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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선택

‘성고문 사건’ 악몽 잊고 여성학자로 우뚝 선 권인숙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2003. 01. 09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용기 있게 폭로했던 주인공 권인숙씨. 그는 이번에 펴낸 자전 에세이 <선택>에서 자신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여성학 교수로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의명분에 눌려 지냈던 20대를 거쳐, 30대에야 겨우 여성학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진정한 자신과 행복을 되찾았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인생.

‘성고문 사건’ 악몽 잊고 여성학자로 우뚝 선 권인숙

“한번쯤 제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어요. 그게 옳은지 사람들과 공유하며 얘기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또한 지난 세월에 대해서 한번쯤 엄밀하게 돌아볼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막상 이렇게 책으로 펴놓고 나니,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드네요.”
갈색 니트에 잘 어울리는, 눈에 확 들어오는 앤티크한 목걸이를 건 채 화사하게 웃는 이 여성을 보고 있으니 ‘그 권인숙 맞아?’ 하는 생각이 든다.
권인숙(39).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주인공. 공권력이 무참하게 자행한 성폭력을 고발해 고문 경관 문귀동을 결국 재판정에 세운 용기 있는 여자. 노동인권회관을 설립하고 노동운동에 나선 ‘민주투사.’ 기자의 선입견이었을까. 그러나 눈앞의 그에게서는 ‘투사’하면 흔히 연상되는, 고생이 묻어나는 투박한 외모나 사람들을 대번에 불편하게 만들거나 주눅들게 하는 면이 없었다. 대신 힘겨운 세월을 거쳐 삶을 관조할 수 있게 된 사람 특유의 단단함과 여유로움이 함께 느껴졌다고 할까.
그는 이번에 책 출간과 자료 조사차 일시 귀국했다고 했다. 그가 펴낸 에세이집의 제목은 <선택>.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든 작든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는 고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서른아홉해를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삶의 중요 고비에서 해온 ‘선택’- 학생운동, 성고문 고발, 결혼, 이혼, 여성학 공부에 이르는-을 화두삼아 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시대적 체험과 상처, 사랑과 결혼, 일과 육아에 대한 생각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나의 20대는 집단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사라진 불행한 시기”
권씨가 먼저 한 일은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던 20대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당시 그에게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고. 어려서부터 옳은 일에 나설 때는 계산 없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면이 강했던 그답게, 이 ‘사건’으로 자신의 여성적 미래가 무너질 거라는 계산은 해본 일도 없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여성으로서 자각이 참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제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아닌 건 아닌 거고 옳은 건 옳다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어쩔 수 없는 제 성향 때문이겠지만요.”
그러나 87년 출소 후부터 유학을 결정하기까지 5년의 세월 동안 그는 혼란에 휩싸여 보내야 했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그의 이름은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으로,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각별한 대우를 받았고, 그 역시 사회적·도덕적 명분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노동상담에 매달리며 노동인권회관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이런 문제는 권인숙씨가 역시 나서줘야죠”라는, 사회 각층의 곤혹스런 요구에도 맞추려고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20대를 가리켜 ‘집단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사라진 불균형의 시기’라고 회고한다. 그야말로 “개인의 이름은 도드라졌지만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나를 어느 만큼 죽이고 어느 만큼 살려야 하는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늘 혼돈 속에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여성학이 도움을 줄 것이라 판단했고, 드디어 199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전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회생활에서 남녀는 왜 달라야 하고 달리 취급받는지 늘 궁금했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문제를 얘기하면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절 이기적으로 보거나, 더 중요한 문제, 이를테면 통일, 노동, 민주화 운동 같은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사실 당시 분위기는 그런 주장을 부인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러나 이제는 “여성학이야말로 20대 이후 내가 내린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돌이켜봐도 참 잘했다 싶어요. 그건 결과가 좋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로소 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제 삶에 대한 예의를 찾은데다 무엇보다 제 자신을 믿어도 좋을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미국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겨우 책만 읽을 수 있는 실력, 그것도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회화를 구사하는 실력으로 대학원 공부를 따라가려니 벅차기만 했다. 게다가 1년 먼저 미국에 와 있었던 유학생의 아내로, 기저귀도 떼지 않은 딸아이의 엄마로 학업과 육아, 가사에 매달려야 했으니 그야말로 ‘눈물의 유학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영어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교수가 된 지금도 영어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 반응을 살펴요.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자신감이 송두리째 사라질 정도예요. 이러다가 교수 권위가 흔들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정도죠.”
이를 악물고 석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현재 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 여성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행복한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다.

