 그것은 무엇보다 작가의 능란한 입담과 삶과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묘사들에 힘입고 있다.
“이런 걸 구상하려면 머리가 보통 비상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기자의 말에 이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써야지 하고 구체적으로 작정했다면 아마 못 썼을지도 몰라요. 처음엔 그저 ‘소설 쓰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소설이 써지지 않는다’는 착상에서 출발했어요. 그러다가 ‘그 남자 앞에 진짜 소설 쓰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상상을 해본 거죠. 그렇게 써나가면서 뼈대를 만들고 살을 입혔어요. 그래서인지 심사위원인 김화영 선생께서 도표까지 만들며 네번이나 읽으셨다는 말에, 제가 발견 못한 오류라도 있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죠.”
이씨는 서울대 국문과 82학번이다. 당시는 문학을 하겠노라 저 혼자 부려보는 욕심조차 왠지 미안하게 느껴지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가끔 스크럼을 짜고 교문 앞으로 진출도 하는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그의 짤막한 대학생활에 대한 언급. 대학 내 글쓰는 모임의 친구 몇몇(소설가 주인석, 평론가 권성우,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인 육상효 등등이 당시 멤버였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매달려보자 하는 근성이나 오기는 없었다고 한다. 일찌감치(중학교 2학년 무렵) ‘소설가’를 장래희망으로 삼고, 국문과로 진학했던 조숙한 ‘문학소년’치고는 싱거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중 2때 교지를 만들면서 소설적 허구에 눈을 떴고, 중 3 때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접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소설가가 되겠노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성격이 진득하거나 독하진 못했는지 막상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는 게 선뜻 마음 먹어지질 않더군요.”
그가 소설을 피한 것인지, 소설이 그를 빗겨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졸업 후 약 9년 동안 그는 소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어왔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5년, 동국대 연극영화과 석사과정 수료하는데 2년, 그리고 방송과 인터넷 문화 콘텐츠 개발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또 다시 2년여를 보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소설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3년 전인 2000년에 크리스천이 됐어요.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내적인 변화가 왔다고 할까요. 그 전까지 인생에 대해 상당히 시니컬한 태도를 취해왔다면, 지금은 낙천적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게 아주 작은 재능이라도 있다면, 만약 그게 소설 쓰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재능을 살려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컸죠.”
그리하여 가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회사 대신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는 일상을 보냈다. 이렇게 10개월간 매달린 ‘생애 최초의 장편소설’로 그는 드디어 소설가로서 첫발을 뗐다.

2002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자 이해경의 늦깎이 등단 이야기

이해경씨의 당선작은 이른바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형식을 띄고 있다.


이런 범상치 않은 ‘문단 입문기’를 듣다 보니, 소설 속 주인공인 ‘그’와 실제의 그는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겠노라고 직장을 그만둔 그에게 반색하며 “당신은 소설을 써야 하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아내가 실제로 있다는 점에서 그 의혹(?)은 절정에 이른다.
“2년여 동안 다니던 마지막 직장을 그만뒀을 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그만큼 다녔으면 됐다’고요. 또 ‘소설을 쓰기로 한 건 제일 잘한 선택’이라면서 용기를 북돋워줬죠. 그런 아내가 없었다면 아마 전 소설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도 늘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믿어준 아내. 남편의 소설 진척 상황을 일일이 체크하는 소설 속 ‘아내’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아내 역시 그의 소설을 꼼꼼히 모니터링했다. 80년대 유명했던 영화패 <장산곶매> 멤버였던 아내의 날카롭고도 꼼꼼한 지적은 그의 소설 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특히 “최고다” “재밌다” “아무나 이런 글 못 쓴다”는 아내의 칭찬(?)은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달기만 할 턱이 없었다. 때로 쓰디 쓴 비판에 입맛을 버린(?) 그가 괜한 역정을 부려도 끄떡없는 쪽은 아내였다.
“상을 받던 날, 서로 많은 얘기를 했어요. 아내가 내색 안 했지만 그 동안 속으로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털어놓을 때 새삼 가슴이 찡하더군요. 아내가 없었다면 과연 소설을 끝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전 수상소감에도 이 소설은 저 혼자 쓴 게 아니라고 말했지요.”
대학교 2학년 때 선배의 집에 들락거리다가 만난 참한 여동생.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 끝에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의 두 주인공처럼 10년 세월을 헤어졌다 만나기를 되풀이했다는 이들 부부. 현재 분당의 보금자리에서 아빠의 소설을 재밌다고 평하는 중3 큰딸(16)과 “뭔지는 몰라도 아빠에 대한 얘기가 신문에 났다”고 좋아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작은 딸과 함께 다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내는 현재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중이다. 소설작업에 영향을 받은 만큼 그 역시 아내의 시나리오 작업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내의 작업에 큰 도움이 못 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노력하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아내에 대한 믿음을 살짝 내비친다.
수상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그는 벌써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 상태다. 중편 길이의 소설로 약 4분의 3정도는 썼다고 한다. 줄거리는 비밀.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불러오기’만 하면 될 것 같은, 글감들이 파일 순으로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고. 그러나 글감들이 어떤 식의 외피를 입고 ‘소설’이라는 마당 안에서 펼쳐질지는 그로서도 아직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쓰고 싶은 소설의 방향을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최인훈, 이청준, 이인성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해요. 특히 최인훈 선생님 작품은 거의 다 읽었죠. 세 분 다 한 시대와 이념에 대하여 진중하게 끝까지 파고들어간 작가들이라 생각해요. 또한 ‘스타일’이 강한 작가들이기도 하고요. 외국 작가 중에는 보르헤스, 쿤데라, 하루키를 꼽습니다.”
그가 언급한 작가들의 이름을 듣노라니, 재미있으면서도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소설, 한 방향으로만 일방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다층적인 텍스트를 갖춘 소설을 쓰겠노라는 자신감으로 읽혔다.
“당분간 소설에만 매달릴 겁니다.”
오랜 시간 ‘소설 밖’에서 살아온 세월이 아깝다는 듯 그의 각오는 옹골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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