‘성고문 사건’ 악몽 잊고 여성학자로 우뚝 선 권인숙

권인숙씨는 삶의 중요고비에서 해온 ‘선택’을 화두삼아 자신의 인생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풀어놓은 자전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그런 그에게 왜 한국사회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심한 거부반응’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냐고 기자가 평소 품고 있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거기에 대해 그가 여유 있게 답해주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그러면 어디서나 부정적으로 보죠. 학문의 성격상 언어 하나에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으니, 자의식 강하고 깐깐하고 피곤하기 짝없는 집단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실, 억압받는 사회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소수집단은 늘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상대방을 의식해야 하기에 여유가 없고, 강퍅해지고요. 가진 자들의 여유와 관용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겠죠.”
자신과 많이 달라서 더 예쁜 딸과 함께 사는 기쁨
현재 그는 8년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12살 된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 권씨는 결혼생활에 대해 ‘남편이 생활에서 평등하게 가사노동을 나누지 못하고, 구체적인 자기 역할(가족부양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상대방을 돌보는 마음과 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 많이 아팠고, 납득이 안되는 부당함을 소화하지 못한 채로 울퉁불퉁하게 살았던 시기’라고 책 속에 적고 있다.
“남편과의 이야기는 책을 쓰면서 가장 마지막까지도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이 조심스레 ‘책에 이혼 이야기가 들어 있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아마, 여성학자로서 정작 중요한 자기 얘기를 빼놓아서 되겠느냐는 우려였던 것 같아요. 여성학자로서 제 삶에 솔직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네요.”
그는 이혼 과정에 대해서 딸에게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이가 부모의 이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했고 또 아빠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갖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딸 강이의 존재는 세상 그 어느것보다도 소중하다. 엄마로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힘들면서도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인가 새삼 실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강이는 저하고는 참 다른 성격이에요. 짜증도 안 부리고 늘 밝고 까불까불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상상력도 풍부하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서 욕심 많고 현실적이었던 어린 시절의 저와는 정말 달라요. 그 다른 점이 참 좋아요, 재밌기도 하고. 어쩌면 이렇게 제 맘에 쏙 드는 딸이 생겼는지 경이로울 정도라니까요.”
그러나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교육에 관한 부분은 그에게도 숙제처럼 다가온다고 한다. 그의 생각에 교육에는 왕도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자녀교육에 대한 모든 결과를 엄마 탓으로 돌리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준 같은 게 있어서 그 기준에 미달하거나, 그 기준 밖에 있는 아이는 마치 큰일나는 것처럼 여기는 ‘비교’의 문화 역시 그를 답답하게 만든다.
“전 아이가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계산이 없다는 것뿐이지, 아이는 저절로 크니까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전 비교함으로써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문화, 모든 걸 엄마 탓으로 돌리는 문화 등에 대해서 거리를 두자는 것뿐이죠. 이런 제 철학이 어땠는지는 훗날 강이가 평가해주겠죠.”
누구를 본받으라고 혹은 누구처럼 되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 엄마로서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있다. 자기 자신에게 편안하고 자신감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것. 또 세상을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능력과 유머 감각을 갖춘 사람으로 커줬으면 한다.

‘성고문 사건’ 악몽 잊고 여성학자로 우뚝 선 권인숙

그는 이번 책 출간은 여성학자로서 한번쯤 거쳐가야 할 자기 반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미국이라는 다인종 사회에서 딸을 키울 것인가 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재미교포나 재미교포 1.5세 아이들을 보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자신감이 약하고, 늘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이더군요. 보이지 않는 ‘차별’이 그만큼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이겠죠. 한국은 또 한국대로 입시지옥이라고 하고요. 앞으로도 계속 고민이 될 거 같아요.”
외할머니가 있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잘하는 강이에게는 아직 많은 ‘선택’이 열려 있다. 최선의 결과를 택하기까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엄마의 몫이다.
인생역정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책에는 다양한 읽을거리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 곱게 기른 막내딸의 첫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만 백내장이 와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어머니와 그렇게 속을 썩인 막내딸의 유학 뒷바라지까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해주신 아버지에 대해서 그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죄스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일 사람이 있다면 1990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조영래 변호사를 꼽을 수 있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부천서 사건의 1심 변론 요지와 고발장 등 많은 글을 썼고 그의 재판에서 변론을 할 때면 늘 눈물을 흘렸던, 그가 인생의 스승으로 꼽는 이다.
“면회를 자주 와주셨어요. 한나절 가량 마주 대하고 앉아 세상 사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젊어서 놀아’예요. 너무 엄숙하고 시대가 주는 무게에 눌린 채 사는 걸 안타까워하셨어요. 지금 제 모습을 보시면 좋아하실 텐데….”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열혈 당원으로 자신을 웃겨주는 그가 너무나 좋고, 박완서 선생이 쓴 소설의 광적인 독자로 열번 넘게 읽은 소설도 부지기수이며, 가장 큰 TV를 사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TV 중독환자’였다는 고백을 적어둔 책의 뒷부분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젊어서 놀아”를 그가 지금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호주제 폐지’에 누구보다 목청을 높이는 ‘여성학자’ 신분으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자 반가움에 “난 ‘추밀공파’인데 당신은 몇대 손이에요?” 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는 그가 이제는 ‘까발리면 뭐 어때?’하는 여유까지 갖추고 있는 걸로 읽혀졌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책을 읽는 분들이 이렇게 사는 여자도 있구나 하고 편안하게 봐주면 좋겠어요. 결국 사는 건 저마다의 몫이잖아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솔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시 여러분 중에 자기 인생이 너무나 꼬여 있다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내부에서 ‘이런 걸 하고 싶어’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면 한번쯤은 그 소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
치열하고도 암울했던 80년대를 거쳐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과 애정을 숨기지 않는 권인숙씨. “젊은 시절의 용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내공으로 스며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여성학자 오한숙희씨의 추천사대로, 그는 진정 용기 있고 당당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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